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길을 지나면 드디어 절을 찾는 객들을 환영 인사하는 듯 소나무가 늘어 선 길이 나옵니다. 수령이 7~80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1885년(고종 22년)에 어명으로 이 산에 묘(墓)를 쓰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큰 자연석에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습니다.
다솔사 주변이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혈’에 속해 당시 관찰사가 억지로 묘를 쓰려 하자, 승려들이 저항하여 임금이 명령으로 금지한 것이라고 합니다.
'혈'이란 집이나 묘를 앉힐 자리로 산의 기운이 최종적으로 모여 상대적으로 많이
응축된 곳이라고 합니다.
자연의 순리를 알고 인간의 삶을 거기에 조화시키는 원 뜻을 왜곡해, ‘발복’이라는 이름의 인간 탐욕의 도구로 변한 풍수의 씁쓸한 이면을 보는 듯합니다.
다솔사는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고 당우(전각)의
배치나 구성도 조금은 궁색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면 안되듯이, 다솔사 역시 겉모습과는
달리 찾는 이에게 들려 줄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절입니다.
돌층계를 오르면 맨 먼저 만나는 건물은 대양루입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1758년(영조 34) 세워졌습니다. 당시 건물로 유일하게 남은 건물입니다.
다솔사는 511년(이 때는 아직 이 곳이 신라의 영역이되기 전입니다) 인도승으로 알려진 연기조사가 창건한 이후 몇 차례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1914년 화재로 대양루만 살아남았습니다.
지금은 옆에 돌층계가 절 출입구 역할을 하지만 그 이전에는 대양루가 절로 들어가는 공간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맞배지붕(아파트 지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박공’이라고도 불리는, 건물의 정면과 뒤쪽에만 지붕면이 구성된 형태)으로 아래·위층의 높이가 모두 13m에 달하며, 36개의 큰 기둥이 350제곱미터의 몸 전체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위층은 적멸보긍 쪽을 향해 열려있는데 이렇게 열려진 공간을 가진 건물에는 ‘루’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 곳은 각종 집회장이나 교육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다솔사 차 전시관으로도 사용되고 있는데, '다솔사 차'에 관한
여러 자료들, 특히 현대 '다솔사 차'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효당 김범술(1904~1979)에 관한 자료들을 게시하고 있습니다
.
대양루 앞엔 본전인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안치되는 공간입니다. 1978년 2월 8일에 있었던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改金佛事)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되었는데(응진전을 수리하다가 탱화 뒤 벽에서 사리가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있음), 1980년 폭우로 대웅전이 기울고 승당이 퇴락하여 금강계단을 세워 진신사리를 모시고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대체했습니다.
이곳 적멸보궁의 창 앞에는 열반에 드신 부처님을 형상화한 돋음새김 형태의 열반상(누워계신 와불)이 있습니다. 유리로
된 투명창을 통해 진신사리를 앞에 모시고 절을 하는 공간에 굳이 열반상을 두어여 할 지 고개 갸웃거려집니다. 진신사리
그 자체가 부처님이고 법인데 다시 그 앞에 열반상?
적멸보궁 옆에는 응진전과 극락전이 높이를 달리하여 사이 좋게 들어서 있습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주전으로 모시고 있는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몇
차례 소실과 중건을 거쳐 지금의 건물은 1910년에 중건한 것입니다.
아미타불은 한량없는 수명(무량수),
한량없는 광명(무량광)의 부처님으로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모신 건물을 극락전, 무량수전이라고
부릅니다.
응진전은
응진이란 '진리에 응하여 사람들을 충분히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를 말합니다. 여기엔
아라한을 모시는데 아라한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 불교 수행자의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합니다.
응진전은 아라한을 모시기 때문에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불리는데 극라전을 미타전으로, 아미타 신앙을 줄여 미타 신앙으로
하는 것과 함께 잘못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산스크리트어나 빨리어에서 A(혹은 An)는 부정접두사로서 없다는 의미인데, 빨리어에서 미타(mita)는 ‘양’을 뜻하니
아미타는 ‘무량’이 되고,
아라한은 번뇌의 샘(물이 새듯이)이 없다는 뜻이라고
하니 일리가 있는 견해 같습니다.
승려들의 숙소인 요사채인 안심료는 1930년대에 지어졌는데, 후대에 이름을 알린 여러 유명인사들이 머문 곳이었고, 김동리가 한
때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짧은 그의 소설 ‘등신불’의
모티브를 얻은 곳이기도 합니다.
다솔사 차전시관에는 '등신불'과 관련 있는 인물 4사람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만해가 김동리의 형인 범부에게
"우리나라 고승전에도 소신공양한 이가 있소?" 하고 물으니 범부가 만해를 보고 웃고만 있자, 만해는 "중국
고승전에는 소신공양이니 분신공양이니 하는 기록이 가끔 나오는데 우리나라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아.."
하는
대화에서 영감을 얻어 1961년 11월, 소설 ‘등신불’을 발표합니다.
만해 한용운은 최범술에게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로 스스로 얘기하고 있으며 이후 1973년 '한용운전집'을 최범술이 주도적으로 편찬 간행합니다.
안심료 앞 마당에는 3그루의 큰 편백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만해 한용운의 회갑잔치
기념으로 만해를 초청하여 함께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가 전혀 되어있지 않습니다. 기념식수는 한 그루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만.....
첫댓글 감사합니다.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절입니다.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솔사에 두번 갔는데도 제 기억은 사리탑과 차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세한 자료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역시 사리탑과 차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