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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수행의 동물이다, 김진태선생과 김도이선생의 위빠사나 수업
김진태선생과 김도이선생으로부터 위빠사나 수업을 들었습니다. 주로 김진태선생이 법문하고 김도이선생이 위빠사나 수행지도 하는 역할분담입니다. 이런 강좌가 마련된 것은 선인화선생의 노고가 큽니다. 선인화선생의 원력으로 우리함께 빌딩 6층 우리는선우법당에서 강좌가 개설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입니다.
2018년 12월 1일 토요일 두 번째 강좌에 참석했습니다. 토요일 저녁 대부분 사람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지만 배움의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두 선생과 인연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웹포스터를 만들어 카톡이나 밴드에 배포되기도 했지만 자발적 참여자는 극히 드뭅니다. 이날 참석자는 총 20명이었습니다.
수업에 들어 가기 전에 간단히 예경문과 삼귀의, 오계를 빠알리어로 낭송했습니다. 삼배를 할 때는 테라와다방식입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굽혀 두 손을 앞으로 내밉니다. 이때 손바닥을 뒤집어 하늘을 향하게 하는 방식은 하지 않습니다.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바닥에 이마를 대는 방식입니다. 삼배할 할 때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세 번 두 손과 이마를 바닥에 댑니다.
보시, 지계, 사마타, 위빠사나를 해야
김진태선생은 7시 20분부터 8시 50분까지 1시간 30분동안 법문했습니다. 꽤 긴 시간임에도 이삼십분 지난 것처럼 짧게 느껴졌습니다. 법문이 그만큼 재미있었음을 말합니다. 달변에 유머까지 곁들인 법문은 사람들을 웃음바다로 몰아 넣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을 만들기도 합니다. 법문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번 법문에서 김진태선생은 ‘행복’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한 것은 한마디로 행복이라 했습니다. 그렇다고 오욕에 따른 감각적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시, 지계, 사마타, 위빠사나 이렇게 네 가지를 닦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네 가지에 대하여 수행(bhāvana)이라 했습니다. 재가불자라면 누구나 닦아야 하는 필수사항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인연이 없는 사람들은 수행하기 힘들 것입니다.
말을 물에 데려갈 수 있으나 물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파옥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의 법칙’을 보면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과거생에서도 닦아어야 했다.”라거나,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과거-생에 수행을 했어야 했다.”(272쪽)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소위 ‘한수행’한다는 사람들은 이번 생은 물론이고 과거 전생에도 수행자였음을 말합니다.
김진태선생은 보시, 지계, 사마타, 위빠사나 네 가지를 닦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파옥사야도 법문집을 보면 이 네 가지에 대하여 보시, 지계, 명상이라 했습니다. 이를 세 가지 공덕의 토대라 합니다. 김진태선생이 말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합한 말이 명상이므로 파옥사야도가 한말이나 같은 말입니다.
오로지 기도만 강조한다면
흔히 재가불자들에게는 보시와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런 논리는 유일신교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유일신교에서도 보시와 지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여기에 하나 더 하여 ‘명상’을 강조합니다. 보시하고 지계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마음’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마타와 위빠사나입니다.
부처님은 초심자들에게는 보시와 지계 등 낮은 가르침부터 가르쳤습니다.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보다 높은 단계의 가르침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는 재가불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이를 ‘차제설법’이라 합니다.
차제설법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 것일까? 율장대품을 보면 “세존께서는 차제설법을 했다. 곧,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타락-오염과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했다.”(Vin.I.15)라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쉬운 가르침부터 시작하여 점차 어려운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 차제설법입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절에 가면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입니다. 절에 10년, 20년, 30년, 평생을 다녀도 듣는 말입니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말만 하며 기도만 강조한다면 유일신교와 하등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불교가 유일신교와 다른 것은 명상입니다. 마음을 계발하여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기도할 것만 강조한다면 성직자의 ‘직무유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차제설법을 하면서 보시, 지계뿐만 아니라 욕망의 여읨에 대해서도 말씀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행은 출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은 재가신자 마하나마에게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귀의 하고 오계를 지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재가자가 보시와 지계를 하여 어느 정도 지혜가 갖추어 졌을 때 “마하나마여, 세상에 재가신자는 발생과 소멸에 대한 고귀하고 통찰력 있는 지혜를 갖추고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성취합니다. 이렇게 재가신자가 지혜를 성취합니다.”(S55.37)라 했습니다. 사성제의 지혜를 성취해야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재가 구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다음 생에 사람 몸 받으려면
파옥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보시와 지계와 명상 하는 것에 대하여 ‘공덕’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명상하는 것에 대해서도 공덕 쌓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생소합니다. 그러나 현생뿐만 아니라 과거 전쟁까지 확장하면 명상하는 것이 공덕임은 분명합니다. 과거전생에 명상한 사람은 그 공덕의 힘으로 현생에서도 수행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현생에서 수행하는 자에 대하여 아비담마나 청정도론에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전생에 무탐, 무진, 무치 수행 했던 자가 그 공덕으로 현생에서도 계속 해서 수행하는 삶을 살게 됨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늦은 밤 저녁에 수행처에 와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과거전생에 수행자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임에 틀림 없습니다.
보시와 지계, 그리고 명상하는 것은 공덕쌓기 입니다. 이번 생은 물론 다음 생을 위한 힘을 기르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공덕의 힘이 클수록 이루어내는 것도 클 것입니다. 누군가 보시를 하면 그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김진태선생은 인간으로 태어나 지체높은 자가 되거나 부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했습니다. 선업공덕의 힘이 작용한 것입니다.
지계를 하면 어떤 과보를 받을까? 이에 대하여 김진태선생은 욕계천신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타당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덕목에 대한 경’을 보면, 재가불자가 팔계를 지켰을 때 “하늘나라의 행복에 비하여 인간의 권력은 저열한 것입니다.”(A3.70)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보시를 많이 하면 부귀한 인간으로 태어나고, 지계를 하면 욕계천신으로 태어나 복과 수명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수승한 것은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명상을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보시도 하지 않고 지계도 하지 않고 명상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김진태선생은 손톱끝의 흙의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사람이나 천신이 될 확률은 손톱끝의 먼지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수행의 동물
대부분 사람들은 사악도에 떨어집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보시와 지계와 명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적 지혜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김진태선생은 무상, 고, 무아를 볼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불교적 지혜는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입니다. 법구경에서도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7)라 하여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혜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빤냐(paññā)라 합니다. 한역으로 반야(般若)라 합니다.
지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계발됩니다. 그런데 수행은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김진태선생은 “인간은 수행의 동물입니다.”라 했습니다. 또 김진태선생은 사람이 다음 생에 사람 몸을 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수행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수행을 강조 했는데 “수행을 몸에 붙이면 절대로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라 했습니다.
자녀에게 명상을 알려 주면
김진태선생은 한시간 반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두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 인상에 남은 말은 자녀교육에 대한 것입니다. 절에 가서 기도하기 보다는 자녀에게 명상을 가르쳐 주라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면 집중력이 길러지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사마타수행은 대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는 천재들에게 볼 수 있습니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체육이든 공통점은 집중력입니다. 이렇게 자녀에게 명상을 가르쳐 주면 감정조절이 되어서 감방에 가거나 왕따당하거나 자살하는 등 불행한 일도 생기기 않을 것이라 합니다.
배의 호흡을 관찰하고
김진태선생의 법문이 끝나고 김도이선생의 위빠사나 지도가 있었습니다. 미얀마에서 수행한 경험을 알려 주었습니다. 주로 ‘마하시’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배의 호흡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의 호흡을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베이스캠프와 같다고 했습니다.
저녁9시부터 약 40분간 좌선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명을 어둡게 하고 평좌 또는 반가부좌 하여 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 했습니다. 다리가 저리면 저리는 부위가 관찰대상이 됩니다. 가급적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지켜 보라고 했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알아차리면 사라지기 때문이라 합니다.
2016년도에 김도이선생으로부터 위빠사나지도받은 적이 있습니다. 가을 한철을 매주 한번 지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익숙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유도법문’입니다. 죄선중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나직이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초심자에게 매우 도움이 됩니다.
경행과 인터뷰
40분 좌선이 끝나고 경행했습니다. 경행을 행선이라고도 합니다. 보통 한시간 좌선에 한시간 경행합니다. 선종계통에서는 포행이라 하여 짧게 몸풀기 정도에 불과하지만 행선도 엄연히 수행입니다. 그래서 좌선과 동등한 시간을 배분합니다. 행선을 하면 상기병을 막는 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앉아 있기만 하면 피가 머리에 솟구쳐 있는 듯하지만 앉아 있는 시간만큼 걸으면 피가 아래로 내려 간 듯하여 상기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선은 시간관계상 약 10분으로 그쳤습니다. 다음으로 인터뷰시간입니다. 좌선이나 행선 중에 느꼈던 현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법우는 좌선 중에 환상을 두 번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에 김도이선생은 알아차림을 놓쳤기 때문에 ‘니밋따(nimitta)’를 본 것이라 했습니다. 또 어떤 법우는 좌선중에 향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했는데 이런 것에 대하여 ‘알아차리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김도이선생에 따르면 위빠사나 수행중에 일어나는 열 가지 장애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수행도중에 ‘빛’ 을 보는 것 등을 말합니다. 이런 현상에 빠지면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 사야도는 “내가 언제 집중하라고 했습니까?”라고 되묻는다고 합니다. 위빠사나는 일어나는 대로 보는 것이고 따라가면서 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꽉 차고 뿌듯한 느낌을
7시부터 시작된 수행은 10시 반가량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법문과 좌선, 행선, 그리고 인터뷰로 이어져서 시간이 금방 지나 간 듯합니다. 무엇보다 좌선과 행선, 인터뷰가 있어서 빛이 난 듯 합니다. 만일 법문만 있다면 알맹이가 빠진 듯한 느낌입니다.
법문만 있다면 허전한 느낌입니다. 또 수행만 한다면 역시 허전합니다. 그래서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경전을 읽어서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동시에 수행을 늘 몸에 붙이는 것입니다.
10시 30분에 지하철을 탔습니다. 귀가하니 자정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하루는 아니었습니다. 마치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늦은 시간에 귀가 했을 때 뿌듯함, 봉사활동 하고 귀가 할 때 느끼는 잔잔한 행복 같은 것입니다. 남들이 저녁 있는 삶을 즐길 때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일까 피곤한 귀가길임에도 꽉 차고 뿌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2018-12-02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