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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힌두교에 대한 반감이 부흥운동 촉발 |
# 불법의 모천회귀 불교가 그 발상지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을 때, 그 회생을 도모하는 기운은 인도 내부가 아니라 스리랑카에서 일어났다. 그 이전에도 인도 내에서 불교부흥운동의 기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이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하여 전국적인 호응을 얻게 되는 것은 19세기 말엽 스리랑카의 호법(護法)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를 통해서였다. 이것은 지난날 아쇼카왕이 스리랑카에 뿌린 전법의 씨앗이 23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모천(母川)으로 회귀한 역사적인 일이다. 그 후 인도 안에서도 벵골지역의 승려들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불교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으며, 암베드카르(Ambedkar)의 신불교 운동에 이르러서는 ‘집단 개종운동’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스리랑카에 뿌린 전법 씨앗 2300년 지나 인도 회귀 기독교 교육받은 다르마팔라 정체성 반성 불법전파
# 다르마팔라의 대각회(大覺會, Mahabodhi Society)
다르마팔라는 1864년 9월17일 콜롬보의 전통적인 불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모두 싱할라 불교 가문 태생으로 일생 동안 재가 불교도로서의 엄격한 삶을 살았으며, 이것은 다르마팔라의 종교적인 삶에 모범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마팔라는 유년시절부터 근 15년 동안을 줄곧 기독교 선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가 태어날 당시 콜롬보는 기독교가 성행하고 있었으며, 민족 종교인 불교는 오히려 금기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어린 시절 기독교 선교학교에서의 교육은 다르마팔라에게 불교도로서 자기 정체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근대 인도불교 부흥운동을 결심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1891년 1월에 부다가야 성지순례는 다르마팔라의 대각회 창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경은 ‘아시아의 빛’이라는 글을 통하여 황폐한 부다가야 사원의 근황을 전하며, 인도 정부에 이 중요한 불교 성지의 복구를 촉구한 적이 있다. 부다가야 사원이 힌두교 관리의 소유 하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부다가야를 비롯한 인도의 불교 성지들을 회복하고 인도에 불법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 결심은 그 해 5월 스리랑카 대각회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같은 해 7월 네 명의 스리랑카 비구가 부다가야에 파견되고 인도에서 대각회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불교의 발상지에서 불교부흥운동이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중대한 사건이다. 10월에는 전 세계 불교계에 부다가야의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다르마팔라는 부다가야에서 국제불교회의를 개최했으며, 스리랑카, 중국, 일본, 치타공 등지에서 비구들이 참석했다.
오늘날 인도의 불적들이 그나마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르마팔라의 사심 없는 노력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도 고고학회가 1904년 사르나트 불적 발굴을 시작했을 때, 수많은 유물 유적들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도록 측면 지원했던 사람도 바로 다르마팔라였다.
그가 창간하고 주도한 마하보디 저널도 인도의 불교부흥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오늘날 최고의 세계적인 불교 저널이 된 마하보디 저널은, 다르마팔라가 인도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 이듬해인 1892년 5월에 시작되었으며, 아시아의 여러 불교 국가들과 부다가야 간에 뉴스를 실어 나르는 수레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
암베드카르는 여러 모로 다르마팔라와 대조적인 성장배경을 지닌다. 1891년 중인도 인도레(Indore)의 모우(Mhow)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천민계급(Mahar)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상층 힌두교도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암베드카르의 성장배경에는 힌두교, 특히 카스트제도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이 점은 군인이었던 부친이 카스트제도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카비르(Kabir) 중심의 박티(bhakti)종교 신봉자였다는 점에서도 이미 그 싹을 볼 수 있다. 부친의 반(反)카스트적인 종교성향과 불가촉천민이라는 그의 신분은 훗날 그의 사회적 활동과 나아가 힌두교교를 버리고 불교를 택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불가촉천민으로는 보기 드물게 암베드카르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얻었다. 1907년에 불가촉천민으로는 처음으로 뭄바이 엘핀스톤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합격자 모임에서 당시 작가 겸 사회개혁가로서 유명했던 켈루스카르(K. A. Keluskar)로부터 〈부처님의 생애〉라는 책을 선물 받는다. 그의 생애에서 불교와 첫 인연으로 기록된다. 그후 켈루스카르는 암베드카르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으며, 그 덕분에 유학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힌두교와 카스트제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수년 동안 암베드카르의 활동은 불가촉천민의 지위향상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으로 요약된다. 1918년 전인도 하층민 모임(All-India Depressed Classed Conference), 1924년 결성된 ‘하층민 복지협회’(Hahishkrit Hitakrini Sabha)를 통하여 하층민의 지위향상을 위한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기존의 힌두교와 카스트제도를 인정하는 가운데서 하층민의 지위향상이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당시 간디와 갈등을 겪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간디는 카스트제도 안에서 하층민의 지위향상을 주장한 반면에 암베드카르는 카스트제도 자체를 부정했다.
“나는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으나 힌두교인으로 죽지는 않는다.” 1935년 나시크의 대중 집회에서 한 이 유명한 선언은 암베드카르의 사회개혁운동이 신불교운동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다. 하층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길은 오직 불교로 개종하는 일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 선언은 당시 인도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각회 등 당시 인도의 소수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큰 지지와 성원을 받았는가 하면, 또한 정치, 종교계의 많은 지도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간디는 종교란 집이나 외투처럼 바뀌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로 암베드카르의 입장을 비난했다.
나시크에서 힌두교와의 결별 선언 이후 바로 불교로 개종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나시크 선언 후에도 그의 주요 관심사는 어떤 특정 종교가 아니라 하층민의 지위향상이었으며, 그것은 주로 정치활동을 통하여 구체화되었다. 1946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인도독립과 함께 네루정부의 초대법무장관을 지냈다. 1948년 그가 초안한 헌법이 이듬해 거의 원안대로 확정됨으로써 그는 인도헌법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1949년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1회 세계불교도 회의 이후 여러 불교 모임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였으며, 1951년에는 인도 불교도 모임을 결성하여 보다 조직적인 불교운동을 펼쳤다. 1956년에 집필을 마친 〈붓다와 그의 다르마〉(The Buddha and His Dharma)는 불교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해를 담고 있으며, 오늘날 신불교도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1956년 10월 14일 나그푸르(Nagpur)에서 암베드카르는 자신의 수계 의식을 가졌다. 그의 수계 의식에서 40만 명의 불촉천민이 동시에 불교로 개종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나그푸르, 찬다(Chanda) 등에서 수많은 하층민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수계 의식이 계속되었다. 1956년 12월 5일 입적하기까지 그는 공식적으로 7주 동안의 불교도였지만, 근대인도 부흥운동에 남긴 그의 발자취는 획기적이었다. 그로 인하여 불교로 개종한 힌두교인만도 75만 명이 넘었다.
천민출신 암베드카르 카스트제도 비판 간디와 갈등 “불교개종만이 하층민 인권보장”천명…75만명 따라 # 현재 인도의 대각회와 신불교
오늘날 인도에서 불교가 살아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물론 북인도의 불교성지나 데칸고원의 석굴사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기념되는 유적으로 또는 관광자원으로 관리되는 곳이 아닌, 참으로 불교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현장은 흔치 않다는 말이다. 그래도 살아있는 불교의 명맥이 감지되는 곳은 대각회 사원들이다. 불자가 아닌 배낭여행자들에게도 대각회 사원들은 싸고 인심 후한 숙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불교도만이 아니라, ‘만민의 선(善)을 위하여, 만민의 행복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던 다르마팔라의 인류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부흥을 위한 어떤 적극적인 활동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대각회와는 달리 눈에 띄는 사원은 잘 보이지 않지만, 신불교도들의 움직임은 적극적이다. ‘포교’라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도 신불교도들이다. 매년 4월14일 저녁이면 인도 곳곳에서 “비자야 로드 붓다! 비자야 암베드카르!”를 외치는 끝없는 행렬을 본다. 암베드카르의 탄생을 기념하는 신불교도들의 축제 행렬이다. 최근 뭄바이 시내 한복판에 암베드카르의 동상이 세워지고, 산치의 마하스투파를 본뜬 대형 신불교사원이 조성되었다. 신불교도의 가정에는 으레 부처님의 사진과 나란히 암베드카르의 사진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르마팔라의 대각회 활동과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을 통하여 적어도 외적으로 보아 불교도의 수가 크게 늘었고 불교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신불교 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점 또한 적지 않다. 이들에게 있어서 개종은 불교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감화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사회적인 신분을 벗어난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신불교라는 이름의 새로운 힌두 카스트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으로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거룡/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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