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역사 통일=플러스코리아]안재세 전문위원= 세세동점 이후의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 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 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 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自蔑史觀)을 떨쳐버리고, 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더 많은 연구와 보충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골격 정비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10. 한민족 사회 삼국정립의 파국
연개소문이 보장황제를 옹립하기 일년 전에 백제의 제위에 오른 의자제는 매우 총명한 제왕으로서, 어릴 적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타고 난 효자였는데, 그 지극한 효심이 오히려 백제의 운명을 재촉하는 화근이 되고 말았다. 의자제가 젊은 나이로 등극하게 되자 이를 얕본 신라는 백제 무제의 압박을 받고 있었던 설움을 한꺼번에 설욕할 작정으로 각 전선에서 백제를 공격해 들어 왔다. 그러나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영웅의 자질이 번쩍이던 의자제는 신라의 공격군을 손수 맞아서 용감하게 물리쳤다. 백제의 군사들은 사기에 불타서 오히려 침략해 온 신라군을 쫓아가 신라의 변방에 위치한 중요한 성들을 더 빼앗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거에 40여개의 성을 점령하고 개선한 의자제는 어머니이기도 한 신라왕족 출신의 대비(백제무제의 황비인 선화공주)에게 오히려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효성이 지극한 의자제는 더 이상 신라를 공략하기를 단념하고 자포자기에 빠져서, 세상일을 잊은 듯이 주색잡기에 놀아났다. 대비는 이를 말리기는 커녕 부추기는 한편, 여러 곳에다가 아무 쓸 데 없는 큰 사찰들을 건축하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백제의 국가 재정은 날로 줄어들고 백성들은 중세와 악정으로 인하여 극도로 피폐해지기에 이르렀다. 신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력을 기울여 백제의 변방을 공격해 들어 왔는데, 의자제는 그러한 위급한 보고를 받아도 어머니의 진노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모른 척했고, 단지 전선의 장군들이 알아서 잘 막아줄 것만 기대하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백제의 대장군이자 의자제의 죽마지우였던 계백장군은 백제의 꺼져가는 운명을 안타까와 하여, 대장군 직책을 버리고 사의를 표명한 후 절간에 들어가서 삭발을 하고 무술을 연마하면서 의자제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구국의 결사대를 만드는 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동족의 의리로써 가끔 구해주기도 하고, 그 사직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주기도 했던 신라가 이제는 자신의 야욕을 위하여 두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벼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계백장군의 휘하에는 수천명의 결사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태종왕이 안시성에서의 부상으로 인하여 죽고 나서 그 뒤를 이은 당고종왕은 우선 백제를 도모하기로 하고, 신라와 비밀리에 협공을 위한 계략을 꾸민 후 드디어 백제공략에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친 소정방의 수십만 대군과 신라의 대군세는 노도와 같이 백제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 즈음 백제에서는 충신 흥수와 성충이 간신배들에게 몰려서 분사하고, 의자제는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지극한 효심만을 지키고 있는 등 국가방위에 큰 약점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계백장군이 지키던 방어선과 백마강의 저지선이 마침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2993년,서660).
백제의 멸망은 너무나 빨리 닥쳤으므로 연개소문이 원조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의자제와 황태자는 소정방에게 짐승같은 대우를 당하는 굴욕을 받고, 결국 수많은 포로들과 함께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까지 개처럼 끌려간 끝에 홧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의 소유였던 지나지방 남동해안의 곡창지대도 당나라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으며, 백제의 백성들은 날강도떼들이나 다름없는 야만적인 당나라의 침략군에 의한 대노략질앞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건국이래 칠백여년간 소중하게 가꾸고 지켜온 모든 것을 파괴당하고, 빼앗기고, 가족들끼리조차 생이별을 당하고, 각 지역으로 노예로 팔려 가고, 반항하면 즉시 잔인하게 처형당하는 등,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는 노략질에 아무런 방비없이 내던져졌던 것이다.
한편 왜열도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백제의 태자 풍(豊)은 나·당연합군에게 백제가 침공당했다는 급보를 받고 구원군을 보내었으나, 이들은 백강(白江, 또는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패하여 많은 왜족 군사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백제의 망국은 필연적으로 기정사실화 되었으니, 나·당의 야만적 노략질에 백제는 온통 분탕질 당하였고, 이에 분노한 뜻있는 백제의 유장·유민들에 의하여 대대적인 복국운동이 일어났다. 복국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황족인 의자제의 삼촌 부여복신(扶餘福信)이었다. 임존성의 성주로서 간신들의 모함에 걸려 한가로이 지내고 있으면서 백제의 앞날을 걱정하던 그는, 백제민중의 큰 호응을 얻어서 삽시간에 많은 의병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부여복신의 군사가 이르는 곳마다 나·당연합군은 맥을 못 추고 패주하였다.
또한 남쪽(전라도 지방)에서도 유능한 장수인 흑치상지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서 승승장구하였으므로 나·당연합군은 매우 곤경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문명국가를 되찾으려는 이러한 의로운 복국운동 진영 내에 끼어 들어온 간신과 매국노들이 설쳐대서, 복국 한 발자욱 앞에서 반역자로 모함당한 부여복신은 용렬한 군주 부여풍에 의해 참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절망을 느낀 흑치상지가 당나라침략군에게 투항함으로써, 백제의 복국운동은 마침내 수포로 돌아가고, 동아시아의 지도상에서는 고주몽 성제의 둘째 아들 온조가 세운 문명국 백제의 이름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이 때 당군에 투항한 흑치상지는 나중에 당나라의 대장군이 되어서 돌궐과 토번을 평정하는 위업을 당나라에 안겨 준 유능한 장군이었는데, 이로써 보건대 백제가 복국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요, 또한 백제가 유능한 여러 장수들과 충신들만 제대로 이용했다면 얼마든지 나·당연합군을 깨쳐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복국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고구려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이렇듯이 허망하게 백제의 칠백여년 사직이 무너지자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몹시도 애통해 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초강대국이던 고구려 자신이 백제멸망의 전철을 거의 비슷하게 밟아 가게 되었다.
백제가 함락된 지 6년만에(즉 단기 2999년, 서666)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이에 따라서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서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세 형제간에 세력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맏형인 남생은 권좌에서 밀려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나라의 힘을 빌어서라도 고구려의 권좌를 탈취하려는 한심한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내분을 놓칠 리가 없는 나·당연합군은 서쪽과 남쪽에서 전 전선을 통하여 대공격을 감행하였으며, 마침내는 항쟁의 보람도 없이 고구려의 도읍 흘한성이 무너지고 말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고구려는 연개소문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이적과 설인귀 등의 당나라 오랑캐들과 동족을 배반한 신라병들에 의한 고구려 약탈이 이·삼십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때의 대분탕질에 의하여 단군조선으로부터 전해져 오던 천국(天國)의 맥은 일시에 종말을 고하고, 유구한 역사 속에 간직해 오던 수많은 보물들과 역사서적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보장황제이하 약 이십만명에 달하는 고구려의 장수들과 황족 및 귀족들은 당나라 도읍인 장안으로 끌려가거나, 혹은 더욱 변방인 서쪽 신강성지역으로, 혹은 장성이북지역으로 산산히 흩어져 노예생활을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나라오랑캐들은 고구려 지역에 안동도호부, 백제지역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마음껏 약탈과 살인·노예매매 등을 자행하였는데, 백제와 고구려를 뿌리까지 노략질한 당나라의 더러운 범죄행위가 이윽고 신라에까지 미칠 듯 하자, 그제서야 김유신 등이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을 전개하여 남만주 일대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고구려의 유민인 고 선지(高仙芝)는 어린 나이로 아버지인 고사계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 노예로 끌려가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당나라 현종왕에게 인정받은 후 안서도호부의 대장군으로서 서쪽에서 발흥하던 사라센세력의 팽창을 막아내고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한 바 있었다. 고 선지장군은 더욱 나아가서 당나라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전초기지인 이란 동북부(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기로 하여, 당나라의 대군단을 이끌고 해발 만여척(3,000-4,000여 미터)의 힌두쿠시산맥을 넘어서 원정을 감행했다. 이 쾌거는 세계전쟁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은 대담한 기질을 가진 고구려인들이기에 세계를 인도해 가는 대문화국으로서, 칠백년 이상 아시아의 패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는 그러한 고 선지장군을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하다가, 고 선지장군의 인망과 위세가 날로 성장하게 되자 마치 한고조왕이 한신장군을 제거했듯이 반란죄를 뒤집어 씌워서 처형했다. 당나라는 이로 인하여 고 선지장군의 위세에 눌려서 꼼짝도 못하고 있던 돌궐출신의 안록산이 꾸미고 있던 반란을 초기에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결국 현종왕과 양귀비는 안록산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한편, 백제의 복국운동이 수포로 돌아간 후에 백제의 많은 유신들과 백성들이 나·당연합군의 횡포와 노략질을 피하여 많은 배에 나누어 타고서 식민지의 일부였던 왜열도의 중앙부로 피난가게 되었다. 백제에서 파견되어 왜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여러 황족들은 그런 유신들 중에서 유능한 관리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로써 왜열도에서는 백제의 잃어버린 역사가 나라 이름만을 일본으로 바꾼 채 명맥이 이어져가게 되었다.
* 참고 ; 의자제 및 백제말엽에 관한 기록 몇가지
1)'事親孝 與兄弟友 時號海東曾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있었으니 그 때 해동증자로 불리웠다)
- 삼국사 및 신당서 백제전(新唐書 百濟傳) -
2)성제(聖帝)때 신라에 탈취당한 금산-전주까지를 88년만에 탈환하고, 추풍령을 넘어 김천-고령 등지까지 점령함.
3)의자제 무렵의 지나내 백제세력
(1)당태종의 고구려침공시(2977년,서644:의자제 4년)의 기록;
'帝 將討遼東 擇主餉運者...帝悅曰 自幽距遼二千里 無州縣'
즉, 유주-요동간 2,000리에 당의 영토가 전혀 없었다는 뜻임.
(2)삼국사의 기록;
'(唐)太宗‥冊命爲 柱國帶方郡王百濟王‥'
즉, 이 당시까지 백제는 대방군을 영유하고 있었음.
* 문정창씨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일본서기상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백제의 멸망과 관계있음.
"百濟自亡.由君大夫人妖女之無道.擅奪國 .誅殺賢良.故召斯禍矣." -齊明 6년-
즉, 의자제의 大夫人(母)인 武王의 妃 善花公主 (의자제 즉위시 약 80세, 백제 멸망 당시 약 110세)가 백제를 파멸로 몰고간 것임. 삼국사 의자 19년 3월 기록에는 선화공주가 이미 백발이 된 노파였던 기록을, "一白狐, 坐上佐平書案."이라고 하여 '흰여우'라는 은유를 사용. 즉, 의자제가 신라에 승리하고 개선하는 일이 몇 번 반복되는 동안에 마침내 선화공주는 '백제가 신라를 더 이상 공격한다면 모자의 의리를 끊겠다'는 극한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임.
* 안동도호부 *
멸망 당시의 고구려 도읍인 장안성(또는 평양)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안동도호부는 8년 후인 3009년(서676) 2월에 요양으로 옮겨 갔고, 다시 대능하 하류의 고성(영주 동남쪽 270리)으로 쫓겨감.
* 만주원류고에 신라의 만주공략에 관한 다음의 두가지 기록이 있음.
① "吉林周以前爲肅愼地 漢以後屬邑樓靺鞨 唐初爲新羅地鷄林州" - 卷八 疆域, 吉林 -
② "唐時所稱鷄林應卽今吉林之訛 而新羅百濟諸國亦皆其附近之地 顧昔人無能考證者到明季 狂誕之尋摘字句 肆爲 毁 此桀犬之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