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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천경자 1주기 추모전
천경자 1주기 추모전을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보았습니다.
1924년생이신 천경자 화백은 2015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떠나시기전에 서울시에 그의 작품들을 기중하였습니다.
또한 미국 Dream Work사의 애니매션에 대한 전시도 함께 하였습니다.
드림웍스의 작품중 쿵푸판다의 주인공인 판다의 캐랙터가 있습니다
쿵푸판다의 판다의 그림 스케치
드림웍스의 전시장 앞에서
드림웍스의 애니매션 특별전
만화캐럭터의 기린이 벽에 머리를 박고 있습니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입니다. 많은 작품이 있지만 사진을 못직게 하여 못 찍었습니다.
1924년 11월 11일에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출생했습니다. 이후 1944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공부한뒤 귀국해서 1955년 미술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화단에 존재를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후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 학과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수필가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부터 발표한 수필을 모아 1955년 첫 수필집 "여인소묘"를 출판하기도 했고 남태평양을 다니면서 경험한것을 자신의 데셍 삽화와 함께 출판한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를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동양화가 이면서도 대담하게 밝은 색채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에서 공부해서 지나치게 왜색물이 들었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습니다. 이런 그녀의 시대를 앞선 스타일은 그녀를 해방이후 한국 미술에서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꽃과 여성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는 점도 독특한 부분입니다.
여성들에게 보수적인 시대였음에도 상당히 개방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수십년전에 세계일주를 했을 정도이니. 또한 상당한 애연가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작품에도 담배가 자주 소재로 등장할 정도. 배우 윤여정은 천경자가 맞담배를 허용해줬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홍익대학교의 교수로 역임하였습니다. 1924년에서 2015년까지 91세로 소천하였습니다
1991년 일어난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창작활동은 파탄을 맞게 됩니다. 그녀 자신이 그린적이 없는 그림이라고 주장한데다가 그림의 이력 자체도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국립중앙미술관과 화랑협회등의 오만함에 질린 그녀는 결국 절필을 선언하고 자신의 작품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뒤 미국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위작범이 나타났음에도 국립중앙미술관과 화랑협회는 여전히 그녀를 정신이상자 취급하며 요지부동으로 일관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절필 선언을 한뒤 그녀의 작품 가격이 치솟아서 2013년 현재도 그녀의 작품은 미술 시장에서 가격이 가장 치솟은 작가로 꼽힙니다. 2003년에 호당 1000만원대이던 그녀의 작품은 2013년 현재는 호당 4000만원대를 호가한다는것입니다. 그녀가 절필선언을 하고 작품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고가는 계속 될거라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이런 탓에 그녀의 작품의 다른 위작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녀는 고향 고흥군에 2007년 드로잉과 판화 66점을 기증하고 고흥군은 이를 고흥군 종합문화회관내에 천경자 전시실을 설치해 전시했으나 고흥군의 무성의한 작품 보존행태에 분노한 그녀는 2010년 작품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작품에 손상을 가하는 할로겐 전구를 전시실 조명으로 쓰는가 하면 심지어는 청소용구를 보관하는 창고에 작품을 보관하는등의 행태를 듣고 분노한 그녀가 작품 반환을 요구하게 된것. 고흥군은 발뺌하다가 결국 2012년 3월에야 반환을 결정했지만 작품의 상태문제에 대해서 또다시 실갱이를 벌인끝에 12월에야 돌려주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백남준의 10주기 전시장이 있었습니다. 백남준, 白南準, Nam June Paik 은 1932년7월20일 출생하여 2006년1월29일에 소천하였습니다.
백남준 씨의 작품입니다. 그의 비디오 아트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한국 출신 현대예술가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예술가. 그리고 희대의 괴짜입니다.
그 특유의 파격적인 예술세계로 유명합니다. 지금은 볼프 보스텔과 더불어 비디오아트의 세계를 개척한 누구도 부정 못할 세계적인 예술가이지만, 비디오아트 이전 시절에는 전위예술 퍼포먼스 아티스트였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녔으며, 플렉서스 멤버로 퍼포먼스 예술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보이스 박스라는 백남준 비디오 아티스트의 작품입니다.
어렸을 적 백남준은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집에는 피아노나 전축은 물론 당시에 서울에 딱 두 대 밖에 없었던 캐딜락도 있었고, 해방 전에 유치원(애국유치원)에 다녔으며 6.25 전쟁의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파인애플을 먹을 정도의 부잣집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돈은 물 쓰듯 쓰는 거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조부 백윤수는 청나라 비단을 독점 판매했던 거부로, 종로 5가와 동대문 일대의 포목상 절반이 그의 것이었고, 국상 때 만조백관의 상복과 제복을 일체 도맡았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막강한 실력자였습니다. 후에 그는 직물, 대부업, 제약회사 등을 세웠고, 재산은한성은행 자본금의 3배에 달했습니다.
보이스 박스 (작품명)
백남준은 당시 상류층만 다니던 수송국민학교와 경기공립중학교를 다녔는데, 해방 전 그 시절에 학교에는 풀장과 영사기가 있어서, 당시 학부모였던 대한극장 사장이 학교에서 직접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경기중학교 음악교사로, 후에 이대 음대학장을 지냈던 신재덕에게피아노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으로 무기구입을 위해 홍콩으로 갔다는 설이 있는 부친 백낙승씨의 통역으로 따라가 홍콩의 로이덴 스쿨로 전학합니다. 백남준은 이때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게 됩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여권과 일본 비자가 있었던 백남준은 도쿄로 건너가 도쿄대학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을 당시 현대음악의 메카 독일 뮌헨대학으로 진학하여 철학 석사와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현대음악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독일에 있을 때쯤 존 케이지나 조지 마치우나스 등의 영향을 받아 행위예술을 접한 뒤, 행위예술가로 변신하게 됩니다.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선을 그리는 것도 사실 백남준이 했던 퍼포먼스입니다. 이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고,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면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백남준이 1964년 미국 뉴욕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었습니다. 무대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때려 부수거나 넥타이를 자르기도 했습니다. 1967년에 백남준이 누드인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공연하다가 샬롯이 경찰에 체포당해 논란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합니다. 그 결과 백남준은 미국 예술계에서 제대로 된 예술도 못하고 기행을 일삼는 사람, B급 예술가 정도로 치부되었습니다.
B급 예술가라는 것은, 당시의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언급일수도 있습니다. 당시 60년대에서 70년대에는 서서히 퍼포먼스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였고, 물론, 현대에는 현대미술하면 알수 없는 무용과 행위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이전 예술은 단순히 회화아니면 조각 정도로, 이루어지는 오브제 중심적인 예술이였습니다. 때문에, 당연히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오브제 없이 예술가의 행위 자체와 관람객이 느껴야하는 '경험' 위주의 예술은 매우 비주류라고 할 수 있으나, 개척기이자 태동기 였다. 예술의 범위가 확장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후에 퍼포먼스예술은 80년대 이후 대중예술에서도 독특한 무대연출(패션쇼, 콘서트, 오케스트라 등)로 발전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습니다. 제대로 된 무대연출을 할줄 아는 아티스트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것을 안다면, 퍼포먼스예술이 현대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것은 종합예술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죤레논의 부인 오노요꼬의 작품입니다 .
백남준이는 오노 요코 때문에 잠깐 존 레논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남준은 그 당시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요코는 존을 선택해 그와 결혼했고, 백남준은 꽤 충격 받았던 듯. 존 케이지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며 비디오 아트 예술가 이전에는 피아노 행위예술가로도 알려진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연주하다가 도끼로 피아노를 부숴버리던 짓도 곧잘 했었습니다.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작품
오노요꼬의 디스크 판입니다.
1933년 2월 18일 출생. 일본의 설치 미술가이자 행위예술가. 하지만, 비틀즈 팬들에게는 "동양에서 온 희대의 마녀"라고 낙인찍히는 인물입니다.
요코 오노 레논(Yoko Ono Lennon). 일본인으로서의 이름 한자 표기는 "小野洋子". 다만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オノ・ヨーコ로 표기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洋子라는 한자 이름은 존 레논이 비틀즈 시절 만든 곡 "Julia" 의 'Ocean Child' 라는 가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노 에이스케와 야스다 이소코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증조 할아버지는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발전한 반 도쿠가와 막부 운동에 참여한 자작이었다고 합니다. 부친은 황실 혈통의 전도유망한 은행가, 모친은 야스다 재벌을 일으킨 명문 권세가의 딸로 오노 요코는 황족과 귀족들의 학교인 가쿠슈인(學習院)을 졸업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고교 시절까지 일본에 잠시 살며 2차 대전을 경험하기도 했으나(1941~51) 원래는 샌프란시스코 태생입니다. 또한 대학 때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 뒤의 대부분의 삶을 미국에서 보내며 예술 활동을 했으므로 미국의 예술가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지만 동양인이라는 점 때문에 나름 생각이 많았던 듯 자신을 '오렌지도 귤도 아닌 자몽'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두번째 아내이기도 합니다. 결혼할 때 즈음 비틀즈의 불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비틀즈 해체의 원인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본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요코가 존이 비틀즈보다는 개인 위주의 활동을 하게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소호에서 전시회 선전 안내입니다.
1965년 자신과 같이 행위예술 작업을 했던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와 결혼했습니다. 구보타 시게코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에게 매료되어 자신의 남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결국 결혼. ]평생 구보타 시게코를 쳐다보지도 않았었다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다음 그녀가 지극으로 챙기면서 그나마 쳐다보기라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혼녀인 구보타 시게코가 자궁암으로 불임 진단을 받고 엄청난 수술비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백남준이 본인 명의의 의료보험 혜택을 활용하자며 먼저 청혼을 하고 결혼 후에도 구보타 시게코의 불임 진단과 의료보험과 관련해서는 주변 친구들에게 전혀 입밖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면, 백남준의 구보타 시게코에 대한 배려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으며, 구보타 시게코 역시 이런 백남준의 배려와 사랑에 사후에도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백남준과의 삶을 회고하는 책 "나의 사랑, 백남준"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양자격인 백남준의 사촌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갈등을 빚어서 이미지 하락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후 암 투병중이던 구보타 시게코는 2015년 7월 23일 작고했습니다.
이 역시 백남준 작품전을 소개하는 포스타
B급 예술가로 치부당하는 와중에도 백남준의 인지도는 꾸준히 쌓여가고 있었고, 기괴한 퍼포먼스를 하며 조금씩 시도했었던 비디오아트는 점점 백남준의 예술 세계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백남준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1974년부터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선보였으며, 영상이 공중파 TV에 방영되는 등 점점 유명해지고 예전과 다르게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결국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전시되었고, 뉴욕뿐만이 아닌 미국 예술계에 큰 인지도를 얻게 됩니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바쁘게 활동하였습니다. 19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조각과 교수로 있었는데, 뉴욕에서 작품활동 하느라 바빠서 학생들을 자주 보지 못해 미안해 했다고 합니다.
1984년 새해 벽두에 전세계 동시송출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풀 버전 영상.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의 다원생중계였습니다! 훗날 이 작업은 인공위성 예술의 대표적 사례로 불리게 됩니다.
한국 대중들에게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비로소 한국에 알려지게 됩니다. 사실상 한국은 백남준에 대해서 역수입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백남준이 일본에서 뉴욕에 가기까지는 한국에서도 무명이었고, 그가 악평을 들을 때도,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르기까지도 한국에서는 잘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백남준보고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실감이 안나기 마련입니다.
한국에서 백남준은 초기의 악동 행위예술가 같은 이미지는 거의 없고, 88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다다익선 같은 작품처럼 오로지 TV 여러 대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하는 데 많은 TV가 필요했는데, 초기엔 소니 제품을 쓰다가 어느 시점 이후로는 삼성전자의 협력을 받아 삼성 TV를 사용하였습니다.
백남준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는 첨단기술매체와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상상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당시 예술가들이 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매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를 배척하거나 파괴하는 작업을 선보인데 반해,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기 위해 전자회로 관련 기술도 직접 공부하고 슈야 아베 같은 기술자와 협력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작품 <etude 1>(1967-1968)을 만들기 위해 벨 연구소에서 포트란 언어로 코딩까지 시도했다고 합니다. 1967년에 말이다. 게다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남준은 저술이나 이론 작업도 꽤 많이 했습니다. '전자 고속도로'를 예견한다던지, '인포 아트'에 대해 논한다던지,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지금 읽어보면 당연하고 뻔하다 싶은 내용을 써놓은 경우가 많지만, 인터넷이 나오기도 전에 그런 예견을 한 사람은 당시 몇몇 매체이론가들 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백남준의 선견지명이 대단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백남준 비디오 아티스트의 작업실입니다.
이 때문에 사실상 비디오 아트 뿐 아니라 미디어아트를 논할때도 백남준을 빼놓고 말하는 것은 힘들 정도입니다. 실제로 미디어아트 관련 서적에 백남준은 적어도 한 절씩은 들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품목에 넣은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상 한국 미술이 백남준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외 예술 경향을 국내에 소개하거나, 휘트니 비엔날레의 경험을 살려 광주비엔날레 조직에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미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엇보다 아직 한국 현대 예술가 중에 백남준의 명성을 넘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보다 해외 예술계에서 뛰어난 네임밸류는 보이며, 국내외 근현대 미술사에서 빠질래야 빠질수 없는 플럭서스의 주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퍼포먼스 예술이건, 비디오 아트 개척 이후 이건, 공인된 위대한 예술가.
34년만에 찾은 법원은 서울시립 미술관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ㅎㅎ
덕수궁 돌담길...옛날에는 청춘남녀들의 데이트코스였습니다. 미국대사관 관저 옆 돌담길에 "장독대"라는 작품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3대의 사람들이 작게 만들어 졌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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