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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2 장
표적이냐 실체냐 (2)
========== <註: Open> ==========
로마서 102장의 강해 노트 2부는 음성 설교의 내용과 유별나게 책의 텍스트가 많이 수정되어 있다. 그렇게 수정하는 과정에서 원 설교의 문장과 아주 다르게 내용이 많이 편집된 것도 있다. 그런 편집의 결과로 문맥의 연결이 엉뚱하거나 어색한 부분이 많이 드러나고 있어서 본 강해 노트 2부에서는 문장의 수정에 특히 애로가 많았다. 음성 설교에 있는 좋은 내용이 누락된 것은 원본을 일부 살려서 삽입한 것도 있다.
========== <註: Close> ==========
얍복강 사건 이후의 야곱의 삶 즉 이스라엘로서의 삶은 요셉이 보여주고, 그 요셉의 삶을 유다라는 안경으로 봐야 한다. / 그리고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하고는 요셉의 이야기로 푼다. /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지만, 그 이스라엘의 삶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대신 그 삶을 요셉으로 설명해 주신다. / 야곱은 자신을 헌신하여 자기의 노력과 열심으로 하나님께 (자기의) 제물을 마련하려고 하는,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자, 실족시키는 자, 강도이다. / 그가 하나님께 환도뼈를 가격당하여 그 율법과 말씀을 마음으로 갖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이스라엘이 된다.
그 삶을 요셉이 설명해 주므로 하나님이 요셉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장면이 성경에 단 한 줄도 없다. 요셉이 이미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가진 자의 삶을 살고 있다. / 그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중간에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유다라는 안경으로 요셉을 보라는 것이다. -> 그러면 요셉도 이스라엘이고 유다도 이스라엘이다.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말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같은 내용을 담고 ’아나데마‘의 삶을 살다 간 존재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 유다와 이스라엘, 요셉의 삶을 하나로 묶어서 우리에게 던져준다.
유다의 후손으로 아들이신 예수(메시아)가 오셔야 하고, 이스라엘의 아들들(르우벤 - 이것이 아들이다 | 벤야민 - 아들의 완성이다) 열둘이 아들로 등장한다. 그래서 유다도 아들로 끝나고, 이스라엘도 아들로 끝난다. -> 그 아들이, 그 씨가 그들을 구원해 내는 이야기를 성경이 일부러 이솝이야기처럼 예를 들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들은 표적, 보증, 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남 유다나 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이름을 남 유다, 북 이스라엘로 지은 것은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유대인, 이스라엘인, 유대 이스라엘 이렇게 혼용해서 쓰게 된다. /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아들이신 메시아가 오셨고, 이스라엘(야곱)의 아들들이 르우벤으로 시작하여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완성된 아들)으로 끝난다.
야곱의 첫 아들 르우벤(벤=아들)의 이름은 보라 아들이 여기 있다, 아들의 시작을 뜻한다. 그리고 열둘을 성경에서 계속 아들로 쓴다. -> 열둘 = 아들 / 그래서 유다도 아들을 낳고 씨를 가져야 하고, 이스라엘도 아들을 가져야 하고, 그 아들에 의해서 그들이 살아나고, 그 아들을 표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진리로 해석해야 한다. / 그래서 유다가 표적을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가 요셉(양식을 관장하는 자, 말씀을 갖고 있는 자, 인과 표를 갖고 있는 자)이 양식을 갖고 있는 자로 성경에 등장한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동일하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민족적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영적 이스라엘, 씨를 가진 자들을 설명한다. ->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유다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이스라엘의 아들은 요셉이라는 아들로 축약되어서 그 자손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지워진 역할을 감당한다.
유다는 메시아를 낳아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자이다. 그는 그 아들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창세기 49장에서 실로(שִׁלֹו)가 온다고 했는데 그 실로가 메시아이다. “유다의 씨로 실로가 온다. -> 그래야 유다가 살아난다”는 말이다. / 유다는 자손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셋째에게 며느리를 줘야 자손이 생기는데 며느리를 주지 않는다. 자손이 없으면 자기도 죽는다. / 유다는 나중에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와 똑같은 자이다. 그래서 유다이다. 그대로 두면 유다는 멸망이다. 그 메시아가 안 오면 안 된다. / 그리스도, 진리를 남편으로 갖지 않고, 율법을 남편으로 가져 그와 연합하는 것을 성경은 간음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율법으로 오신 것은 간음하는 자, 창녀가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여자는(주: 다말, 창녀로 오신 예수?) 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래서 죽어야 하는 자(유다)에게 가서 인과 지팡이를 받고 씨를 만들어 버린다. 죽어야 할 유다는 영문도 모르고 그 씨를 주게 된다. / 그 씨는 유다가 반드시 생산해 내야 했던 약속의 자손, 실로이다. / 그래서 유다의 족보에서 다윗도 나오고 솔로몬도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도 나온다.
죽어야 할 부정한 다말은 나중에 그 씨의 주인이 누구인지 묻는 유다에게 그 씨 주인의 인과 지팡이를 내어 놓으면 산다. /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다. 유다는 그 여자(다말)에게 염소를 주면 안 된다. 유다가 이 사실을 알고 염소를 안 준 게 아니라 상대 쪽에서 희생제물, 율법을 안 받은 것이다. 인과 지팡이만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 씨가 생기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그 일로 마누라가 죽은 지 며칠도 안 돼서 창녀와 잠을 잔 유다가 폭로된다. 그 당시 율법으로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였다. 다말이 입만 열면 유다는 죽게 되어 있다. / 하지만 씨를 가진 여자 다말이 더럽고 추악한 세상의 평가를 혼자 다 뒤집어쓰고, 그 죄를 이야기하지 않고, 유다에게만 “인과 지팡이를 내놓으며 이게 당신 것이죠?”라고 말하고 그냥 사라진다. / 유다가 그때 그것을 두고 ‘의’라고 한다. “네가 의롭다.” 이게 다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가 그 표, 그 인과 지팡이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요셉이라는 아들 덕분에 죽음을 모면한다. 요셉은 무죄한 아들이었다. 다른 형제들의 죄와 어두움을 고발하는 아들이었다. 고자질 잘하는 영악한 인간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다른 이들의 어두움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요 말씀이다. 말씀이 떨어지면 그 어두움과 죄가 다 드러난다. 그게 요셉의 역할이었다. / 다른 아들들이 보니 요셉으로 인해 자기들의 죄가 자꾸 드러나니까 요셉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게 예수 죽인 우리 이야기이다. /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나게 하는 자는 죽여야 한다. 그래서 형제들이 그를 죽이려고 구덩이에 넣었는데, 그중 유다가 죽이지는 말고 팔자고 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애굽으로 간다.
무죄한 자가 애굽으로 가서 감옥에 갇힌다. 계시록에서 애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고 나온다. 예루살렘 율법을 말한다. 무죄한 아들이 죄인이 되어 들어간다. / 그리고 애굽에서 살아 그 땅에서 양식을 가진 자로, 식량을 관장하는 유일한 존재로 그 아비 이스라엘을 살려내게 된다. / 야곱이 이스라엘이니까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반드시 그 씨를 갖고 있어야 한다. 표로, 보증으로 꼭 갖고 있어야 한다. 그냥 껍데기, 표가 아니라 내용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게 나를 살리는 씨, 나를 살리는 아들이다.
그 아들은 그리스도의 영, 즉 진리의 말씀이다. 영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반드시 그 영을 담는 그릇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진리를 담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영을 담는 그릇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였다. 지난번 설명에서 유다는 반드시 도장과 지팡이를 표로, 보증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유다가 다말이고, 다말이 유다이니까 중요한 건 그 표이다. / 그 표는 자칼이고 자칼이라는 단어 자체도 표이다. 자칼은 네케바라는 그릇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 자칼은 ‘남자가 되다, 아들을 만들다, 아들이 되게 하다’라는 뜻도 있다. / 그 표가 여자 안으로 들어가면 그 여자가 아들이 된다. 이게 구원의 메카니즘이다. 그것을 [‘하 아담’, 사람]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데 자칼과 네케바로 만들었고 그것을 사람(‘하 아담’)이라고 한다. 사람은 땅에서 나온다. 이것을 문자로 풀어 보면 땅, 아다마(אֲדָמָה)에서 (ה)를 지우면 ‘아담(אֲדָמ)이다. 그리하여 문자의 의미는 하나님(א)이 구별하신(ד) 진리를(ם) 말하는 것(ה)이다. 그것을 성경은 땅이라고 번역했다. 하나님이 땅에서 사람(‘하 아담’),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 보충설명: 성경은 우리가 흙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 흙은 땅(‘하 아다마’)에서 나온다. 이 ‘하 아다마’에서 [‘아담, 사람’]이 나온다. / 그런데 왜 다 아담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피로(담=하나님의 ‘피’) 생겨난 것이라서 다 ‘아담’이고, 그건 하나님이 구별하신 진리이다. 우린 다 진리이다.
아담(אדם)은 하나님(א)이 구별하신(ד) 진리(ם)인데 그렇다면 아담만 되면 다인가? 모든 인간이 다 아담이다. /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말씀을 담아 창조하셨고 그 어떤 것도 말씀으로 창조하지 않은 것이 없다. / 모든 것은 말씀을 담고 있고 그래서 모든 것은 진리이다. / 그걸 모르고 말하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한다. 진리로 보지 못하는 것일 뿐, 모든 인간은 진리를 담고, 말하고, 먹고 살아간다. 하나님이 다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א)이 구별하신(ד) 진리(ם)를 제대로 깨닫고 그 안에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 ‘하(ה) 아담(אדם)’이다. 그냥 ‘아담(אדם)’은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도 포함된다. / 성경에서 “그 사람에 그 아들”, ‘하(ה) 아담(אדם) 하(ה) 벤(בֶּן־)’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신약 성경에서도 “그 사람에 그 아들”(‘휘오스 호 안드로포스, ὺἱος ὸ ανθρωπος’)이라고 한다. 항상 관사를 붙인다. => ‘그 진리를 가진 사람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 내가 진리를 설명했는데 그 설명을 들은 어떤 이가 그 진리를 가지게 되면 그 사람도 아들(하 아담)이 된다. 아담의 아들은 셋이 되고 셋의 아들은 노아, 노아의 아들은 셈 …. 그렇게 아들을 낳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므로 인자이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참고자료〉
‘하(ה) 아담(אדם)’과 ‘아담(אדם)’ (산상수훈48. 너희가 바로 보물이다 말씀 중)
• 아다마(אֲדָמָה H128/ 땅) + 아파르(עָפָר H6083/ 티끌, 먼지)
→ 아담(אדם H120/사람)
“땅에서 먼지(티끌)들을 모아 물을 섞어 반죽한 다음에 사람을 만들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굉장히 성경적이다.
‘아담’을 파자하면,
• דם(담 H1818/ 피, blood) + א(알레프/하나님)
→ אדם(아담) = 하나님의 피로 만들어진 존재
아다마(אֲדָמָה H128/땅)에서 아파르(עָפָר H6083/티끌, 먼지)가 나오고 아파르(עָפָר/티끌, 먼지)에서 아담(אדם/사람)이 나온다.
아다마(אֲדָמָה H128/ 땅)를 파자하면,
• א(하나님께서) + ד(분석, 구별하신) + ם(그 진리를) + ה(말, 소리로 주
면) → 아다마(אֲדָמָה/땅)이다.
그 말씀에 의해서 아파르(עָפָר)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율법이다. 나중에 “너희들에게 비가 내리는데 그 비가 티끌이나 모래로 내리면 다 죽는다”라는 말에 나오는 그 티끌이 ‘아파르’이다. 비가 티끌로, 모래로 내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아다마(אֲדָמָה, H128/땅) : 진리가 [아파르(עָפָר H6083/티끌, 먼지)=율법]로 주어지는데 그것을 진리로 깨달으면 그것이 아담(אדם/사람)이라는 존재이다. 창세기에 보면 관사 하(ה)가 붙으면 아다마(אֲדָמָה 땅)가 된다. 그것이 우리를 말한다. 그래서 ‘아다마’에서 ‘인자’라는 개념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후손이 나오는데, 아담의 아들 … 또 그 아담의 아들 … -> 그 사람의 그 아들을 ‘인자’라고 한다.
그래서 아다마(אֲדָמָה)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아파르(עָפָר)를 먼지, 티끌로 받으면 아담(אדם)이 되기는 한다. -> 붉은 아담(죄)=성전의 아담이 된다. 그러나 아파르(עָפָר/먼지, 티끌)를 진리로 깨달으면 ‘하(ה) 아담(אדם)’이 된다. 그래서 ‘하(ה) 아담(אדם)’이라는 관사가 붙은 사람과 ‘아담(אדם)’이라는 그냥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내용을 숙지하고 있으면 성경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 아담’ = 진리를 깨달은 사람)
그 진리를 설명하는 것은 이 땅에 시체로 올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래의 것으로(말, 소리, 형태) 펼쳐서 보여주신다. 그것을 아파르(עָפָר / 먼지, 티끌)라고 한다. / 눈에 보이는 것, 성전으로(ע) 말하기(ָפָ) 시작하는(ָר)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전, 율법, 예수, 세상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러한 것들은 진리를 가진 ‘하(ה) 아담(אדם)’을 만들기 위함이다. /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파르(עָפָר)이다. 이것을 눈에 보이는 것, 표적으로만 보면 ‘티끌, 모래’이다. 성경에 나온 “내가 너희들에게 비를 티끌, 모래로 내릴 거야. 내가 너희를 바다의 모래로 만들어 버릴 거야”에서 쓰인 단어가 아파르(עָפָר)이다.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시려고 “땅에서 티끌을 모아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하신다. / 우리는 그걸 내용으로 알아야 한다. “땅에서 먼지(티끌)를 모아 물을 섞어 반죽한 다음에 사람을 만들었구나” -> 이렇게 알아들으면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 하지 말아야 한다.
(주: ‘참고 자료’의 앞 부분에 나오는 아담에 대한 설명에서는 “땅에서 먼지(티끌)를 모아 물을 섞어 반죽한 다음에 사람을 만들었구나”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성경적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하여 앞뒤가 모순되는 얘기로 보인다. / 그런데 중간에 “[하(ה) 아담(אדם)]이라는 관사가 붙은 사람과 [아담(אדם)]이라는 그냥 (‘아담,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라는 설명이 있다. 그리고 “진리로 깨달으면 [하(ה) 아담(אדם)]이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렇게 알아들으면 성경적이지 않다”라고 한 것은 진리를 깨달은 [‘하 아담’]에 대한 얘기로 보인다. 그냥 티끌을 물로 반죽해서 만들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은 아담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