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617]視民如傷 (시민여상)
視民如傷 (시민여상)
볼 시, 백성 민, 같을 여, 다칠 상.
백성을 보기를 자신의 상처를 보듯 하라.
백성을 보기를 다친 자를 보듯이 한다.
깊이 백성을 사랑하고 矜恤(긍휼)히 여김을 이름.
출전= 孟子(맹자) 離婁下篇(이루하편).
중국 춘추시대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전쟁을 벌였습니다.
오나라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초나라 임금은 달아났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 진(陳)나라 임금은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오나라를 도울 것인지 초나라를 도울 것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진나라 임금은 백성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초나라를 돕고 싶은 사람은 오른쪽에 서고,
오나라를 돕고 싶은 사람은 왼쪽에 서라.”
백성들이 모두 좌우로 갈라선 가운데 봉활(逢滑)이라는 신하
혼자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봉활이 앞으로 나와 말했습니다.
“제가 들으니 나라가 흥하려면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보고,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티끌처럼 본다고 하였습니다.
초나라는 백성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지만
오나라는 날마다 전쟁을 일으켜 백성의 시신이 들판에 널려 있습니다
초나라를 도울 것이니 오나라는 머지 않아 화를 당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진나라 임금은 백성을 티끌처럼 보고 사지로 내모는 오나라를 멀리하고,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보고 정성껏 돌보는 초나라를 돕기로 결정했습니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시민여상(視民如傷)입니다.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 한다는 말입니다.
국민을 다친 사람처럼 보는 나라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孟子集注
孟子曰:
「禹惡旨酒而好善言.
孟子가 말하였다.
“禹임금은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善言을 좋아하셨다.
▲旨酒:美酒(맛있는 술)
戰國策曰:
「儀狄作酒, 禹飮而甘之, 曰 『後世必有以酒亡其國者』 , 遂疏儀狄而絶旨酒.」
戰國策(유향 所撰)에 일렀다.
“儀狄이 술을 만드니 禹임금이 마셔보고 맛있게 여겨 말하기를,
‘後世에 필시 술 때문에 그 나라를 망칠 자가 있으리라.’ 하고,
의적을 소원히 하고 맛있는 술을 끊었다.”
書曰:
「禹拜昌言.」
書經에 이르기를, ‘禹임금은 昌言(善言)을 들으면 절하였다.’라고 하였다.
湯執中, 立賢無方.
湯임금은 中道를 지키고, 현인을 등용함에 방소가 없었다.
執, 謂守而不失.
執은 지키고 잃지 않음을 이른다.
中者, 無過不及之名.
中은 지나침과 不及(모자람)이 없다는 명칭이다.
方, 猶類也, 立賢無方, 惟賢則立之於位, 不問其類也.
方은 類와 같으니, 立賢無方이란 오직 현인이면 그를 지위에 세우고,
그 部類를 따지지 않은 것이다.
文王視民如傷, 望道而未之見.
文王은 백성을 보기를 다친 듯이 여겼으며,
道를 바라기를 도를 보지 못한 듯이 여겼다.
而, 讀爲如, 古字通用.
而는 如로 읽으며 古字에 通用된다.
民已安矣, 而視之猶若有傷; 道已至矣, 而望之猶若未見.
백성들이 이미 편안한데도 그들을 살피기를 오히려 상처가 있는 듯이 여기니,
道가 지극하였다. 그런데도 도를 바라기를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
聖人之愛民深, 而求道切如此.
聖人이 백성 사랑하기를 깊이 하고 道를 구하기를 간절하기가 이와 같았다.
不自滿足, 終日乾乾之心也.
스스로 만족하지 않아 항상 쉬지 않고 일을 실천하려는 마음이다.
▲乾乾:行事不息(일을 행함에 쉬지 않음)
武王不泄邇, 不忘遠.
武王은 가까운 자를 親狎하지 않았으며, 먼 자를 잊지 않았다.
泄, 狎也.
泄은 친압함(함부로 대함)이다.
邇者人所易狎而不泄, 遠者人所易忘而不忘, 德之盛, 仁之至也.
가까운 자는 사람이 친압하기 쉬운 바인데도 친압하지 않았고,
먼 자는 사람이 잊기 쉬운 바인데도 잊지 않았으니, 德이 盛하고 仁이 지극하다.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周公은 세 王을 겸하여 생각하고 네 가지 일을 시행하되,
현재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우러러 생각하며 밤으로써 낮을 이었고,
다행히 터득하면, (그대로)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다.”
▲待旦: 내각본에는 待朝로 되어 있다.
이성계가 즉위하고 나서 이름을 旦으로 바꾸니 그것을 忌諱한 것이다
三王, 禹也, 湯也, 文武也.
三王은 禹,湯,文武이다.
四事, 上四條之事也.
四事는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조항(우탕문무)의 일이다.
時異勢殊, 故其事或有所不合, 思而得之, 則其理初不異矣.
때가 다르고 형세가 달라서 그 일이 혹 부합되지 않는 바가 있으나,
생각하여 터득하면 그 이치가 애당초 다르지 않다.
坐以待旦, 急於行也.
坐以待旦란 실행하기를 서두르는 것이다.
此承上章言舜, 因歷敍群聖以繼之;
而各擧其一事, 以見其憂勤惕厲之意.
이것은 윗 章에 舜임금을 말한 것을 이어서,
인하여 여러 聖人을 차례로 서술하여 이으면서,
각기 그들의 한 가지 일을 거론해서 그들이 걱정하고 부지런히 힘쓰며
두려워한 뜻을 나타내었다.
蓋天理之所以常存, 而人心之所以不死也.
天理가 항상 보존되는 이유이고, 人心이 죽지 않는 까닭이다.
程子曰:
「孟子所稱, 各因其一事而言, 非謂武王不能執中立賢, 湯卻泄邇忘遠也.
人謂各擧其盛, 亦非也.
聖人亦無不盛.」
程子가 말하였다.
‘孟子가 稱한 바는 각기 그 한 가지 일을 因하여 말한 것이다.
武王이 中을 지켜서 어진 자를 기용하지 못하였다는 말이 아니고,
湯王은 가까운 자를 친압하고 먼 자를 잊었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각기 그 盛한 점을 거론하였다고 하나, 이 또한 틀린 말이다.
聖人은 盛大하지 않음이 없다.’
이하=이데이뉴스자료
<김세곤칼럼>시민여상 (視民如傷)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백성 보기를 상처 돌보듯이 하라!!! |
|
등록날짜 [ 2016년09월26일 13시27분 ] |
죽천 박광전(1526∽1597)은
하서 김인후 · 고봉 기대승 · 미암 유희춘 · 일재 이항과 함께
호남 오현(五賢)이다.
광해군의 사부였던 박광전은 1584년에 함열현감으로 근무했다.
함열현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부근이다.
박광전은 관사와 동헌 벽 위에 ‘시민여상 (視民如傷)’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백성을 자애롭고 편안하게 다스렸다.
시민여상 (視民如傷)! 백성 보기를 상처 돌보듯이 하라.
이는 <춘추좌전(春秋左傳)> 애공 원년(BC 494)에 나오는 글이다.
BC 494년에 오나라 왕 부차는 월나라 구천을 굴복시켰다.
부차는 BC 496년에 부친 합려가 월나라 구천과의 싸움에서 죽자
2년간 와신(臥薪 : 땔나무 위에 눕다)하여 복수를 하였다.
이 시기에 오나라 부차는 초(楚)나라를 공격하면서 진(陳)나라에게 동참을 요구했다.
이에 진회공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상의했다.
이때 대부 봉활(逢滑)이 오나라의 요구를 거절할 것을 건의했다.
진회공은 초나라가 싸움에 패해 이미 왕이 망명한 상황인데
오나라의 청을 거절하면 후환이 두렵다하자, 봉활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는 이러한 일쯤은 많이 있는 것이니 어찌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작은 나라도 회복하거늘 하물며 큰 나라인 초나라가 어찌 회복하지 못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나라의 흥성은 백성 보기를 상처 돌보듯이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복이 되는 것이고(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나라의 쇠망은 백성을 흙이나 쓰레기처럼 하찮게 여기는 데 있으니
이것이 화가 되는 것입니다.(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己禍也)’
초나라는 비록 덕이 없으나 백성을 베어 죽이지는 않습니다.
오나라는 백성을 전란 중에 끌고 다녀 백골이 풀 더미와 같이 널려 있으니
덕행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늘이
초나라를 깨우칠 가르침을 내린 듯합니다.
오나라가 재앙을 입을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진회공은 봉활의 의견을 따랐다.
나중에 ‘백성을 흙이나 쓰레기처럼 여기는 나라는 망한다.’는 봉활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오나라에 항복한 월나라 왕 구천은 21년간 상담(嘗膽 : 쓸개를 맛보다)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국력을 모아 BC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죽였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는 중국 소주 · 항주 땅인 오 · 월간의 복수극에서
탄생한 것이다. 오나라 부차가 사랑한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구천이 보낸 여간첩이었다는 것도 재미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