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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열매, 사람의 마음과 말
마태복음 12장 33-37절 / 33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장차 있을 일을 예언하셨었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1-4)
예수님에 의해서 인용되고 있는(마 12:17-21) 이 예언은 하나님이 보내실 하나님의 택한 종에 의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종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으로 모든 병자를 고치시고 이적을 베풀어 능력을 행하셨습니다(마 12:15-17). 이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억압당한 자들을 풀어주고 죄의 비참함에서 건져주실 권세 있는 여호와의 종의 메시야 사역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것임을 계시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이야기를 듣고는 예수님이 그처럼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베푸시는 능력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인 까닭이라며 예수님을 조롱하여 멸시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을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에서 성령께서 능력을 행사하시고 계시는 것인데, 이러한 성령을 모독하는 말에 있음으로써 성령을 거스르는 말을 하는 사람이기에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 결코 사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같이 악한 인간들이 어떻게 선하고 참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인간의 말은 그 마음에서 나온다. 선한 말은 선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악한 말은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 날에는 너희가 내뱉은 터무니없는 말에 대해서 낱낱이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한 말에 따라서 너희는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하고 죄인으로 판결 받게도 될 것이다.'”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인가요? 바리새인의 입에서 나오는 예수님을 조롱하여 멸시하는, 그렇게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에 있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그러한 말을 나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나무와 그 나무의 열매를 가지고 비유를 들어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나무가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있고 나쁜 나무가 있습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며,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립니다. 가령 사람이 사과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보면, “이 사과, 참 크고 튼실하다.”고 말하잖아요. 사과 열매가 좋다는 것은 그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가 좋다는 것입니다. 사과나무가 좋기 때문에 좋은 사과 열매가 열립니다. 하지만 나무가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가 열릴 수가 없습니다. 사과나무가 너무 수령이 길어서 이제는 예전처럼 당도가 높고 크고 튼실한 열매를 맺지를 못한다면, 이제 그 사과나무는 예전만 못한 좋지 않은 나무, 곧 나쁜 나무가 된 것입니다. 또는 나무도 병도 드는데, 병든 나무, 벌레가 먹어서 썩은 나무가 되면 건강한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만 못한 좋지 못한 열매가 열립니다. 그러니 그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립니다. 따라서 나무가 좋은지 나쁜지를 아는 것은 그 나무에 열리는 열매를 보아서입니다. 해서 예수님은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나무와 열매를 비유로 해서 실은 예수님과 함께 하시며 능력을 행사하시는 -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베푸시는 것은 성령으로, 곧 성령의 능력으로 하시는 것이다 -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성령을 거스르는 바리새인의 악한 마음을 지적하며 책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귀신의 왕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이적을 베푸는 능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것으로 보지를 않고 한갓 귀신의 왕이 행하는 능력으로 몰아세우는 것이기에, 이는 성령을 모독하는 악한 죄에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성령을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은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열리는 것과 같으며, 이는 악한 마음에서 악한 말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는 법이므로, 좋은/선한 마음에서는 좋은/선한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여 따르는 마음에 있으며, 이러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것에 있으므로 그들의 마음에서는 예수님이 주이심을 고백하며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좋은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심이 없고,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악한 죄의 본성을 발휘하는 마음에 있는 바리새인에게서는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며, 그 악한 생각을 좇아 성령을 모독하는 악한 말을 하는 행동에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악의적인 계획에서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행해지고 있는 성령의 능력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흩어 예수님을 떠나게 하며 뒤따르지 못하게 하려는 악의적인 의도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입니다. 사람을 모독하는 죄나 다른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오직 단 하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함으로써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지닌 권능을 나타내시는 것을 반대하고 훼방하는 바리새인의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함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본문을 가지고 좋은 마음을 써서, 그래서 착한 마음, 의로운 마음을 쓰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며 좋은 마음에 있어서 좋은 열매를 맺는 축복을 받자는 식으로 설교하는 것을 봅니다. 한 예로, 어떤 분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마무리 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돌아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둥글고 원만하여 사람들에게 두루 기쁨을 주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생명의 기운을 북돋고, 평화의 기운을 만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불화를 만드는 사람입니까? 돌이켜 우리 마음을 주님께 이끌어 매십시오. 고쳐주시고 싸매주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서로의 부족함과 허물을 감싸 안는 품 넓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십시오. 상한 이들을 돌보고, 귀신을 내쫓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는 일을 망설이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이 두루 원만해져 세상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사랑의 사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래야겠다는 마음이 드는지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는지요. 그래요. 이러한 것이 필요하며, 할 수만 있으면 그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세상에 불화에 있게 하는 등의 해를 끼치는 말을 하는 것에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주시는 가르침은 우리에게 그러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성도들에게 좋은 마음, 착한 마음에 있을 것을 가르치시며, 그러한 마음에 있을 때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설교는 본문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러니 본의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이죠. 바리새인이 성령을 모독하는 악한 죄에 있는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으로서 악한 마음에 있는 바리새인이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며, 그들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니,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지만,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는 것에 따라서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죄에 있다며, 그러한 그들은 자신이 한 말에 따라서 죄인으로 심판 받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주가 되셔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게 해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까닭에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그 악한 생각을 좇는 악한 행동이 아닌 선한 생각과 그 선한 생각을 좇는 선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예수님이 성령으로 모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을 베푸시는 권능을 겪으며 본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흩어지게 합니다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고백에 있으면서 예수님에게로 모여들며, 예수님과 함께 모으는 일에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주가 되신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한 말과 선한 행동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들에게서 열리는 열매가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에게 있는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오늘의 우리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다르지 않은 같은 것입니다. 한 샘에서는 오직 한 가지 특성의 물이 있습니다. 물이 고여 있는 샘에서는 그 물이 썩어 있는 죽은 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도무지 생명이란 것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물이 계속해서 솟아나오는 샘에서는 그 물이 항상 신선하게 살아 있는 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항상 생명이 존재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이 역사하는 우리에게서는 항상 살아 있는 능력이 넘침에 있습니다. 이 능력은 날이 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욕망까지도 가르고 우리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게 합니다(히 4:12). 그래서 우리 육을 부정케 하고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함에 있게 합니다. 그러한 우리 말에서 갖게 되는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으며, 성령의 지배를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러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인 주님을 찬양함에 있는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에 있는 것입니다(엡 5:18-20). 또한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에 있는 흉패를 가슴에 붙이고 화평케 하시는 복음의 신을 싣고 악한 세력에 맞서 막아서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손에 쥐고 있으며, 성령께서 원하시는 선하심을 따라서 하나님께 구함에 있는데 믿음의 형제들이 주께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도록 항상 기도에 있으며, 주님에 관한 것을 담대하게 말하여 주님의 구원을 설명할 수 있고자 할 말을 주님께 부탁하는(엡 6:14-19) 이 모든 말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일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좋지 않은 마음에서 어떤 좋은 말을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냐는 것이 관점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에게서 나오는 성령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에 우리의 마음이 굳게 있으며, 그 성령님의 생각을 좇아 성령님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참으로 선함에 우리의 말이 있다는 것이 관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없는 우리 안에 거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분으로부터 나오는 말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진 믿음 있는 말입니다. 이 선한 말을 우리가 원하면 얼마든지 기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화가 중에 손으로 그리지 못하고 발로,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습니다. 구족화가입니다. 선척적으로 장애를 갖고 있든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있든 지체 및 정신지체장애를 갖고 있어 손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데, 발가락에 붓을 끼고 또는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데 그 수준이 탁월합니다. 발로나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세밀하고 잘 그립니다. 그의 재능이 발로 또는 입으로 그리는 그림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살아도 사는 건 삽니다. 그럼에도 오직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정신을 집중시키고 발가락 사이에 낀 붓과 입으로 불고 있는 붓을 화폭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우리를 오직 구주 예수께 믿음이 있게 하시며, 그 믿음을 나타내게 하시는 은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그림의 표현으로도, 글로써도, 몸과 행동으로도 우리가 원하면 얼마든지 기쁘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생각을 갖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안 하고 살아도 사는 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무슨 말을 하겠는지요.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생각을 따르는 같은 마음에 있는 사람들이니 그 생각에서 나오는 믿음 있는 말을 하지 않겠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입에 자신의 말을 붙이셨습니다. 우리 손에 자신의 말을 붙이셨습니다. 또한 우리 발에 자신의 말을 붙이셨습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이 입을 가지고, 이 손을 가지고, 이 발을 가지고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에 집중하여 이 복음이 증거하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세히 드러내며 사람들의 온 이목의 집중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목에 있게 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선하신 분을 매 주일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하며 온 마음을 다하여 경외함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한지요! 그러니 말입니다. 뜻을 같이 한 우리 마음을 헛되지 않게 힘써 잘 가져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