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문화유산 돈암서원과 사계 김장생(27세)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의 학덕을 기릭위해 설립한 서원이다.
선생이 태어난 16세기 ~ 17세기 사이의 조선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연산조의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와
중종때의 기묘사화(1545)와 을사사화(1545) 등이 계속 이어졌다.
동서(東西)의 분당과 남북(南北)의 분파가 대립하고,
인조반정(1623)과 이괄의 란(1624)이 줄을 이어 터졌다.
일본의 침입전쟁 임진왜란(1593)과 정유재란(1597)과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의 외세의 침입이 있었다.
혼미한 어지러운 세상이 되니
민심이 흉흉해져서 윤리와 도덕은 해이 해지고,
정치,경제, 문화 등 사회가 불신과 혼란의 상태에 이르던 시기였다.
참혹한 전쟁과 죽기 살기식의 당쟁으로 피페해진 사회 질서를
예(禮)로서 바로 잡기 위해
사계 선생은 예학을 집 대성하여 왕실과 사회에 보급하였다.
돈암서원은 조선 예학의 산실이 되었고,
선생은 조선 후기 유학자로 기호학파 대표인물이 되었다.
사계 선생의 예론(禮論)은
“모든 인간은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도와 가며
함께 살아 갈 수 있도록,
개인의 행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예”라고 생각하였다.
1634년에 서원이 설립되고,
1660년 현종으로부터 사액을
(賜額:왕이 서원 이름을 써서 편액을 내림.)받음.
1993년 사적 제383호로 지적.
2008년 응도당은 보물 제1569호 지정.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한국 서원 9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등재.
(사액서원은 나라의 지원으로 서적과 토지와 노비를 받는다.)
제향인물(사당에 모신분)
사 계 김장생. 신독재 김 집(김장생의 아들)
동춘당 송준길. 우 암 송시영(두분은 부자분의 제자)
(소재지: 충남 논산군 연산면 임3길)
소수서원. 경북 영주
. 1543년 설립. 1550년 명종임금 사액. 모신이: 회헌 안유
남계서원 경남 함양
1552년 설립. 1566년 명종임금 사액. 모신이: 일두 정여창.
옥산서원 경북 경주
1572년 설립. 1573년 선조임금 사액. 회재 이언적.
도산서원 경북 안동
1574년 설립. 1575년 선조임금 사액. 퇴계 이황.
필암서원 전남 장성
1590년 설립. 1659년 효종임금 사액. 하서 김인후.
도동서원 경북 달성
1604년 설립. 1607년 선조임금 사액. 환헌 김굉필.
병산서원 경북 안동
1613년 설립. 1863년 철종임금 사액. 서애 류성용.
무성서원 전남 정읍
1615년 설립. 1696년 숙종임금 사액. 고운 최치원.
편집: 대구 경북 종친회. 전 부회장 선국.
◉돈 암 서 원
돈암서원은 사계(사계) 김장생(金長生)선생을 정점으로 한
기호(畿湖)학의 거유(巨儒)들의 본산이다.
우리나라는 수 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많은 현유(賢儒)가운데
18명이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얻었으니, 그중
부자(夫子)가 함께 배향된 예는 오로지 사계선생과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뿐이다.
광산김씨가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거목(巨木)이요,
명문이 되었음도 바로 두 선생이 계셨기때문이다.
이들 부자가 연산(連山)의 돈암서원을 수학(修學)의 본거지로 삼았고,
또한 대유 송준길, 송시열에 이어 강석기 ,장유 ,정홍명, 최명길, 김유 등
수 많은 학자가 돈암학당에서 사계의 학통을 이었으니
돈암은 가히 명현의 산실인 셈이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12) 선생 사후 3년만에 문인들이
사우를 세워 제향을 봉행 하였고 1660년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후 사계선생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그의 아들 김집, 문인, 송준길, 송시열 등 네분을 배향하고 있다.
서원 내에는 조선조 중엽의 건축 양식인
양성당(養性堂), 응도당(凝道堂) 그리고 정회당(靜會堂),
장판각(藏板閣), 전사청(典祀廳), 본전사우(本殿祠宇) 등
여러채의 건물이 서원비(書院碑)와 함께 정연히 배치되어있다.
현재의 응도당은 원래 양성당이라 한다.
글자 그대로 심성을 양성한다는 뜻일 것이며 양성당은
사계 선생이 학문을 연마하던 도장으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운집,
선생의 강론을 들었고
선생은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며 후학을 가르쳤다.
바로 옆 장판각에는 선생과 아들 집의 귀중한
전서판본(前書板本) 2천 1백여권이 보존 되어 있다.
예학의 태두로 불리는 김장생은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춘
난세의 철학자요, 나라의 훌륭한 스승님이었다.
성리학의 대가인 이이(李珥)선생에게서 사사받고
송익필 선생에게서 예학을 깨우쳐 두 선생의 적전으로
당내 예학과 도학의 종장역을 다 하였다.
1548년(명종․3) 7월 8일
지금의 서울 대법원 뜰에 해당하는 정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선생이 태어난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사이의
조선은 혼미를 거듭하던 시기다.
연산조의 무오(1498), 갑자(1504)와 중종때의 기묘(1545)사화,
을사(1545)사화 등이 있따랐다.
사림士林들이 혹독한 참벌의 화가 지나자 명종 말기로부터
부형(父兄) 사우(師友)들 사이에 예법을 논하고
도의를 부르짖는 소리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동서(東西)의 분당과 남북(南北)의 분파가 대립,
인조반정(1623) 이괄의 란(1624)이 줄을 이어 터졌다.
밖으로는 임진왜란(1593)과 정유재란(1597)과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에 물론 민심이 흉흉해지고, 윤리와 도덕마저 해이하여
정치경제 문화 사회가 불신과 혼란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를 몸소 체험한 사계선생은
고매한 성리학의 형이상학을 현실에 실천하여 민심을 바로잡아
왕도(王道)를 행하고 유속을 교정하기 위하여 시비(是非)의 준칙을
구명(究明)하는 예론을 진전 시켜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고 국민화합에 크게 공헌하였다.
선생은 예학을 집대성, 그의 아들 집과 제자 송시열 등에
전수시킴으로서 조선 유학사에 빛나는 거성을 몸소 길러냈다.
특히 예학의 태두로 당시 조정에서도 모든 예법을
선생의 지론을 따라 거행하였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란 말도 선생으로 인한 말이라 하겠다.
선생의 신비도에 의하면「율곡을 스승으로 섬겨
도(道)의 중함을 배워 익히니 율곡이 심히 소중히 여겨
사석에서도 자주 데리고 다녔다.
자세가 항상 바르고 조심스러워 실수 하는 법이 없었다.」하였다.
우암이 쓴 행장에는 또 그가
스승을 얼마나 받들었는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우(師友)사이에는 은의(恩義)가 겸비하여 송구봉의 온 가문이
화를 만나 궁박하여 도라 갈 곳이 없게되자
선생은 마음을 다해 주선하여 집에 모시고 봉양하여
평생을 바치게 하였고
인조가 즉위하매 선생이 동문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그의 원굴함을 하소연 하였으며
그의 고하 대하기를 동기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율곡 선생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는 것과 같이 하였으니
이로부터 사우의 의리가 다시 밝아졌다」 하였다.
돈암서원 제공
편집: 대구 경북 종친회. 전 부회장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