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저는 예순한 살,
회갑을 맞았습니다.
태어난 해의 간지가 6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는 해.
인생 한 바퀴를 돌아
이제 저는 인생 나이 두 살이 되었습니다.
두 살 아이가 처음 배우는 말이
"엄마", "아빠"이듯
새로 시작하는 제 인생의 첫 고백도 이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1. 엄마의 밥상을 차리는 남자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시던 날
아버지는 "이제부터 엄마의 밥상은 내가 차린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지켜 오신 지 어느새 25년.
하루 세 번, 사랑으로 차리는 밥상.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도 아버지 몫입니다.
저는 곁에서 뒷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정리하며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봅니다.
아버지께서 밥을 지으시는 동안
엄마는 사랑하는 화초들을 돌보십니다.
엄마의 손길로 쑥쑥 자라는 초록 친구들.
저는 엄마가 쑤어 주신 도토리묵 위에
H.L,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를 새겨 봅니다.
밥상 위에서 노는 5분.
그 짧은 시간에 마음이 가득 차오릅니다.
2. 용돈 대신, 함께 먹는 밥 한 끼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은 용돈을 받지 않고 도로 돌려주셨습니다.
"그 돈 대신 같이 밥 먹고 시간 보내면 좋겠다."
그렇게 지낸 세월이 벌써 15년.
아버지 연금으로도 충분하다 하시며
누구에게나 기꺼이 밥을 사 주시는 우리 부모님은
소문난 "밥사"이십니다.
20여 년 푸드표현예술치료를 알리며 전국을 다니는 틈틈이 뵈었던 부모님.
몸은 곁에 있어도 머릿속은 일 생각으로 바빴던 날들.
함께 있어도 온전히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이었지요.
이제는 부모님과의 시간을 온전히 1순위에 두려 합니다.
3. 꽃보다 더 고운 두 분
시월의 어느 토요일,
부모님을 모시고 용인 화훼시장으로 국화꽃을 사러 갔습니다.
호접란이 다 졌다며 칠천 원짜리 호접란을 하나 고르시고
만이천 원짜리 앞에서는 한참 망설이시다 내려놓으시는 엄마.
제가 계산하겠다 해도 오늘만큼은
당신 용돈을 꽃 사는 데 아낌없이 쓰십니다.
장바구니는 금세 엄마의 꽃들로 가득 차고
제 작은 차 안은 꽃향기로 가득했습니다.
아름다운 꽃들 사이에서도
두 분이 꽃보다 더 아름다우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엄마의 새 친구들을 함께 심었습니다.
엄마의 마음은 행복으로 차오르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그저 기분이 좋으시고
두 분을 바라보는 저는 더불어 행복해집니다.
점심을 맛있게 비운 접시 위에는
기분 좋은 미소 하나를 남겨 두고 왔습니다.
접시는 비었는데 마음은 가득 찬, 텅 빈 충만함.
4. 강릉 바다에서 보낸 회갑여행
50년 넘게 사신 강릉을 떠나
4년 전 큰딸 곁 천안으로 오신 두 분.
강릉을 그리워하시는 마음을 알기에
제 회갑여행은 부모님을 모시고 추억이 깃든 강릉으로 떠났습니다.
경포 바닷물에 첨벙 발을 담그고
하루 종일 정원에서 볕에 그을린 엄마 발과 제 발을
나란히 놓고 웃었습니다.
엄마는 이 여행을 두고 한마디 하셨지요.
"세상에나, 정말 감개가 무량하다."
아쿠아리움에서 물고기에게 내민 아버지의 손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열다섯 살에 부모 곁을 떠나 동생을 돌보고 누나를 챙기던 손.
산간 오지 학교에서 교장실까지
50년 가까이 아이들을 가르쳐 온 손.
그리고 지금은 25년째 엄마의 밥상을 차리는 손.
제 인생의 태산 같은 힘,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가 "장군님"이라 별명을 붙여 주신 우리 엄마.
펭귄 인형을 안고 웃으실 때는 영락없는 소녀이십니다.
우리, 닮았지요?
붕어빵 모녀.
63년을 사랑으로, 때로는 큰 소리도 내며 함께해 오신 천생연분.
엄마는 아버지 덕분에, 아버지는 엄마 덕분에 건강하십니다.
5. 아버지와 전혀 닮지 않은 사람, 라파엘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 때
저는 아버지와 전혀 닮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라파엘이었을까요?
부모님이 강릉에 계실 때 라파엘과 저는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아뵈었습니다.
둘 다 프리랜서였기에
부모님과의 시간을 중심에 두고 일정을 짰지요.
그 마음을 기꺼이 함께 나눠 준 사람이 라파엘입니다.
짝꿍 라파엘, 고마워요. 고맙고 또 고마워요.
설 연휴, 엄마가 갑자기
대상포진에 걸리셨을 때
라파엘과 나란히 앉아 전을 부쳤습니다.
사랑을 담은 녹두전, 건강을 담은 동태전.
"엄마가 안 계시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을
고소한 냄새와 웃음 속에 함께 녹였습니다.
6. 빈 접시에 피어난 나무 한 그루
열흘간 전시장을 지킨 뒤
라파엘과 부부나들이 피정을 떠났습니다.
4년 전 신청했다가 코로나로 취소되어 잊고 있던 피정이었지요.
점심을 먹고 난 빈 접시에서
라파엘이 문득 나무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그 접시 위에 푸놀치 마음여행을 했습니다.
제가 걸어온 밥상 위의 놀이를
이제는 라파엘도 함께 놀아 줍니다.
토요일 밤 아홉 시 반,
부부가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에
저는 라파엘에게 고마움을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교통사고 뒤 누워서 잠자고 기도만 하던 5년 동안
그토록 알고 싶었던 답을
그 피정에서 몸으로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그 시간 내내 곁에 있던 사람, 라파엘.
아침 여섯 시 사십 분, 함께하는 성체조배.
먼 독일 뒤셀도르프에 있을 때도
전화로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다 잠들던 밤.
제 기도의 자리에는 늘 라파엘이 함께 있습니다.
7. 우리 더 건강합시다, 더 많이 사랑합시다
라파엘의 64번째 생일, 초 하나를 켜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 더 건강합시다.
더 많이 사랑합시다.
나이는 숫자로,
씩씩하게 활기차게 살아갑시다.
맺으며
오빠도, 동생도, 저도
아직은 부모님과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삼 남매는 번갈아 가며 두 분 곁을 지킵니다.
91세 부모님이 지금처럼 건강하게 곁에 계셔 주시는 것,
짝꿍 라파엘이 그 곁을 함께 지켜 주는 것.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요?
가뭄에 메마른 땅을 적시는 은총의 비처럼
저도 받은 사랑만큼 누군가에게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라파엘.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오늘, 고마운 그 사람에게 마음을 한번 전해 보세요.
댓글로 나눠 주시면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치유산타 김지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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