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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로 넘어오면서 세계 바둑계는 한국과 중국의 각축장이 되어 있는 현실이지만, ‘현대바둑’ 중흥의 중심에는 일본이 있었다. 나아가 ‘세계 바둑계’라는 말, 또는 ‘바둑의 세계화’라는 술어 뒤에는 일본 바둑이 있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바둑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 일본에서 당시 전국(戰國)의 패자들의 애호를 받으면서 제도권 안에 들어왔다. 이후 바둑은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400년을 흘러오면서 바둑 4대 가문-혼인보(本因坊), 이노우에(井上), 야스이(安井), 하야시(林)-이 합종연횡으로 연출했던 치열한 쟁패사를 통해 ‘기예 문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일본 바둑계에는 현재 기성(棋聖, 기세이), 명인(名人, 메이진), 본인방(本因坊, 혼인보), 왕좌(王座, 오자), 천원(天元, 덴켄), 기성(碁聖, 고세이), 십단(十段, 쥬단)의 7대 타이틀이 있다. ‘棋’와 ‘碁’는 우리 훈독으로는 똑같이 ‘바둑 기’지만, 일본 발음으로는 棋는 ‘기’, 碁는 ‘고’다. 우리는 ‘큰 기성’ ‘작은 기성’으로 구별해 부른다.
7대 타이틀은 전부 신문기전이다. 요미우리(讀賣, 기성전), 아사히(朝日, 명인전), 마이니치(每日, 본인방전),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왕좌전), 신문3사연합(천원전), 신문바둑연맹(작은 기성전), 산케이(産經, 십단전) 등인데, 신문사와 일본기원과 관서기원이 기전을 공동 주최하고 기보는 신문에 실린다.
7대 타이틀은 또 서열이 있다. 기성이 1등이고 십단이 7등이다. 그래서 똑같이 타이틀 갖고 있더라도 상위 타이틀을 갖고 있는 사람이 프로기사 서열에서 앞선다. 예전에는 기성, 명인, 본인방, 십단, 천원, 왕좌, 기성(고세이)이 1~7위였는데, 얼마 전에 순위가 바뀌었다. 왕좌와 천원이 4, 5위가 되고 십단이 7위로 밀렸다. 프로 바둑의 세계대회가 생기기 전까지, 일본의 7대 기전은 바둑의 메이저리그였다. ‘꿈과 권위의 기연(棋宴)’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한국과 중국에도 기단(棋壇, 바둑계)이 형성되었다. 일본의 예를 본뜬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 바둑은 무시했지만 중국 바둑은 무시하지 않았다. 늘 뭔가 도우려 했고 가르쳐 주고 싶어 했다. 일본과 중국은 이미 1960년대 초반에 대규모 바둑 사절단을 보내고 맞았다. 교류전의 성적은 물론 일본이 앞섰으나 차이는 점점 좁혀졌다.
일본은 1985년에 ‘일·중 슈퍼대항전’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각각 7~9명의 고수가 출전해 맞붙는 단체전인데, 양쪽에서 7명이나 9명이 동시에 나와 두는 것이 아니라 1 대 1로 두면서 이긴 사람은 상대 팀의 다음 선수와, 질 때까지 계속 두는 것이다. 참신한 방식이어서 당시도 호응이 좋았다. 요즘은 남자 대회 ‘농심배’나 여자 대회 ‘황룡사쌍등배’ 같은 한-중-일 단체전이 모두 이런 식이다.
일·중 슈퍼대항전 역시 중국 바둑에 대한 일본의 시혜(施惠) 성격이 강했던 이벤트였으나 한편으로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의 중국 시장 진출을 고려한 문화적 접근이었다는 시각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녜웨이핑(聶衛平, 63) 9단을 위한 대회가 되고 말았다.
제1회 때 중국은 녜웨이핑 9단 혼자 남은 상황에서 일본은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63) 9단, 가토 마사오(加藤正夫, 1947-2004) 9단,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1925-2009) 9단, 세 사람이 남아 있었다. 녜웨이핑도 그 무렵에는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나 지명도에서 이 세 사람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승부는 겨루어 보아야 아는 것이지만, 실력으로도 녜웨이핑이 이들보다 위일 수는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그러나 녜웨이핑은 세 사람을 모두 물리치고 중국에 우승을 안겼다.
제2회도 중국은 녜웨이핑 한 사람이 남았고, 일본은 다섯 명이 버티고 있었다. 이번에도 녜웨이핑은 혼자서 다섯 명을 다 꺾었다. 8연승이었다. 제3회는 1 대 1 대결에서 이겼다. 녜웨이핑의 9연승으로 중국은 대회 창설부터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녜웨이핑에게는 ‘철의 수문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녜웨이핑의 가공할 연승 행진은 4회 2연승, 총 11연승에서 끝나고 우승컵도 처음으로 일본에 넘어갔다.
1988년 대만의 재벌 잉창치(應昌期, 1917~1997) 회장이 총예산 약 100만 달러, 우승 상금 40만 달러를 걸고 4년마다 ‘바둑 올림픽’, ‘응창기(잉창치, 중국-대만 주최 대회 이름은 한자를 우리 식으로 읽는다)배’ 세계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했다. 응창기배는 세계 바둑계를 흥분의 도가니가 몰아넣었다. 근-현대 바둑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일본은 깜짝 놀라 황급히 ‘후지쓰배’ 세계대회를 선보였고, 진행을 서둘러 응창기배보다 한 발 앞서 1회 대회를 치렀다.
잉창치 회장이 거금을 쾌척해 세계대회를 창설한 것은 이제는 해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자신감, 혹은 희망 섞인 기대감의 발로였고, 그 자신감 혹은 희망 섞인 기대감 뒤에는 녜웨이핑(聶衛平, 63) 9단이 있었다. 주최 측에서는 한-중-일-대만의 일류 기사 16명을 초청했다. 이들이 토너먼트를 벌였다.
초청장을 받은 16명은 ▲중국 : 녜웨이핑 9단, 마샤오춘(馬曉春, 51) 9단, 장주주(江鑄久, 53) 9단, 류샤오광(劉小光, 55) 9단 / ▲일본 : 조치훈(59) 9단, 후지사와 9단, 하시모토 쇼지(橋本昌二, 1935-2009) 9단, 가토 마사오 9단, 고바야시 고이치 9단,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64) 9단 / ▲대만 : 린하이펑(林海峰, 73) 9단, 왕리청(王立誠, 57, 당시 8단) 9단, 왕밍완(王銘琬, 54, 당시 7단) 9단 / ▲한국 : 조훈현(62) 9단 / ▲미국 : 마이클 레드먼드(52, 당시 5단) 9단 / ▲호주 : 우쑹성(吳淞生, 1945-2007) 9단이었다.
하지만 초청 대상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애매했다. 국가별이라면 조치훈은 한국 팀이어야 했다. 소속 기원별이라면 린하이펑, 왕리청, 왕밍완은 일본 팀이어야 했다. 마이클 레드먼드와 우쑹성은 일류 기사 대열에 낄 처지는 아니었지만, 마이클은 미국인이었고, 우쑹성은 그 무렵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사실은 중국-일본의 바둑잔치인데, 세계대회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으니 주최 측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모양은 만들고자 머리를 썼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 대한 푸대접이었다.
제1회 대회 준결승(4강)은 조훈현-린하이펑, 후지사와-녜웨이핑의 대결이었다. 한-중-일-대만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여기서 조훈현과 녜웨이핑이 결승에 올라갔고, 조훈현이 3 대 2로 녜웨이핑을 꺾고 우승했다.
응창기배는 한국을 무시했지만 한국 바둑은 응창기배를 통해 바둑의 변방에서 중원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조훈현과 녜웨이핑은 한 세기 동안 변하지 않았던 현대 바둑의 지형을 새로 그렸다. 100년 동안 부동이었던 세계 바둑계의 판도가 단 두 사람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계대회 원년 챔피언은 응창기배보다 먼저 끝난 후지쓰배에서 우승한 다케미야였지만, 응창기배와 후지쓰배는 격이 달랐다.
세계대회가 생기면서 일본의 7대 기전은 졸지에 일본 국내기전으로 위상이 낮아지는 것 같았지만, 의연했고, 지금도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하다.
조훈현이 응창기배에서 우승하기 전, 거슬러 올라가 녜웨이핑이 일-중 슈퍼대항전을 석권하기 전인 1980년대 초반이 말하자면 일본 바둑이 메이저리그의 영광을 누린 마지막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조치훈이 있었다.
조치훈, 운명적인 사람이다. 운명 같은 사람이다. 여섯 살에 일본에 건너가 열한 살 때 프로가 되었고, 스물넷에 일본 바둑 정상의 한 봉우리 ‘명인’을 정복했으며 스물일곱에 일본 바둑계를 천하통일했다. 메이저리그의 영광을 가장 화려하게, 가장 마지막으로 누린 사람이 조치훈이었다. 조치훈 이후 메이저리그의 영광은 더 이상 없었다.
조치훈은 한국 바둑의 견인차이기도 했다. 조남철(1923-2006) 선생과 조 선생의 뒤를 이은 김인(72) 9단 이후 한국 바둑이 다시금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치훈 덕분이었다. 1975년 조치훈은 제22기 일본기원선수권전에서 도전자가 되었다. 타이틀 보유자는 전설의 승부사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1920-2010) 9단이었다. 바둑을 아는 사람, 바둑을 모르는 사람, 모두의 관심과 성원은 폭발적이었다. 조치훈은 2 대 0으로 앞서가다가 세 판을 내리 져 좌절했다. 그 실루엣이 비극의 영웅이었다.
그로부터 5년 후 조치훈은 서열 2위 ‘명인’에 올랐고, 이듬해 서열 3위 ‘본인방’, 그 이듬해 서열 4위 ‘십단’을 접수했다. 그리고 1983년 벽두 마침내 서열 1위 기성전의 도전권을 들고 후지사와 6년 아성의 문을 두드렸다.
후지사와 슈코는 ‘괴물’이었다. 젊었을 때는 사카다와 다투었다. 모두들 사카다를 두려워하던 시절에 후지사와는 사카다를 인정하지 않았다. 타이틀 획득은 통산 24회로 여느 기사보다는 월등한 것이지만, 사카다의 64회에는 한참 떨어지는 것이었다. 대신 24회 중에는 ‘제1기 우승’이 여섯 개나 있어 사람들은 “새 것은 슈코의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또 여섯 개 중에는 연도순으로 ‘명인(구 명인전)’, ‘천원’, ‘기성’이 있었다. 슈코 바둑 인생은 50대에 들어서 ‘기성전’에서 폭죽처럼 만개했다.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장엄한 승부의 파노라마였다.
1977년 제1기 기성전 결승에서 52세의 후지사와는 70세의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 1907-1994) 9단을 4 대 1로 꺾고 초대 기성에 올랐다. 그리고 82년 제6기까지 거침없이 달려갔다. 가토,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67), 린하이펑,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 73) 9단 등이 6연패의 제물이 되었다. 린하이펑은 80년과 82년, 두 번 도전했으나 1승 4패, 3승 4패로 물러났다.
매년 도전기가 시작되면 전전(戰前) 예상은 도전자의 압도적 우세였다. 슈코는 석양이 머지않은, 나이 쉰이 넘은 늙은 호랑이였고, 도전자들은 그 시절 제각각 한낮의 태양과 같은 기세여서 그랬던 것인데, 슈코는 “나는 1년에 네 판만 이기면 된다”고 어록을 남기며 전장에 나가 젊은 도전자를 맞았고, 싸우면 이겼다.
83년 1월, 제7기 기성전 도전7번기 제1국이 도쿄 북쪽 도치기(栃木)현 닛코(日光)시에서 막을 올렸다. 닛코는 빼어난 경승지이자 조치훈이 어린 시절, 예상보다 입단이 늦어지고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지자, “이번에도 안 되면…” 자살의 장소로 생각했던 닛코의 폭포가 있는 곳이었다. 전야제에서 임전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슈코는 호탕하게 웃으며 “네 판만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고, 조치훈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세 판만 배우고 싶다”고 응수했다.
전야제 이전에도 두 사람은 한 차례 공방이 있었다. 2년 전인 1981년 조치훈은 가토와 명인전 도전기를 치렀다. 조치훈이 타이틀 보유자였고 가토가 도전자였다. 조치훈이 4 대 0으로 도전자를 일축했다. 그때 그걸 보고 슈코가 말했다. “왜들 이렇게 약하지? 치훈 군이 그렇게 센가? 아무래도 내가 치훈 군에게 찾아가봐야겠네.” 명인전에서 도전자가 되어 조치훈과 한번 겨루어 보겠다는 뜻이었다. 조치훈이 대답했다. “아이고, 선배님을 오시게 할 수 있나요.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기성전 도전자가 될 테니 기다려 주십사 하는 말이었다. 조치훈이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1983년 1월 13~14일 도전 제1국. 당시 ‘기성’ ‘명인’ ‘본인방’ 3대 타이틀 도전7번기는 제한시간이 각자 9시간, 이틀걸이 바둑이었다. 슈코가 이겼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26~27일 제2국, 또 슈코가 이겼다. 탄성이 터졌다.
<장면 1>이 제2국의 초반 모습이다. 조치훈이 흑이다. 흑1·3의 대각선 화점. 조치훈은 1국을 지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웅장한 구도, 화려한 전투로 압도하겠다는 의지가 선연히 읽혔다. 백16까지는 당시 흔히 보던 진행이다. 수순 중 상변 백14는 임기응변. 보통은 백A로 한 칸 뛰는 것인데, 후수다. 흑은 좌변 B 부근에서 백6을 협공하면서 국면의 주도권을 장악해 갈 것이다. 백14는 흑15를 유도해 선수를 잡고 좌변 16으로 선행하겠다는 것.
우변 흑17은 상식적인 벌림. 흑은 대모양작전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한 백18이 대국실과 검토실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이 모착(帽着)의 한 수야말로 ‘초반 50수까지는 천하제일’이라고 하는 슈코의 독보적 감각이라는 것, 선악을 떠나 이 장면에서 여기를 둘 사람은 슈코뿐이라는 것이었다.
2월 2~3일 제3국, 역시 슈코의 승리였다. 3 대 0. 사람들은 “슈코!”를 연호하며 열광했다. <장면 2>는 3국의 중반 모습. 조치훈이 백이다. 슈코의 흑1 마늘모 씌움이 3국의 하이라이트, 결정타가 되었다. 우변과 하변에 백의 미생마가 있다. 상변 백돌도 흑이 먼저 두면 공략의 여지가 있다. 흑1은 이렇게 세 곳을 동시에 노리는 점이었다. 조치훈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슈코의 7연패는 불문가지. 슈코의 신화는 계속되는 것 같았다.
16~17일 제4국, 조치훈이 이겨 막판을 넘겼다. <장면 3>은 4국의 중반이다. 조치훈이 흑이다. 우하 방면 백1의 날일자가 유장하다. 집은 흑이 많아 보이나 백은 전체적으로 엷은 곳이 없다. 두텁다. 백은 형세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천천히 두텁게 정비하면서 상대의 움직임을 보겠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변 흑돌은 박약하고, 중앙에 떠있는 흑돌도 언제 어떻게 공격을 당할지 불안하다.
그러나 백1은 만심의 한 수였다는 지적을 받았다. 흑2, 제자리걸음 같았지만, 여기를 이렇게 지킨 것이 사려 깊은 수였다. 흑은 엷음의 절반을 커버했고, 백은 공격 기회의 절반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여기가 7번기 흐름의 변곡점이 되었다. 이 바둑을 건져 교두보를 구축한 조치훈은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대반격에 나섰다.
제5국, 조치훈이 2연승했다. 점입가경,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3월9~10일 제6국 역시 조치훈의 승리였다.
3월 16일, 제7국. 조치훈이 백을 들었다. 슈코는 <장면 4> 흑1·3에서 5로 벌렸다. 당시 중국 선수들이 시도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하던 ‘중국식’ 포진이다. 포석도 유행이 있고, 유행은 변하는 것인데, 중국식은 이후 중국의 득세와 함께 변주를 거듭하면서 지금도 유력한 포석 패턴의 하나로 꾸준히 연구·시도되고 있다. 귀를 굳히지 않고, 그냥 변으로 벌려간다는 것은 연구 가치가 있는 커다란 발상의 전환이었기 때문이다.
백2·4는 조치훈이 한때 애용했고, 조치훈 전에는 사카다의 전매특허였던 양3·3이다. 사카다는 양3·3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燦燦’을 휘호하곤 했다. ‘燦燦(찬찬)’은 일본 발음으로 ‘산산’, 3·3도 일본 발음으로 ‘산·산’이다. 사카다는 ‘나의 빛나는 3·3’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면 5>는 <장면 4>에서 수수가 많이 진행된 모습. 우하귀 접전이 끝나면서 백1로, 축으로 몰고 흑은 좌상귀에서 축머리를 활용해 10까지 벽을 하나 만들었다. 그 벽을 향해 조치훈은 백11로 달려갔다. 검토실은 백11을 찬성하지 않았다. “백11은 ‘적이 강한 곳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기리(棋理)에 어긋나는 수였다. 우하귀 접전의 결과는 백이 좋아 보인다. 백11 대신 A쯤으로 천천히 갔으면 백이 유망한 국세였는데, 백11로 형세를 그르치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종반에 이르자 흑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서열 1위와 서열 2위의 대결. 3연승 후 3연패, 그래서 단판 승부. 그리고 슈코의 승리. 더 이상의 드라마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드라마가 있었다. 슈코가 끝내기에서 실수를 연발했다. 쉽게 받으면 될 자리에서 반발해 손해를 보았고, 가일수(加一手)할 필요가 없는 곳을 지켰다. 결과는 조치훈의 1집반 역전승이었다.
운명의 착종(錯綜)처럼 패자교대(覇者交代)가 이루어지는 순간, 후지사와 9단이 입에 물수건을 물고 망연한 눈길로 바둑판을 응시하는 모습, 허공을 응시하던 조치훈 9단의 모습, 비극적 두 영웅의 실루엣이 아직도 선연하다. 조치훈은 마침내 ‘기성’ ‘명인’ ‘본인방’, 바둑 타이틀의 ‘빅3-대삼관(大三冠)’을 동시 장악하는 것으로 일본 바둑계를 천하통일했다.
<장면 5>의 백11은 의문수였다. 그러나 조치훈의 기합, 기세가 실린 수였다. 기합과 기세, 승부의 흐름, 그런 것들은 이론과 선악을 초월하는 것이다. 조치훈은 이론으로 이긴 것이 아니었다. 기세로 이겼다. 그 기세를 받쳐 준 것이 시대의 흐름이었다.
“도전자가 되었을 때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도무지 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명인’ ‘본인방’의 바둑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게 바로 심리적 자충이었다. 심리적 자충은 3연패로 이어졌다. 그러자 비로소 자세가 낮아졌다. 이제는 타이틀은커녕 영패만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1승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영패의 수모만은 면하고 싶었다. 마음이 비워지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대각선 화점 따위는 버리고 양3·3 같은 것을 들고나오면서 1승을 구애했다.”
조치훈이 훗날 들려준 말이다.
조치훈은 1986년 벽두에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의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 9단에게 ‘기성’과 서열1위를 넘겨준다. 그때 전 세계 바둑팬들은 휠체어에 앉아 바둑을 두는 조치훈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조치훈은 다시 일어나 87년에는 제13기 ‘천원’을 쟁취함으로써 일본 바둑사상 최초로 7대 타이틀을 전부 한 번 이상 차지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그때의 상대가 바로 고바야시였다.
조치훈은 또 89년에 제44기 ‘본인방’을 다시 차지했고, 이후 98년 제53기까지 무려 10년을 지켜냄으로써 ‘제25세 본인방 치훈’이 되었다. 본인방 가문이 ‘본인방’이라는 가문의 이름을 타이틀 이름으로 기증하기 전, 그러니까 4대 가문이 각축하던 시절이었을 때 본인방 가문의 장문인은, 불교에서 ‘제 몇 대 종종 아무개’ 하는 식으로 ‘제00세 본인방 아무개’로 불렸다. 마지막 장문인이 바로 제21세 본인방 슈사이(秀哉)였다. 슈사이 전에는 슈보(秀甫), 슈에이(秀榮), 슈와(秀和) 그리고 일본 바둑사 3대 기성1)의 한 사람으로 추앙 받는 슈사쿠(秀策)가 있었다.
본인방 가문의 마지막 돌림자가 ‘슈(秀)’여서 1952년 제7기부터 1960년 15기까지 본인방을 9연패했던 다카가와 가쿠(高川 格) 9단은 ‘제22세 본인방 슈가쿠(秀格)’, 61년 16기 때 다카가와로부터 본인방을 빼앗아 67년까지 7연패했던 사카다는 ‘슈에이’였으나 선대에 이미 슈에이가 있어 ‘제23세 본인방 에이슈(榮壽)’, 71년 26기부터 75년까지 5연패했던 이시다는 ‘제24세 본인방 슈보우(秀芳)’로 불렸다. 조치훈도 그를 따르자면 ‘슈(秀)’를 넣어야 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조치훈은 1996년에는 다시 한 번 대삼관을 달성했다. 두 번째 천하통일이었다.
세계대회가 빈발할 때 조치훈은 이미 전성기를 지나던 때여서 세계 타이틀과는 큰 인연이 없었지만, 그래도 2003년 제8회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했다. 타이틀 획득 통산 73회, 역대 1위다. 요즘은 머리와 수염을 길러 도인의 풍모로 유유자적하고 있다. 후지사와는 1991년 66세 때 제39기 ‘왕좌’를 차지해 사상 최고령 타이틀 획득 신기록을 세웠고 이듬해 타이틀을 방어해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
한국 바둑 중흥과 도약의 일등공신은 누구일까. 그런 걸 따지는 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편협한 일이다. 공신이 어디 한 둘일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조치훈이다. 비극적 영웅의 실루엣, 그 주인공 조치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