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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 원문독파과정 書經서경
제32강 周公이 武王을 위해 기원하다.
周書(주서)
金縢(금등) 1장~2장
旣克商二年 王有疾 弗豫 二公曰 我其爲王 穆卜
기극상이년 왕유질 불예 이공왈 아기위왕 목복
金縢(금등) 4-1장
周公曰 未可以戚我先王 公 乃自以爲功 爲三壇 同墠
주공왈 미가이척아선왕 공 내자이위공 위삼단 동선
金縢(금등) 4-2장
爲壇於南方 北面 周公立焉 植璧秉珪 乃告大王王季文王
위단어남방 북면 주공입언 치벽병규 내고대왕왕계문왕
金縢(금등) 5장
史 乃冊祝 曰 惟爾元孫某 遘厲虐疾 若爾三王 是有丕子之責于天 以旦 代某之身
사 내책축 왈 유이원손모 구려학질 약이삼왕 시유비자지책우천 이단 대모지신
金縢(금등) 6장
予仁若考 能多材多藝 能事鬼神 乃元孫 不若旦 多材多藝 不能事鬼神
여인약고 능다재다예 능사귀신 내원손 불약단 다재다예 불능사귀신
金縢(금등) 8장
今我 卽命于元龜 爾之許我 我其以璧與珪 歸俟爾命 爾不許我 我乃屛璧與珪
금아 즉명우원귀 이지허아 아기이벽여규 귀사이명 이불허아 아내병벽여규
金縢(금등) 9장
乃卜三龜 一習吉 啓籥見書 乃幷是吉
내복삼귀 일습길 계약견서 내병시길
金縢(금등) 11장
公歸 乃納冊于金縢之匱中 王 翼日乃瘳
공귀 내납책우금등지궤중 왕 익일내추
金縢(금등) 12장
武王 旣喪 管叔 及其羣弟 乃流言於國曰 公將不利於孺子
무왕 기상 관숙 급기군제 내유언어국왈 공장불리어유자
金縢(금등) 13장
周公 乃告二公曰 我之弗辟 我無以告我先王
주공 내고이공왈 아지불피 아무이고아선왕
金縢(금등) 14장
周公 居東二年 則罪人 斯得
주공 거동이년 즉죄인 사득
金縢(금등) 15장
于後 公 乃爲詩 以貽王 名之曰 鴟鴞 王亦未敢誚公
우후 공 내위시 이이왕 명지왈 치효 왕역미감초공
金縢(금등) 16장
秋大熟 未穫 天 大雷電以風 禾盡偃 大木 斯拔 邦人 大恐
추대숙 미확 천 대뢰전이풍 화진언 대목 사발 방인 대공
王 與大夫盡弁 以啓金縢之書 乃得周公所自以爲功 代武王之說
왕 여대부진변 이계금등지서 내득주공소자이위공 대무왕지설
金縢(금등) 17장
二公及王 乃問諸史與百執事 對曰 信 噫 公命 我勿敢言
이공급왕 내문제사여백집사 대왈 신 희 공명 아물감언
[ 휴넷 인문학당 원문독파 과정 書經 교재 번역 참조 ]
※ 휴넷교재 번역과 書經集傳 번역 내용이 거의 비슷하므로 생략함.
金縢
武王有疾하시니 周公以王室未安하고 殷民未服하여 根本易搖라 故로 請命三王하여 欲以身代武王之死어시늘 史錄其冊祝之文하고 幷敍其事之始末하여 合爲一篇이라 以其藏於金縢之匱일새 編書者因以金縢名篇하니 今文古文皆有하니라
○ 唐孔氏曰 發首로 至王季文王은 史敍將告神之事也요 史乃冊祝으로 至屛璧與珪는 記告神之辭也요 自乃卜으로 至乃瘳는 記卜吉及王病瘳之事也요 自武王旣喪已下는 記周公流言居東及成王迎歸之事也라
무왕(武王)이 질병이 있자, 주공(周公)은 왕실(王室)이 아직 편안하지 못하고 은(殷)나라 백성들이 복종하지 아니하여 근본이 흔들리기 쉽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세 왕(王)에게 명(命)을 청하여 자신으로써 무왕(武王)의 죽음을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사관(史官)이 그 책축(冊祝)의 글을 기록하고 아울러 그 일의 시말(始末)을 서술하여 합하여 한 편(篇)을 만들었다. 금등(金縢)[쇠사슬로 묶어 봉함함]한 궤에 보관하였기 때문에 책을 엮는 자가 인하여 금등(金縢)이라고 편(篇)을 이름한 것이니,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 당(唐)나라 공씨(孔氏)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부터 왕계(王季)와 문왕(文王)에 이르기까지는 사관(史官)이 장차 신(神)에게 고하려는 일을 서술한 것이며, ‘사내책축(史乃冊祝)’으로부터 ‘병벽여규(屛璧與珪)’까지는 신(神)에게 고한 말을 기록한 것이며, ‘내복(乃卜)’으로부터 ‘내추(乃퀁)’까지는 점괘의 길함과 무왕(武王)의 병이 쾌유된 일을 기록한 것이며, ‘무왕기상(武王旣喪)’으로부터 이하는 주공(周公)이 유언(流言) 때문에 동쪽에 거하다가 성왕(成王)이 맞이해 돌아온 일을 기록한 것이다.”
1. 旣克商二年에 王有疾하사 弗豫하시다
상(商)나라를 이긴 지 2연(年)에 왕(王)이 병이 있어 즐겁지 못하였다.
記年은 見其克商之未久也라 弗豫는 不悅豫也라
연수(年數)를 기록한 것은 상(商)나라를 이긴 지가 오래지 않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불예(弗豫)는 열예(悅豫)하지 못한 것이다.
2. 二公曰 我其爲王하여 穆卜하리라
두 공(公)『[태공(太公)과 소공(召公)]』이 말하였다. “내 왕(王)을 위하여 목복(穆卜)을 하겠다.”
二公은 太公召公也라 李氏曰 穆者는 敬而有和意니 穆卜은 猶言共(恭)卜也라 愚謂 古者에 國有大事하여 卜이면 則公卿百執事皆在하여 誠一而和同하여 以聽卜筮라 故로 名其卜曰穆卜이니 下文에 成王이 因風雷之變하여 王與大夫盡弁하고 啓金縢之書以卜者 是也라 先儒專以穆爲敬이라하니 而於所謂其勿穆卜에 則義不通矣라
두 공(公)은 태공(太公)과 소공(召公)이다. 이씨(李氏)가 말하기를 “목(穆)은 공경하고 화한 뜻이 있으니, 목복(穆卜)은 공복(恭卜)이란 말과 같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옛날에 국가(國家)에 대사(大事)가 있어 점을 치게 되면 공경(公卿)과 백집사(百執事)가 모두 그 자리에 있어 성일(誠一)하고 화동(和同)하여 복서(卜筮)의 명령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 점(占)을 이름하여 목복(穆卜)이라 한 것이니, 하문(下文)에 성왕(成王)이 풍뢰(風雷)의 변고로 인하여 왕(王)과 대부(大夫)가 모두 관(冠)을 쓰고 금등(金縢)을 열어 글을 보고서 점친 것이 이것이다. 선유(先儒)는 오직 목(穆)을 경(敬)이라 하였으니, 이른바 ‘목복(穆卜)하지 말라’는 뜻에 통하지 않는다.
3. 周公曰 未可以戚我先王이라하시고
주공(周公)이 말씀하기를 “우리 선왕(先王)을 근심하게 할 수 없다.” 하시고,
戚은 憂惱之意라 未可以武王之疾而憂惱我先王也니 蓋卻二公之卜이라
척(戚)은 근심하고 번뇌하는 뜻이다. 무왕(武王)의 병 때문에 우리 선왕(先王)을 근심하고 번뇌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니, 두 공(公)의 점(占)을 물리친 것이다.
4. 公이 乃自以爲功하사 爲三壇호되 同墠하고 爲壇於南方호되 北面하고 周公立焉하사 植(置)璧秉珪하사 乃告太王王季文王하시다
주공(周公)이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으시어 세 단(壇)을 만들되 터를 똑같이 하고, 〈세 단(壇)의〉 남방(南方)에 단(壇)을 만들되 북향(北向)을 하고 주공(周公)이 여기에 서시어 벽(璧)을 놓고 규(珪)를 잡고는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에게 고유(告由)하였다.
功은 事也라 築土曰壇이요 除地曰墠이라 三壇은 三王之位니 皆南向하고 三壇之南에 別爲一壇호되 北向하니 周公所立之地也라 植는 置也라 圭璧은 所以禮神이니 詩言圭璧旣卒이라하고 周禮에 祼圭以祀先王이라하니라 周公이 卻二公之卜하고 而乃自以爲功者는 蓋二公은 不過卜武王之安否爾니 而周公愛兄之切하고 危國之至하여 忠誠懇懇於祖父之前하여 如下文所云者를 有不得盡焉하니 此其所以自以爲功也라 又二公穆卜이면 則必禱於宗廟하여 用朝廷卜筮之禮하리니 如此則上下喧騰하여 而人心搖動이라 故로 周公이 不於宗廟하고 而特爲壇墠以自禱也라
공(功)은 일이다. 흙을 쌓음을 단(壇)이라 하고 땅을 깨끗이 닦아 놓은 것을 선(?)이라 한다. 세 단(壇)은 세 왕(王)의 자리이니 모두 남향(南向)을 하고, 세 단(壇)의 남쪽에 별도로 한 단(壇)을 만들되 북향(北向)을 하였으니, 주공(周公)이 설 자리이다. 치(植)는 둠이다. 규벽(圭璧)은 신(神)을 예우(禮遇)하는 물건이니, 《시경(詩經)》에 “규벽(圭璧)을 이미 다하였다.” 하였고, 《주례(周禮)》에 “규(圭)로 강신(降神)하여 선왕(先王)에게 제사한다.” 하였다. 주공(周公)이 두 공(公)의 점을 물리치고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은 것은 두 공(公)이 무왕(武王)의 안부를 점침에 불과하니, 주공(周公)이 형(兄)을 사랑함이 간절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여김이 지극하여, 조(祖)•부(父)의 앞에 충성스럽고 간절하여 하문(下文)에 말한 바와 같은 것을 다할 수 없음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은 것이다. 또 두 공(公)이 목복(穆卜)을 하게 되면 반드시 종묘(宗廟)에 기도(祈禱)하여 조정(朝廷)에서 복서(卜筮)하는 예(禮)를 사용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상하(上下)가 떠들어서 인심(人心)이 동요된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 종묘(宗廟)에서 하지 않고 특별히 단(壇)과 선(墠)을 만들어 스스로 기도한 것이다.
5. 史乃冊祝曰 惟爾元孫某 遘厲虐疾하니 若爾三王은 是有丕子之責于天하시니 以旦으로 代某之身하소서
태사(太史)가 다음과 같이 책축(冊祝)[책(冊)에 축문(祝文)을 씀]을 하였다. “당신의 원손(元孫) 아무가 모질고 급한 병을 만났으니, 당신 세 왕(王)은 비자(丕子)[원자(元子)]의 책임이 하늘에 있으니, 저로써 아무의 몸을 대신하소서.
史는 太史也라 冊祝은 如今祝版之類라 元孫某는 武王也라 遘는 遇요 厲는 惡이요 虐은 暴也라 丕子는 元子也라 旦은 周公名也라 言武王遇惡暴之疾하니 若爾三王은 是有元子之責于天이라 蓋武王이 爲天元子하니 三王이 當任其保護之責于天이니 不可令其死也요 如欲其死인댄 則請以旦代武王之身이라 于天之下에 疑有缺文이라 舊說에 謂天責取武王者는 非是라 詳下文予仁若考, 能事鬼神等語하면 皆主祖父人鬼爲言이요 至於乃命帝庭, 無墜天之降寶命하여는 則言天命武王이 如此之大하시니 而三王이 不可墜天之寶命이니 文意可見이라 又按 死生有命이어늘 周公이 乃欲以身으로 代武王之死하시니 或者疑之라 蓋方是時하여 天下未安하고 王業未固하니 使武王死면 則宗社傾危하고 生民塗炭하여 變故를 有不可勝言者라 周公이 忠誠切至하사 欲代其死하여 以紓危急하여 其精神感動故로 卒得命於三王이라 今世之匹夫匹婦도 一念誠孝하면 猶足以感格鬼神하여 顯有應驗이어든 而況於周公之元聖乎아 是固不可謂無此理也니라
사(史)는 태사(太史)이다. 책축(冊祝)은 지금의 축판(祝版)과 같은 따위이다. 원손모(元孫某)는 무왕(武王)이다. 구(遘)는 만남이요, 여(厲)는 모짊이요, 학(虐)은 사나움[급함]이다. 비자(丕子)는 원자(元子)이다. 단(旦)은 주공(周公)의 이름이다. 무왕(武王)이 모질고 급한 병을 만났으니, 당신 세 왕(王)은 원자(元子)의 책임이 하늘에 있다. 무왕(武王)이 하늘의 원자(元子)가 되었으니, 세 왕(王)은 마땅히 그 보호할 책임을 하늘에게서 맡았으니 죽게 해서는 안되며, 만일 죽게 하고자 할진댄 자신으로써 무왕(武王)의 몸을 대신할 것을 청한 것이다. ‘우천(于天)’의 아래에 의심컨대 빠진 글이 있는 듯하다. 구설(舊說)에 “하늘이 무왕(武王)을 데려간다.”고 한 것은 옳지 않다. 하문(下文)에 “나는 아버지에게 어질어 순하며 귀신을 섬길 수 있다.”는 등의 말을 살펴보면 모두 조(祖)•부(父)의 인귀(人鬼)를 주장하여 말한 것이며, “상제(上帝)의 뜰에서 명하였다.” 하고, “하늘의 보배로운 명(命)을 내림을 실추(失墜)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늘이 무왕(武王)을 명함이 이와 같이 크시니, 세 왕(王)이 하늘의 보배로운 명을 실추(失墜)해서는 안됨을 말한 것이니, 글 뜻을 볼 수 있다.
또 살펴보건대 죽고 삶은 천명(天命)에 있는데 주공(周公)이 자신으로 무왕(武王)의 죽음을 대신하고자 하였으니, 혹자는 이를 의심한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天下)가 아직 편안하지 못하고 왕업(王業)이 견고하지 못하니, 만일 무왕(武王)이 죽으면 종사(宗社)가 기울고 위태로우며, 생민(生民)이 도탄에 빠져 그 변고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주공(周公)은 충성(忠誠)이 간절하고 지극하여 그 죽음을 대신하여 위급함을 풀고자 해서 그 정신이 감동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삼왕(三王)에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지금 세상에 필부(匹夫)•필부(匹婦)들도 한[온] 생각이 정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면 오히려 귀신을 감동시켜 드러나게 응험이 있는데, 하물며 주공(周公)의 원성(元聖)에 있어서랴. 이는 진실로 이러한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6. 予仁若考라 能多材多藝하여 能事鬼神이어니와 乃元孫은 不若旦의 多材多藝하여 不能事鬼神하리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어질어 순해서 재예(材藝)가 많아 귀신을 섬길 수 있으나 원손(元孫)은 나처럼 재예(材藝)가 많이 못하여 귀신을 잘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周公言 我仁順祖考라 多材幹하고 多藝能하여 可任役使하여 能事鬼神이어니와 武王은 不如旦의 多材多藝하여 不任役使하여 不能事鬼神이라 材藝는 但指服事役使而言이라
주공(周公)이 말씀하기를 “나는 조고(祖考)에게 인순(仁順)해서 재간(材幹)이 많고 기예(技藝)가 많아 역사(役使)를 맡길 만하여 귀신을 섬길 수 있으나 무왕(武王)은 나처럼 재예(材藝)가 많지 못하여 역사(役使)를 맡기지 못하여 귀신을 섬길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재예(材藝)는 단지 일하고 사역(使役)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7. 乃命于帝庭하사 敷佑四方하사 用能定爾子孫于下地하신대 四方之民이 罔不祗畏하나니 嗚呼라 無墜天之降寶命이라사(하시사) 我先王도 亦永有依歸하시리이다
상제(上帝)의 뜰에서 명(命)하여 펴서 사방(四方)을 도와 너희 자손들을 하지(下地)에 안정하게 하여 사방(四方)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게 하니, 아! 하늘이 내린 보배로운 명을 실추하지 마셔야 우리 선왕(先王)들도 또한 길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있으실 것입니다.
言武王이 乃受命於上帝之庭하여 布文德하여 以佑助四方하사 用能定爾子孫於下地하여 使四方之民으로 無不敬畏하니 其任大하고 其責重하여 未可以死라 故로 又歎息申言호되 三王은 不可墜失天降之寶命이니 庶先王之祀도 亦永有所賴以存也라 寶命은 卽帝庭之命也니 謂之寶者는 重其事也라
무왕(武王)이 상제(上帝)의 뜰에서 명을 받아 문덕(文德)을 펴 사방(四方)을 도와 너희 자손들을 하지(下地)에 안정시켜 사방(四方)의 백성으로 하여금 경외(敬畏)하지 않음이 없게 하니, 임무가 크고 책임이 무거워 죽을 수 없다. 그러므로 탄식하고 거듭 말씀하기를 “세 왕(王)은 하늘이 내린 보배로운 명(命)을 실추(失墜)하지 말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거의 선왕(先王)의 제사(祭祀)도 길이 의뢰하여 보존될 바가 있다.”고 한 것이다. 보명(寶命)은 곧 상제(上帝)의 뜰에서 내린 명이니, 보(寶)라고 이른 것은 그 일을 중히 여긴 것이다.
8. 今我卽命于元龜호리니 爾之許我인댄 我其以璧與珪로 歸俟爾命이어니와 爾不許我인댄 我乃屛璧與珪호리라
지금 나는 원귀(元龜)가 명(命)한 것을 나아가 살펴볼 것이니, 당신이 나의 말을 허락한다면 나는 벽(璧)과 규(珪)를 가지고 돌아가 당신의 명(命)을 기다리겠지만 당신이 나의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벽(璧)과 규(珪)를 감출 것입니다.”
卽은 就也라 歸俟爾命은 俟武王之安也라 屛은 藏也니 屛璧與珪는 言不得事神也라 蓋武王喪이면 則周之基業必墜하리니 雖欲事神이나 不可得也라 其稱爾稱我하여 無異人子之在膝下하여 以語其親者하니 此亦終身慕父母와 與不死其親之意니 以見公之達孝也라
즉(卽)은 나아감이다. 돌아가 당신의 명(命)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왕(武王)이 편안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병(屛)은 감춤이니, 벽(璧)과 규(珪)를 감춘다는 것은 신(神)을 섬길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무왕(武王)이 죽으면 주(周)나라의 기업(基業)이 반드시 실추될 것이니, 비록 신(神)을 섬기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爾)라 칭하고 아(我)라 칭하여 인자(人子)가 슬하(膝下)에 있으면서 그 어버이에게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이 또한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함과 그 어버이를 죽었다고 여기지 않는 뜻이니, 주공(周公)의 달효(達孝)[누구나 공통적으로 칭찬하는 효도]를 볼 수 있다.
9. 乃卜三龜하니 一習吉이어늘 啓籥(鑰)見書하니 乃幷是吉하더라
세 거북을 점치니, 한결같이 길(吉)함이 거듭하므로 열쇠를 열어 점친 글을 보니, 모두 길하였다.
卜筮는 必立三人하여 以相參考하니 三龜者는 三人所卜之龜也라 習은 重也니 謂三龜之兆一同이라 開籥하여 見卜兆之書하니 乃幷是吉이라
복서(卜筮)는 반드시 세 사람을 세워 서로 참고하니, 세 거북이란 세 사람이 점친 바의 거북이다. 습(習)은 거듭이니, 세 거북의 조짐이 똑같음을 이른다. 열쇠를 열어 복조(卜兆)의 글을 보니, 모두 길(吉)하였다.
10. 公曰 體는 王其罔害로소니 予小子新命于三王하여(이란대) 惟永終을 是圖호리니 玆攸俟니 能念予一人이삿다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점(占)의 체(體)는 왕(王)이 해(害)가 없을 것이니, 나 소자(小子)가 새로 세 왕(王)에게 명(命)을 받아 영원히 마침을 도모할 것이다. 이 기다리던 것이니, 여일인(予一人)[무왕(武王)]을 생각해 주셨다.”
體는 兆之體也라 言視其卜兆之吉하니 王疾이 其無所害하니 我新受三王之命하여 而永終을 是圖矣라 玆攸俟者는 卽上文所謂歸俟也라 一人은 武王也니 言三王이 能念我武王하여 使之安也라 詳此言新命于三王하고 不言新命于天하면 以見果非謂天責取武王也라
체(體)는 복조(卜兆)의 체이다. 복조(卜兆)의 길(吉)함을 보니, 왕(王)의 질병이 해가 없을 것이니, 내가 세 왕(王)의 명(命)을 새로 받아 영원히 마침을 도모한다고 한 것이다. 자유사(玆攸俟)는 곧 상문(上文)에 이른바 ‘돌아가 기다린다’는 것이다. 일인(一人)은 무왕(武王)이니, 세 왕(王)이 우리 무왕(武王)을 생각하여 편안하게 함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세 왕(王)에게 새로 명(命)을 받았다고 말하고, 하늘에게 새로 명(命)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과연 하늘이 무왕(武王)을 데려 가려고 함을 말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11. 公歸하사 乃納冊于金縢之匱中하시니 王이 翼(翌)日에 乃瘳하시다
주공(周公)이 돌아가 축책(祝冊)을 금등(金縢)의 궤 안에 넣으시니, 왕(王)이 다음날에 병이 나으셨다.
冊은 祝冊也라 匱는 藏卜書之匱요 金縢은 以金緘之也라 翼日은 公歸之明日也라 瘳는 愈也라 按金縢之匱는 乃周家藏卜筮書之物이니 每卜則以告神之辭로 書於冊하고 旣卜則納冊於匱而藏之하니 前後卜이 皆如此라 故로 前周公이 乃卜三龜하니 一習吉이어늘 啓籥見書者는 啓此匱也요 後成王이 遇風雷之變하여 欲卜하여 啓金縢者도 亦啓此匱也라 蓋卜筮之物은 先王不敢褻이라 故로 金縢其匱而藏之요 非周公始爲此匱하여 藏此冊祝하여 爲後來自解計也라
책(冊)은 축책(祝冊)이다. 궤(匱)는 복서(卜書)를 보관해 두는 궤이고, 금등(金縢)은 쇠사슬로 묶은 것이다. 익일(翼日)은 공(公)이 돌아간 다음날이다. 추(瘳)는 나음이다. 살펴보건대 금등(金縢)의 궤는 바로 주(周)나라 왕가(王家)에서 복서서(卜筮書)를 보관해두는 물건이니, 언제나 점을 치면 신(神)에게 고한 말을 책(冊)에 쓰고, 점이 끝나면 책(冊)을 궤에 넣어 보관하였으니, 전후(前後)에 점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전에 주공(周公)이 세 거북을 점치니 한결같이 거듭 길(吉)하므로 열쇠를 열어 글을 보았다는 것도 이 궤를 연 것이며, 뒤에 성왕(成王)이 풍뢰(風雷)의 변고를 만나 점을 치려고 하여 금등(金縢)을 연 것도 또한 이 궤를 연 것이다. 복서(卜筮)하는 물건은 선왕(先王)이 감히 함부로 하지 않으므로 그 궤를 쇠사슬로 묶어 보관한 것이며, 주공(周公)이 처음으로 이 궤를 만들어 이 책축(冊祝)을 보관해서 후래(後來)에 자신을 해명할 계책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12. 武王이 旣喪이어시늘 管叔이 及其群弟로 乃流言於國曰 公將不利於孺子하리라
무왕(武王)이 별세하시자, 관숙(管叔)은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라에 유언(流言)을 퍼뜨리기를 “공(公)이 장차 유자(孺子)[성왕(成王)]에게 이롭지 못하다.” 하였다.
管叔은 名鮮이니 武王弟요 周公兄也라 群弟는 蔡叔度, 霍叔處也라 流言은 無根之言이니 如水之流 自彼而至此也라 孺子는 成王也라 商人은 兄死弟立者多라 武王崩하고 成王幼하여 周公攝政하니 商人이 固已疑之요 又管叔은 於周公에 爲兄하니 尤所覬覦라 故로 武庚管蔡 流言於國하여 以危懼成王하여 而動搖周公也라 史氏言管叔及其群弟而不及武庚者는 所以深著三叔之罪也라
관숙(管叔)은 이름이 선(鮮)이니, 무왕(武王)의 동생이고 주공(周公)의 형(兄)이다. 여러 아우는 채숙(蔡叔) 도(度)와 곽숙(霍叔) 처(處)이다. 유언(流言)은 근거가 없는 말이니, 물의 흐름이 저쪽으로부터 여기에 이름과 같은 것이다. 유자(孺子)는 성왕(成王)이다. 상(商)나라 사람들은 형(兄)이 죽으면 아우가 즉위(卽位)한 자가 많았다. 무왕(武王)이 붕(崩)하고 성왕(成王)이 어려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하자, 상(商)나라 사람들이 진실로 이미 이것을 의심하였으며, 또 관숙(管叔)은 주공(周公)에게 형이 되므로 더더욱 〈왕위(王位)를〉 넘보았다. 그러므로 무경(武庚)과 관숙(管叔)•채숙(蔡叔)이 나라에 유언(流言)을 퍼뜨려 성왕(成王)을 위태롭게 만들고 두렵게 하여 주공(周公)을 동요시킨 것이다. 사관(史官)이 관숙(管叔)이 여러 아우들과 함께 했다고 말하고 무경(武庚)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삼숙(三叔)[세 아우인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霍叔)]의 죄(罪)를 깊이 나타내려 한 것이다.
13. 周公이 乃告二公曰 我之弗辟(避)면 我無以告我先王이라하시고
주공(周公)이 두 공(公)에게 고하기를 “내가 피하지 않으면 나는 우리 선왕(先王)에게 고할 수 없다.” 하셨다.
辟는 讀爲避라 鄭氏詩傳에 言周公이 以管蔡流言으로 辟居東都 是也라 漢孔氏는 以爲致辟於管叔之辟이라하니 謂誅殺之也라 夫三叔流言호되 以公將不利於成王이라하니 周公이 豈容遽興兵以誅之耶아 且是時에 王方疑公하니 公將請王而誅之耶아 將自誅之也리니 請之면 固未必從이요 不請自誅之면 亦非所以爲周公矣라 我之弗辟면 我無以告我先王은 言我不避면 則於義에 有所不盡하여 無以告先王於地下也라 公豈自爲身計哉리오 亦盡其忠誠而已矣라
피(辟)는 피(避)로 읽는다. 정씨(鄭氏)의 《시전(詩傳)》에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流言) 때문에 동도(東都)[낙양(洛陽)]에 피하여 거하였다.”는 것이 이것이다. 한(漢)나라 공씨(孔氏)는 “관숙(管叔)에게 형벌(刑罰)을 이루었다는 피(辟)이다.” 하였으니, 주살(誅殺)함을 이른다. 삼숙(三叔)이 유언(流言)을 퍼뜨리기를 “공(公)이 장차 성왕(成王)에게 이롭지 못하다.” 하였으니, 주공(周公)이 어찌 대번에 군대를 일으켜 주벌(誅罰)할 수 있었겠는가. 또 이때에 왕(王)이 막 공(公)을 의심하고 있었으니, 공(公)이 장차 왕(王)에게 청하여 주벌(誅罰)할 수 있었겠는가. 장차 스스로 주벌(誅罰)하였을 것이니, 청하였다면 왕(王)이 반드시 따르지 않았을 것이요, 청하지 않고 스스로 주벌(誅罰)하였다면 또한 〈훌륭한〉 주공(周公)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피하지 않으면 나는 우리 선왕(先王)에게 고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피하지 않으면 의리에 다하지 못한 바가 있어 지하(地下)에서 선왕(先王)에게 고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공(公)이 어찌 스스로 자신을 위한 계책을 하였겠는가. 또한 그 충성을 다할 뿐이다.
14. 周公이 居東二年에 則罪人을 斯得하시다
주공(周公)이 동쪽에 거한 지 2년에 죄인(罪人)을 이에 얻었다.
居東은 居國之東也라 鄭氏謂 避居東都는 未知何據라 孔氏以居東爲東征은 非也라 方流言之起하여는 成王이 未知罪人爲誰러니 二年之後에 王始知流言之爲管蔡라 斯得者는 遲之之辭也라
동쪽에 거함은 나라의 동쪽에 거한 것이다. 정씨(鄭氏)가 “동도(東都)에 피하여 거했다.” 한 것은 무엇을 근거하였는지 알 수 없다. 공씨(孔氏)는 동쪽에 거한 것을 동정(東征)이라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유언(流言)이 일어날 때를 당해서는 성왕(成王)이 죄인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2년 뒤에 왕(王)이 비로소 유언(流言)을 퍼뜨린 것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임을 안 것이다. 이에 얻었다는 것은 더디게 여긴 말이다.
15. 于後에 公이 乃爲詩하여 以貽王하시고 名之曰 鴟鴞라하시니 王亦未敢誚公하시다
뒤에 주공(周公)이 시(詩)를 지어 왕(王)에게 드리고 이름하기를 ‘치효(鴟鴞)’라 하니, 왕(王)이 또한 주공(周公)을 꾸짖지 못하였다.
鴟鴞는 惡鳥也니 以其破巢取卵으로 比武庚之敗管蔡及王室也라 誚는 讓也라 上文에 言罪人斯得하니 則是時에 成王之疑 十已去其四五矣라
치효(鴟鴞)[올빼미]는 나쁜 새이니, 딴 새의 둥지를 부수고 알을 가져감으로써 무경(武庚)이 관숙(管叔)•채숙(蔡叔)과 왕실(王室)을 무너뜨림을 비유한 것이다. 초(誚)는 꾸짖음이다. 상문(上文)에 죄인을 이에 얻었다고 말하였으니, 이때에 성왕(成王)의 의심이 이미 10에 4∼5가 제거된 것이다.
16. 秋大熟하여 未穫이어늘 天이 大雷電以風하니 禾盡偃하며 大木이 斯拔이어늘 邦人이 大恐하더니 王이 與大夫盡弁하사 以啓金縢之書하사 乃得周公所自以爲功하여 代武王之說하시다
가을에 곡식이 크게 성숙하여 아직 수확하지 않았는데 하늘이 크게 천둥번개를 치고 바람이 부니, 벼가 모두 쓰러지고 큰 나무가 뽑히므로 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왕(王)이 대부(大夫)들과 모두 변(弁)을 쓰고서 금등(金縢)의 글을 열어 마침내 주공(周公)이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아 무왕(武王)을 대신하려던 말씀을 얻게 되었다.
王이 與大夫盡弁하여 以發金縢之書하여 將卜天變이라가 而偶得周公冊祝請命之說也라 孔氏謂 二公倡王啓之者는 非是라 按秋大熟이 係于二年之後하니 則成王迎周公之歸 蓋二年秋也라 東山之詩에 言自我不見이 于今三年이라하니 則居東之非東征이 明矣라 蓋周公이 居東二年에 成王이 因風雷之變하여 旣親迎以歸하니 三叔이 懷流言之罪하고 遂脅武庚以叛이어늘 成王이 命周公征之하니 其東征往反首尾 又自三年也라
왕(王)이 대부(大夫)들과 모두 변(弁)을 쓰고서 금등(金縢)의 글을 열어 장차 하늘의 변고를 점치려 하다가 우연히 주공(周公)이 책축(冊祝)에 명(命)을 청한 말씀을 얻은 것이다. 공씨(孔氏)는 “두 공(公)[태공(太公)과 소공(召公)]이 왕(王)을 창도하여 열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옳지 않다. 살펴보건대 ‘추대숙(秋大熟)’이 ‘이년(二年)’의 뒤에 연결되어 있으니,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맞이하여 돌아옴이 2년 가을인 것이다. 〈동산(東山)〉의 시(詩)에 “내가 보지 못한 지가 지금 3년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동쪽에 거한 것이 동정(東征)이 아님이 분명하다. 주공(周公)이 동쪽에 거한 지 2년에 성왕(成王)이 풍뢰(風雷)의 변고로 인하여 친히 맞이해 돌아오자, 삼숙(三叔)이 유언(流言)을 퍼뜨린 죄를 품고 마침내 무경(武庚)을 위협하여 배반하므로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명하여 정벌하였으니, 동정(東征)하기 위하여 가고 온 수미(首尾)가 또 따로 3년인 것이다.
17. 二公及王이 乃問諸史與百執事하신대 對曰 信하니이다 噫라 公命이어시늘 我勿敢言이로소이다
두 공(公)과 왕(王)이 여러 사관(史官)과 백집사(百執事)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실입니다. 아! 주공(周公)의 명령이시므로 저희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周公卜武王之疾을 二公이 未必不知之로되 周公冊祝之文은 二公이 蓋不知也라 諸史百執事는 蓋卜筮執事之人이라 成王이 使卜天變者는 卽前日周公使卜武王疾之人也라 二公及成王이 得周公自以爲功之說하고 因以問之라 故로 皆謂信有此事라하고 已而歎息言 此實周公之命이어시늘 而我勿敢言爾라하니 孔氏謂 周公使之勿道者는 非是라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의 질병을 점친 것을 두 공(公)이 반드시 모른 것은 아니나 주공(周公)의 책축(冊祝)의 글은 두 공(公)이 아마도 알지 못한 듯하다. 제사(諸史)와 백집사(百執事)는 복서(卜筮)하는 일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다. 성왕(成王)이 하늘의 변고를 점치게 한 자들은 바로 전일(前日)에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의 병을 점치게 했던 자들이었다. 두 공(公)과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이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은 말씀을 얻고는 인하여 물었다. 그러므로 모두 이르기를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는 이윽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는 실로 주공(周公)의 명령이신데 저희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으니, 공씨(孔氏)가 “주공(周公)이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18. 王이 執書以泣曰 其勿穆卜이로다 昔에 公이 勤勞王家어시늘 惟予沖人이 弗及知러니 今天이 動威하사 以彰周公之德하시니 惟朕小子其新(親)逆이(홈이) 我國家禮에 亦宜之라하시고
왕(王)이 책축(冊祝)한 글을 잡고 울며 말씀하기를 “목복(穆卜)을 할 것이 없다. 옛날에 공(公)이 우리 왕가(王家)에 근로(勤勞)하셨으나 나 충인(沖人)[어린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하늘이 위엄을 동하여 주공(周公)의 덕(德)을 밝히시니, 나 소자(小子)가 친히 공(公)을 맞이함이 우리 국가(國家)의 예(禮)에 또한 마땅하다.” 하시고
新은 當作親이라 成王이 啓金縢之書하여 欲卜天變이라가 旣得公冊祝之文하고 遂感悟하여 執書以泣하고 言不必更卜이라 昔에 周公이 勤勞王室이어시늘 我幼不及知러니 今天이 動威하여 以明周公之德하시니 我小子其親迎公以歸가 於國家禮에 亦宜也라하시니라 按鄭氏詩傳에 成王이 旣得金縢之書하고 親迎周公이라하니 鄭氏學出於伏生이요 而此篇則伏生所傳이니 當以親爲正이라 親誤作新은 正猶大學의 新誤作親也라
신(新)은 마땅히 친(親)이 되어야 한다. 성왕(成王)이 금등(金¦$)의 글을 열어 하늘의 변고를 점치려고 하다가 주공(周公)이 책축(冊祝)한 글을 얻고는 마침내 감오(感悟)하여 글을 잡고 울며 말씀하기를 “굳이 다시 점칠 것이 없다. 옛날에 주공(周公)이 왕실(王室)에 근로(勤勞)하셨으나 내 어려서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하늘이 위엄을 동하여 주공(周公)의 덕(德)을 밝히시니, 나 소자(小子)가 친히 공(公)을 맞이하여 돌아옴이 국가(國家)의 예(禮)에 또한 마땅하다.” 하였다. 정씨(鄭氏)의 《시전(詩傳)》에 “성왕(成王)이 이미 금등(金¦$)의 글을 얻고는 주공(周公)을 친히 맞이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정씨(鄭氏)의 학문은 복생(伏生)에게서 나왔고 이 편(篇)은 복생(伏生)이 전한 것이니, 마땅히 친(親)을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친(親)을 잘못 신(新)으로 쓴 것은 바로 《대학(大學)》에 신(新)을 잘못 친(親)으로 쓴 것과 같다.
19. 王이 出郊하신대 天乃雨하여 反風하니 禾則盡起어늘 二公이 命邦人하여 凡大木所偃을 盡起而築之하니 歲則大熟하니라
왕(王)이 교외(郊外)로 나가자, 하늘이 비를 내려 바람을 반대로 불게 하니, 쓰러졌던 벼가 모두 일어났다. 두 공(公)이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큰 나무가 쓰러진 것을 모두 일으켜 단단히 다지니, 세(歲)[곡식]가 크게 성숙하였다.
國外曰郊라 王出郊者는 成王이 自往迎公이니 卽上文所謂親逆者也라 天乃反風하여 感應이 如此之速하니 洪範庶徵을 孰謂其不可信哉아 又按 武王疾瘳四年而崩하고 群叔流言하여 周公居東二年에 罪人旣得하고 成王이 迎周公以歸하니 凡六年事也라 編書者附于金縢之末하여 以見請命事之首末과 金縢書之顯晦也라
국외(國外)를 교(郊)라 한다. 왕(王)이 교외(郊外)를 나간 것은 성왕(成王)이 직접 가서 주공(周公)을 맞이한 것이니, 곧 상문(上文)에 이른바 ‘친히 맞이한다’는 것이다. 하늘이 바람을 반대로 불게 하여 감응함이 이와 같이 신속하니, 〈홍범(洪範)〉의 서징(庶徵)을 누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겠는가.
또 살펴보건대 무왕(武王)이 병이 나은 지 4년에 붕(崩)하였고, 여러 숙(叔)들이 유언(流言)을 퍼뜨려 주공(周公)이 동쪽에 거한 지 2년에 죄인(罪人)을 얻었고,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맞이하여 돌아왔으니, 모두 6년의 일이다. 책을 엮는 자가 〈금등(金縢)〉의 끝에 이것을 붙여 명(命)을 청한 일의 수말(首末)과 금등(金縢)의 글이 드러나고 감춰짐을 나타낸 것이다.
[ 사이버서원 전통문화연구회 書經集傳 강의 자료 참조 ]
※ 다음까페 "한국문화의 원류" 번역 자료를 참조, "書經集傳, 成百曉 譯註"와 동일함
첫댓글 주공도 멋진 분이지만, 사서삼경의 주석을 쓴 주자, 주희선생도 참 대단한 분인것 같습니다.
시경이나 서경등 주희선생의 주석이 없다면, 우리가 이해를 얼마나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