책만 빌리는 바보
조수현
띵! 띵! 띵!
휴대전화 알림이 연속으로 온다. 도서관에서 보낸 도서 반납 알림이다. 책상 한편위태롭게 쌓여있는 책 탑에서 반납할 책을 조심스럽게 빼내 가방에 넣고 나니 한숨이 나온다. 전민, 원신흥, 유성도서관에서 상호대차까지 해서 빌려온 벽돌 책 세 권을 결국 펼쳐 보지도 못하고 보내는구나. 다 읽지도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욕심껏 빌려서 미련하게 끌어안고 있다가 반납 알림을 받고 마지못해 도서관에 가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매번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온다. 책은 못 읽었어도 반납 전 목차만이라고 훑어보기로 한다. 마지막 자존심이다.
육아 휴직을 하면 도서관에 매일 가리라 다짐했다. 작년에 카페 같은 분위기로 리모델링을 끝낸 도서관이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그동안은 거의 주말 오후만 도서관에 갈 수 있었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족 수대로 도서대출증을 만들었으나 그래봤자 최대로 빌릴 수 있는 책은 15권이다. 그중 80~90%는 딸아이의 그림책이고, 나머지는 내가 고른 두께가 얇고 호흡이 짧은 신간 수필 종류로 구색을 갖추는식이다. 주중에 홀로 육아하며 직장생활을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교양을 유지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독서에 대한 목마름은 여름, 겨울방학에 폭식하듯 해결했지만, 학기 중에 미뤄둔 모임 약속을 하나둘 잡다 보면 방학에도 생각만큼 맘껏 책을 읽지 못해서 늘 아쉬웠다.
3월부터 본격적인 도서관 출입이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집안일과 독서를 하고, 딸이 하교하면 함께 도서관에 갔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딸의 이야기에 적당히 반응하며, 긴 겨울잠을 끝내고 기지개를 켜기시작하는 나무와 풀의 변화를 살피다 보면 벌써 도서관 앞이다. 자연스럽게 중앙현관에서 딸은 좌측 어린이실, 나는 우측 열람실로 향한다. PC로읽고 싶은 책 제목을 검색하거나 휴대전화로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를 찾아보거나 하릴없이 서가를 서성이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느긋하게 책을 고르는 것, 책이 딱 그 자리에 꽂혀 있고, 우연히 읽고 싶었던 책을 만날 때마다 자꾸 웃게 된다.
도서관이 이렇게 삶에 큰 활력과 즐거움을 주면서 도서관에 가기 위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에는 딸의 독서동아리 모임이 있으니 무조건 가야하고, 수요일은 평소보다 책을 두 배 더 빌릴 수 있는데 안 가면 손해다. 목요일은 상호대차 알람이 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가서 책을 받아온다. 도서관이 쉬는 월요일이 오는 게 싫다. 직장 다닐 때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우울했던 기분과 비슷하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도서관 출입이 잦다 보니 책 15권도 모자라 상호대차 서비스 3권까지 꽉 채워서 빌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엄마표 공부법 책을 사서 공부하며 딸아이의 성장단계에 맞는 그림책을 찾아 빌리고, 나는 나대로 분류 기호 800 번대 국한되었던 편식 독서 습관을 고치기 위해 철학, 사회과학, 과학, 구매가 망설여지는 비싸고 두꺼운 책을 의도적으로 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성 없이 끼워넣기 식으로 빌려온 책에는 손이 가지 않았고 여전히 나는 소설과 산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읽지 못한 채 반납기일을 맞은 책과 역시 딸의 선택을 받지 못해 강제 반납 당하는 그림책을 가방과 에코백에 담아 도서관으로 향한다. 문득 제우스를 속인 죄로 지옥에 떨어져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가 떠오른다. 온 힘 다해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놓은 바위가 속절없이 아래로 굴러떨어질 때 얼마나 허탈했을까? 평소 그리스 신화 속 가장 안타까운 인물로 시시포스를 꼽곤 했는데, 영양가 없이 책 들고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는 나와 시시포스가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스산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최소 주 3회 이상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고 있다. 4월 말 도서관에서 열린 ‘박준’ 시인 초청 강연 때 시인이 자신을 스스로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이동시키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에 큰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시인의 동네 도서관은 1인 15권까지 도서 대출이 가능해서 자료조사를 위한 책 두어 권, 나머지는 읽고 싶은 책을 양껏 빌려온다고 한다. 시인은 잠을 줄여가며 어떻게든 빌린 책은 다 읽을 줄 알았는데, 반납일 하루 전 도서관에서 보낸 문자를 받고 빌려온 책을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반납할 때도 있다고 했다. ‘어? 나랑 똑같네? 이런 행동이 부끄럽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구나.’
워킹맘으로 세 자녀를 양육하며 시간을 쪼개 많은 책을 읽는 선배에게 책만 빌리는 바보 같은 생활을 하는 내 이야기를 했다. 그녀 역시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아쉽고 씁쓸하지만, 자신과 결이 맞는 책을 고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따지고 보면 도서관에서 책만 이동시킨 것은 아니다. 3월부터 지금까지 서른 권의 책을 빌려 읽고 독후감을 썼다. 도서관에 자주 가다 보니 도서관에서 열리는 행사 정보도 빠르게 얻게 되어 딸은 주 2회 독서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었다. 박준 시인 초청 강연도 도서관 게시판에 있는 공지 사항을 매번 확인한 덕분에 듣게 된 것이다. 무용하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무용한 것은 아니었구나! 깨닫게 되니 힘이 난다.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읽고 싶은 책 제목을 검색할 때 나는 키보드 소리가 오늘따라 더 경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