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5.木. 맑음
남도순례南道巡禮, 다섯 번의 식사.
여산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과 맛난 김밥으로 접심식사를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고속도로위에서 설왕설래說往說來를 하긴 했지만 전주, 남원 쪽으로 돌아가면서 수많은 터널을 지나친 다음에야 화엄사에 잘 도착했다. 남도권역인 구례에 들어서자 확연히 다른 풍경이란 가을단풍보다는 붉은 장두감이 도처에 쌓여있다는 점이었다. 본래 남도 지방에는 알려진 감산지가 많아 장성이나 청도도 유명하지만 구례나 하동의 악양도 좋은 감산지라는 것을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화엄사 참배를 마치고 악양 용화사로 가기 전에 저녁식사를 먼저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악양 용화사 초입 부근의 한 식당이었다. 한옥의 천장을 높이 올려 시원스럽게 잘 지어놓은 대다가 길가 쪽의 통유리창이 열려있는 벽처럼 보여 저 너머 들판의 산들바람까지 느껴질 듯한 자연친화적인 분위기였다. 우리들은 일행 숫자에 맞춰 탁자 세 개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식단표 옆에 아크릴판으로 눈에 띄게 붙여놓은 한 문구를 보게 되었다. ‘반찬 리필은 없습니다.’
나는 낭비浪費라는 말이 얼마나 멋있게 사용될 수 있는지 이 한 문구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 거대한 우주에 우리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공간의 엄청난 낭비浪費입니다.’ 인문학자이자 천체물리학자인 칼 세이건Carl Sagan 원작으로 1997년에 영화화되었던 ‘콘택트Contact’ 라는 영화에서 여주인공인 천체물리학자로 분한 조디 포스터Jodie Foster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었다. ‘이 거대한 우주에 우리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공간의 엄청난 낭비입니다.’ 분명 이 말은 천체물리학자의 시각보다는 인문학자나 철학자로서의 관점이겠지만 한 문장 안에 이만한 울림과 파장을 넣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연구하는 학자에 머물지 않고 유머와 생生의 관조觀照를 이해하며 한 세상을 풍미하는 경세가經世家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리필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가 아닌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얼마나 사람을 억압하고 부담을 주고 있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리필이란 말의 가장 나쁜 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저 문구를 ‘정성스럽게 만든 반찬입니다. 부디 남기지 말아주세요.’ 라고 했다면 음식점 사장님의 음식사랑과 자부심을 충분할 만큼 느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막상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니까 반찬 가짓수는 많았으나 양은 리필을 부탁해야할 만큼 적었고, 대접에 담긴 하얀 밥은 더 적었다. 기분 좋게 방에 들어왔으나 아크릴판의 한 문구를 보는 순간 벌써 식욕이 절반쯤은 통유리창 밖으로 날아가 버린지라 반찬이나 밥의 리필에 크게 신경이 쓰이지도 쓰고 싶지도 않았다. 3차 산업인 서비스업에서는 문자 그대로 서비스정신이 가장 중요한 덕목德目이다. 정성과 호의가 담긴 말 한 마디와 친절한 태도가 그 무엇에도 우선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이 맛난 청국장淸麴醬이 청국장請麴醬이 될 수도 청국장晴麴醬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는 용화사까지 가는 길은 10여분 남짓 가까운 거리였으나 오르락내리락 경사가 심한 언덕길이었다. 경내에 들어서자 잘 익은 대봉감을 마음대로 골라 따 먹으라는 용화사 주지스님인 관오스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땅거미가 무릎까지 내려서는 시간이라 내일 아침을 기약하고 우선 대중방으로 들어갔다. 오후6시가 되자 법당에서 저녁예불을 모신 뒤 다시 대중방으로 내려와 둥글게 둘러앉아 차담시간을 가졌다. 노란 귤도 까먹고, 붉은 대봉 홍시도 먹어보고, 까만 김밥과 하얀 배와 사과도 몇 쪽 먹었다. 옆에 앉아있던 태진이가 배낭을 부스럭거리더니 배가 빵빵한 스낵과자 한 봉지를 건네주었다. 입에 익숙한 새우깡이나 라면땅 같은 맛은 아니었으나 왠지 치즈나 피자가 연상이 되는 서양 풍미風味를 가진 스낵이었다. 그것도 몇 개 꺼내어 맛을 보았다. 스님 상에 놓여있는 요구르트를 세 개나 집어다 먹어보았다. 그런데 오른쪽에 앉은 길상화보살님도 왼편에 앉은 태진이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 남도순례南道巡禮, 다섯 번의 식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