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일기 1: 중띠엔에서 차마고도를 따라 티벳으로
후지와라 신야는 <티베트 방랑>(한양출판, 1994)에서 타임 슬립(시간의 흐름을 바꿔 미래나 과거로 건너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타임 슬립이란 동시대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지층연대를 말한다. 가령 티벳을 여행하다보면 느끼게 되겠지만, 그곳에는 아직도 한국의 1960년대가 곳곳에 존재하고, 우리가 현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시골의 가치와 정서가 엄연히 실재한다. 그러므로 티벳을 여행한다는 것은 순진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다름아니다. 아침 8시. 쿤밍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구름 속을 헤치고 중띠엔으로 날아간다. 기내방송에서는 계속해서 샹그리라, 샹그리라, 샹그리라가 흘러나온다. 중국에서는 이제 옛 티벳의 땅인 중띠엔을 샹그리라(香格里拉)로 부르고 있다. 1933년 영국의 제임스 힐튼(Hilton James, 1900~1954)이 쓴 장편 <잃어버린 지평선 Lost Horizon>에 보면 히말라야 남쪽 티벳의 산중에 영원히 평화롭고 고요한 신비의 땅이 있다고 했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콘웨이)이 찾아간 이 산중의 사원을 '샹그릴라'로 이름붙였다. 이 소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샹그릴라는 ‘마음의 이상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중국은 이 소설의 지명을 빌려 중띠엔 인근을 샹그리라로 명명했다.
거대한 꾸이산 마니차.
구불구불 사행천이 휘돌아나가는 녹색 습지와 그 너머로 보이는 뭉툭하고 완만한 산마루. 노란 유채와 푸른 밀밭이 펼쳐진 들판. 계곡의 자욱한 안개 속으로 드러난 빛 바랜 촌락의 집들. 그 풍경 속으로 실랑실랑 가랑비가 흩뿌렸다. 비가 오는 샹그리라 공항. 드디어 나는 티벳 여행의 기점인 중띠엔에 도착했고, 중국이 강제로 점령한 옛 티벳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평균 해발 3300미터의 고원도시. 과거 티베탄 마을이었던 이 곳은 이제 대부분 한족이 상권을 장악한데다 티베탄을 몰아내고 도시의 노른자위마저 모두 차지한 상태다. 이는 이미 중국이 티벳을 강제점령했을 때 예견된 일이었다. 시내 허름한 식당에서 떠우지안(콩국물)으로 속을 달래고, 씨판(쌀죽)과 바오쯔(만두)로 배를 채운 뒤 본격적인 중띠엔 구경에 나선다. 복원이 한창인 너와집촌을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에 꾸이싼(구산사) 사원이 자리해 있다. 사원은 볼품없고, 대신 언덕에 자리한 거대한 마니차(안에 경전을 넣어 돌리는 금속으로 된 경전통)가 유명한 곳이다. 거대한 마니차는 혼자서는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해서 대여섯 명은 힘을 보태야 겨우 돌아간다. 꾸이싼 언덕에서 바라본 중띠엔은 여전히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있다. 시내를 벗어나면 티벳 사원(곰파)으로는 윈난에서 가장 크다는 쑹첸린 사원을 만날 수 있다. 쑹첸린은 간덴사원을 세운 쫑카파(1357~1419)의 법통을 따르는 겔룩파(티벳 불교의 가장 강력한 종파) 사원으로 '중띠엔의 포탈라'로 통한다. 작은 포탈라라 불리는 쑹첸린 사원의 황금지붕.
사실 티벳에서는 사원과 마을이 분리돼 있지 않았다. 사원이 생기면 그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사원이 마을이고, 마을이 곧 사원인 것이다. 쑹첸린도 다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곱향나무(소나무처럼 생긴 향나무)를 피우고 있는지 사원으로 가는 길은 온통 향 냄새가 진동한다. 자욱한 연기와 안개. 분명하지 않은 시야 속에서 쑹첸린은 점점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며 내 눈을 자극한다. 여러 채의 크고 작은 사원과 수많은 부속채로 이뤄진 쑹첸린은 달라이 라마 5세 때인 1679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지만, 80년대 이후 복원된 곳이 대부분이어서 그렇게 오래된 옛빛은 찾아볼 수가 없다. 더구나 지붕의 금칠은 최근에 해 놓았는지 너무 깔끔하고, 찬란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그러나 사원을 둘러싼 라마의 집들과 사하촌 풍경은 오래된 흙벽과 회벽이 그대로이고, 지붕조차 잡풀이 성성한 흙지붕이어서 보는 맛이 은근하다. 시내에 인접한 꾸이싼보다 고도가 높아서 사원 지붕에 올라 바라보는 중띠엔 조망도 훨씬 장쾌하고 넉넉하다. 중국이 샹그리라로 부르는 핵심지역 중띠엔의 볼거리는 사실 이 정도에 불과하며, 진정한 샹그리라 풍경은 중띠엔을 벗어난 미지의 고원과 협곡에 존재한다.
중국에서 티벳으로 가는 육로는 칭장공로(청해-티벳), 신장공로(신장-티벳), 진장공로(윈난-티벳) 등 크게 세 곳이며, 네팔에서는 주로 국경을 넘어가는 우정공로를 통해 티벳으로 들어온다. 중띠엔에서 티벳을 잇는 진장공로의 노선은 중띠엔-더친-옌징-망캄-팍쇼-뽀미-링트리(빠이)-공푸장따-라싸로 이어지며 총연장 2000여 킬로미터에 달한다. 이 길은 중국의 옛 교역로인 차마고도의 옛길을 따라가는 사연 많은 길로써 지금도 티벳에서는 가장 은밀하고 험난한 길로 알려져 있다. 특히 중띠엔에서 망캄을 잇는 214번 국도는 아직도 대부분이 비포장인데다 수시로 산사태가 일어나 가장 어려운 험로로 통한다. 도로는 해발 3000과 4000의 경사를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며, 어떤 곳은 100킬로미터를 가도록 마을이 보이지 않고, 어떤 곳은 반나절 이상 5000미터급 산을 넘어야 한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탐험이 더 어울리는 길이 바로 214번 국도인 것이다. 중띠엔을 빠져나와 이제 나는 그 길로 들어선다.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따라가는 위험하고도 장엄한 길. 옛날(7~8세기) 윈난에서 생산된 차는 오랜 저장을 위해 발효시켜 덩어리로 만든 다음 대발쌈에 싸서 말과 노새에 싣고 리장과 중띠엔, 옌징과 창두, 뽀미, 링트리를 차례로 거쳐 라싸까지 거래되었는데, 주로 티벳과 윈난의 대상이었던 ‘마방’이 이 중계무역을 담당했다. 이렇게 티벳에 온 차는 다시 실핏줄처럼 뻗어 있는 차마고도의 샛길을 따라 네팔과 인도에까지 퍼져나갔다.
쑹첸린 사원 지붕에서 내려다본 샹그리라 핵심지역인 중띠엔 풍경.
예부터 이 길은 워낙에 험해서 윈난에서 라싸까지 무사히 간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들은 파발을 전하듯, 중띠엔에서 더친까지, 더친에서 옌징까지 하는 식으로 중계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윈난에서 가져온 차는 옌징에서 소금과 교환하였고, 라싸 인근에서는 말이나 산양, 야크 모피와 거래하였다. 아직도 그 옛날 차마고도를 따라 캐러밴을 했던 마방은 소수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소금 계곡으로 유명한 옌징이 이들의 마지막 활동 거점 노릇을 하고 있다. 중띠엔을 벗어나 214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 도로 옆으로 펼쳐진 초원과 완만한 산사락에는 산양과 야크떼가 풀을 뜯는 한가로운 풍경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비에 젖은 푸른 골짜기. 얼마 가지 않아 야크떼가 점령한 광활한 습지도 펼쳐진다. 얼핏 보아서는 초원이고 습지인 이 곳은 꽤나 유명한 나파하이 호수다. 겨울에는 그저 드넓은 초원이었다가 우기인 여름이 되면 호수로 변하는 신비한 호수가 바로 나파하이다. 비가 내리는 양에 따라 호수의 크기와 모양은 그때그때 달라진다. 있다가 사라지고, 없다가 생겨나는 신비한 호수.
길이 시작되면서 산사태의 흔적은 곳곳에 방치돼 있다. 국도가 지나는 산자락의 덩치가 제법 크긴 해도 속은 헐겁기만 해서 도로가 지나간 자리마다 툭하면 토사가 흘러내리고 암석이 굴러떨어진다. 이런 사태는 요즘같은 우기 때는 더욱 심해서 큰 비가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길이 끊기고 앞이 막힌다. 그것이 건설해서는 안될 곳에 건설된 214번 국도의 업보이고, 대가인 것이다. 그 옛날 말을 끌고 지나갔던 마방들이 왜들 그렇게 길에서 죽어야 했는지, 저 산과 계곡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이 길은 애당초 구름과 바람에게나 어울리고, 산짐승에게나 통행이 허락된 자연의 길이 아닌가.
수시로 사태가 나는 214번 국도. 한동안 7~8부 능선을 오르내리던 길은 차츰차츰 고도를 낮춰 란창강에 가까워진다. 급기야 길은 산을 다 내려와 란창강을 바로 옆에 끼고 물길을 따라 흐른다. 그 길에서 만난 한 마부는 내가 출발한 더친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여기서 더친까지는 100여 킬로미터 남짓이지만, 장보기가 마땅찮은 이런 오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거기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하긴 이런 길을 자전거를 타고 넘어오는 바이커도 있고, 처음부터 오체투지로 넘는 사람도 있다. “아마 오늘은 못 갈 거다. 저 앞에 길이 끊겼다.” 마부는 그 말을 남기고 떠그덕떠그덕 사라졌다. 길이 끊겼다고?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앞서 가던 마부를 지나쳐 봉고차는 먼지를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란창강가에서 만난 마부. 10여 분쯤 란창강을 따라 올라가자 양쪽 길가에 수많은 차들이 도열해 있었다. 마부의 말이 맞았다. 그 중의 상당수는 돼지를 싣고 온 트럭들이었다. 돼지는 졸고, 꽤액거리고, 꿀꿀거렸으며, 아예 길가에 드러누워 팔자 좋게 낮잠을 즐기는 돼지도 있었다. 길은 언제쯤 뚫리는가? 모른다. 여긴 언제부터 있었는가? 어제 왔다. 그럼 여기서 밤을 보냈단 말인가? 그렇다. 여기가 무슨 마을인가? 쩡궁마을이다. 사람들은 다들 오늘 안가도 상관없다는 듯 느긋했다. 마치 여기가 숙소인 것처럼 한쪽에선 카드를 치거나 마작을 즐겼고, 한 편에선 컵라면을 먹거나 삐루를 마셨다. 한 외국인 부부(이 부부를 드락순쵸에서 다시 만난다)는 길가 통나무에 걸터앉아 주변의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길이 막힌 쩡궁마을(왼쪽). 다리에 옌러우를 내걸고 있다(오른쪽). 졸고, 기다리고, 하품하고. 몇 시간이 될지, 아니면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내린 폭우로 전방에 토사가 흘러내려 길이 끊겼고, 지금은 그로 인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여기서 티벳에 가려면 다른 길이 없었다. 다시 길을 돌아나가 칭해성까지 가서 칭장공로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여기서 또 2~3일이 걸리는 일이다. 기다림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마 며칠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나는 평생을 여기서 기다려 할것만 같았다. 아까 길에서 우연히 만난 마부가 내 앞을 지나쳐 간다. 마부는 때로 말이 차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유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막히지 않고 집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란창강가에 걸터앉아 두 시간째 강물소리만 듣다가 일어났다. 란창강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리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들은 방금 잡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다리에 내걸고 있었다. 냉장고나 냉동고가 없는 이들로서는 빙산에서 흘러왔을 차가운 강물의 수면 위쪽이 일종의 냉장고인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걸어놓은 고기들도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이들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옌러우’라고 하는데, 이렇게 바람에 말렸다가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 저렇게 허공에 매달아 놓아도 아주 썩지는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코담배. 차가 막혀 가지 못하는 쩡궁마을은 모두 35가구(150여 명이 사는)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마을이었는데, 위쪽 산마을에는 13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구경이나 하자고 올라간 산마을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개울가에 나앉은 마을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이내 경계심을 풀었다. 할머니 한 분이 손에 들고 있던 코담배를 권했다. 황토색 분말이 담긴 작은 담배 쌈지에서 향긋한 담배향이 났다. 뒤늦게 윗집에서 나온 여자 아이는 불청객을 보자 수줍음을 타는지 엄마 등에 매달려 고개를 묻는다. 이따금 고개를 들 때마다 아이는 수줍게 웃었는데, 입 주변과 이가 모두 새카맣다. 군것질을 따로 할 수 없는 이 곳의 아이들은 ‘하이궈’라는 검은 산열매로 주전부리를 대신한다. 하이궈를 한 주먹 다 먹고 나면 저렇게 입 주변과 이가 새카맣게 변하는 것이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에서 나도 이것을 한 움큼 먹어봤는데, 머루와 버찌를 섞은 듯한 기묘한 맛이 났다. 쩡궁마을의 마굿간. 이 곳의 집들은 그 구조가 제주도와 흡사했다. 집과 헛간이 따로 분리돼 있었고, 마당에는 한결같이 마굿간과 돼지우리가 있었다. 이 마굿간과 돼지우리는 닭장의 노릇도 겸했는데, 우리 구석에는 나뭇가지를 결어 만든 닭둥우리가 걸려 있었다. 헛간에 걸친 사다리도 우리와 똑같았다. 통나무를 중간중간 도끼로 쪼아내 만든 이 사다리는 오래 전 경주 양동마을에서 본 것과 너무나 흡사했는데, 집집마다 이런 사다리가 두어개쯤은 있었다. 부엌에는 어느 집을 가든 쑤우오차(야크버터차)를 젓는 차통이 있었다. 차통은 큰것일 경우 거의 1미터에 이르렀다. 두어 시간을 산마을에서 보내고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보니, 여전히 차들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아침에 도착해 저녁이 다 되도록 길은 열리지 않았다. 쑤우오차. 돌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2시간을 달려서 다시 메이리 전망대 마을로 왔다. 저녁 8시가 되었는데도 날은 훤하게 밝다. 본래 티벳은 북경과 서너 시간의 시차가 있음에도 북경 시간을 표준시로 삼고 있다. 해서 라싸에서는 9시쯤에야 노을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도 별로 다를 게 없어서 8시가 훨씬 넘어서야 날이 어두워졌다. 느긋하게 메이리 설산이나 구경하고자 찾아들어간 카페에서는 한창 쑤우오차를 만드는 중이었다. 차통에 가락을 꽂아 젓고 있는 카페 주인에 따르면 야크 버터를 넣고 이렇게 100번 이상을 저어 주어야 차가 된다고 한다. 처음 맛보는 사람들은 야크 냄새 때문에 고개를 가로젓지만, 먹다 보면 제법 고소하고 맛있다.
당나귀의 아침식사. 아침으로 쌀죽과 티벳빵인 둥그런 ‘빠바’를 두 개나 씹어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식당 주인은 아직도 길이 열리지 않았다며 점심 때나 가라고 했지만, 가는 길에 메이리를 좀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밍융마을이라도 구경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214번 도로에서 빠져나와 란창강을 건너가야 하는 밍융마을은 지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밍융빙천’(明永氷川) 즉, 밍융 빙하를 여기서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은 세계에서도 해발이 가장 낮은 2650미터에서도 빙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빙하를 보려면 밍융마을에서도 말을 타고 2시간은 산을 올라가야 한다. 왕복 4시간이면, 쩡궁마을의 길이 뚫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밍융빙천을 품은 메이리는 윈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더친은 물론 윈난과 티벳 남동부에서도 최고의 성스러운 산으로 통한다. 옛 티벳어로는 ‘흰 봉우리’란 뜻의 ‘카와거보’(6740미터)라 불리는데, 주봉은 워낙에 험해서 등정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밍융마을에서 만난 마니차 돌리는 노인(왼쪽)과 수차처럼 돌아가는 마니차(오른쪽) 결국 밍융빙천 구경을 포기하고 다시 쩡궁마을로 왔다. 트럭의 행렬은 여전히 길가에 도열해 있다. 길은 뚫렸나? 아직. 언제 뚫리나? 곧. 트럭 운전수 한 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봉고차는 트럭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내달렸다. 바로 앞에서 불도저 한 대가 힘겹게 흘러내린 토사를 치우고 있었다. 거의 공사는 마무리 단계였다. 봉고차는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불도저가 옆으로 비킨 틈을 타 울퉁불퉁 질척거리는 길을 지프차처럼 넘어갔다. 휘유우~.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입에서 모두 한숨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길이 열렸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기다려 길이 열린 것이다. 낮 12시 16분. 이제 다시 티벳으로 간다. 티벳일기 4: 옌징, 원시 소금계곡의 다랑이 염전들
옌징에 도착했다. 한자로는 염정(鹽井), 소금우물이란 뜻을 지닌 곳이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주몽>에서 ‘고산국 소금산’이 어디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지명의 의미만 따져볼 때 옌징의 소금계곡이 드라마상의 ‘고산국 소금산’과 가장 흡사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고산국 소금산’은 가상의 지명이 분명하지만, 부여가 존재했던 기원전 1세기보다 앞선 기원전 2세기(중국의 왜곡된 기록에도 이미 기원전 2세기에 티벳 부족이 등장하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티벳 고원에 이들이 살고 있었다) 이전부터 부족 형태의 티벳이 존재했고, 옌징의 소금계곡 또한 티벳 부족이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나시족과 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드라마 <주몽>에서 가상의 지명으로 거론했을지언정 그 시기의 ‘소금산’이라 불릴만한 소문난 소금 생산지는 티벳의 옌징만한 곳이 없었다.
말이 지는 소금짐의 무게는 약 60~70킬로그램, 균형을 위해 마부는 정확하게 무게를 재고 싣는다. 어쨌든 옌징은 오랜 옛날부터 소금으로 유명했고, 이 곳에서 나는 소금은 중국의 윈난과 쓰촨, 티벳 고원의 중심부인 라싸는 물론 인도에까지 폭넓게 거래되었다. 때문에 차마고도 교역로에서 옌징이 차지하는 비중은 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더구나 고대국가 시대에는 소금이 곧 칼이었고, 권력이었으며, 부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 값진 소금을 바다가 아닌 내륙 깊숙한 협곡에서 생산한다는 것도 옌징의 소금을 유명하게 만든 또다른 이유였다. 정확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이 곳 염전의 역사는 부족국가시대인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그 때의 원시적인 소금생산 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원시적인 소금생산방식을 유지해오고 있는 옌징의 소금계곡. 수백여 개의 다랑이 염전이 있다. 옌징의 소금 계곡은 란창강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해 있다. 이 소금 계곡을 챠카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옛날에는 강을 사이에 두고 나시족 마을과 티벳족 마을이 분리, 대립하고 있었다. 옛 전설에 따르면 티벳족과 나시족(納西族)은 소금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랜 쟁탈전을 벌였다고 한다. 요즘에야 이런 대립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시족과 티벳족은 소금 계곡의 염전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 옛 기록상에는 이 곳의 염전이 50여 개에 이르며, 여기서 나는 소금은 차마고도 교역의 중요한 거래품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재는 소금 계곡에 수백여 개의 염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모양은 마치 계단식으로 펼쳐진 다랑논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건 그냥 다랑논이 아니라 오랜 세월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눈물의 소금밭이다. 하나의 염전은 수많은 나무기둥과 받침대로 이루어져 있다. 빼곡하게 세운 나무받침 위에 돌과 흙을 깔고 그 위에 또 고운 진흙을 이겨 미장을 하고 두렁을 높여 염전을 만드는데, 이 염전들이 수백여 개 어울려 다랑이진 풍경이 오늘날 소금 계곡의 모습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곳의 소금 생산 방식이다. 약 1억년 전 해저의 땅이었던 지금의 티벳 고원은 두 개의 대륙판이 부딪쳐 융기한 곳으로, 옌징의 천연한 소금 광산은 그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물인 셈이다. 그 옛날 해저에 잠겨 있던 소금 성분은 챠카룽의 몇몇 곳에 샘솟는 온천수에 의해 지표로 솟아나는데, 이 물을 증발시키거나 여과시킨 것이 이 곳의 소금이다.
소금 계곡의 다랑이 염전. 소금물을 길어오는 소금 우물은 따로 있다. 이런 전통방식의 소금 생산과 다랑밭처럼 이뤄진 독특한 염전지대로 인해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에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건의하고 있지만, 중국은 딴청을 부리고 있다. 이유인즉슨 소금 계곡이 있는 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란창강에 곧 수력발전댐 건설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옌징의 소금 계곡이 수장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천년을 대대로 이어온 이 곳의 전통 소금 생산은 최근 들어 위기를 맞고 있다. 바다에서 생산한 미네랄이 풍부한(사실 옌징에서 생산한 소금에는 갯벌에 많은 마그네슘 성분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소금이 싼값에 대량으로 유입되고 있어 경쟁력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래저래 소금 계곡의 운명과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이 곳의 수백여 개 다랑이 염전은 엄청난 양의 나무기둥과 받침이 떠받치고 있다. 내가 옌징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시골 읍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옌징의 중심가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차는 거의 보이지 않는데다 거리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사람들은 등짐을 진 말들을 끌고 어디론가 총총이 사라졌다. 시내 한복판에는 ‘차마고도 주점’도 있었는데, 꽤 오랫동안 차마고도 주막 노릇을 해 왔는지 허름하고 오래된 옛빛이 역력했다. 시장은 과거 우리네 장옥같은 분위기가 났고, 소쿠리며 호미, 삽, 야크방울 같은 물건들이 난전에 나와 있었다. 옌징에는 나시족과 티벳족(뵈레)이 어울려 산다고 하는데, 사실 내 눈으로는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다만 좀더 얼굴이 검고 억세 보이는 쪽이 티벳족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옛날 소금과 차를 교역하던 마방들이 들러가던 '차마고도 주점' 오른쪽에 간판이 붙어 있다.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티벳족이라고 밝힌 띵정장춰(31) 가족을 만났다. 이 가족들은 동충하초 파는 일을 한다고 했다. 바이망 설산 인근에서도 여러 명의 동충하초 장사꾼을 만났듯 옌징에도 동충하초 장사꾼이 꽤 있다고 했다. 동충하초는 어디서 캐는가? 망캄 가는 길에 훙라 설산이 있다. 거기에 동충하초가 많다. 그럼 이건 어디다 내다 파는가? 중띠엔까지 가서 판다. 버스를 타면 중띠엔까지 3일이 걸린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는가? 지금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옛날에는 말 타고 중띠엔까지 갔다고 들었다. 동충하초는 얼마나 하는가? 500그램에 200위안이다. 그걸 캐는데는 얼마나 걸리나? 500그램 캐는데 두세 달 걸린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2만 5천원을 벌기 위해 두세 달이나 산을 헤매다녀야 하는 게 동충하초 장사꾼의 현실인 것이다. 옌징의 가장 큰 호텔에 짐을 풀고 TV를 켰지만, CCTV1밖엔 나오지 않는다. 오늘은 독일월드컵 한국과 토고전이 있는 날이었지만, 중계방송이 나오는 CCTV5는 시내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하긴 티벳에까지 와서 월드컵을 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리라. 티벳에 온 이상 티벳의 시간을 따라야 한다. 티벳의 시간은 말과 야크가 걷는 것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목포까지 4시간 반이 걸리지만, 여기서는 그 정도의 거리를 가자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는 한 시간 늦는 것에 안달을 하지만, 여기에서는 한 시간쯤 늦는 것은 늦는 것도 아니다. 비행기도 제 시간에 떠나는 적이 없고, 버스는 아예 시간표가 무의미하다. 티벳에서 급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한국 사람들이다.
옌징 거리의 아이가 야크의 꼬리를 잡고 걸어간다. 아침 일찍 어제 보지 못한 염전을 보러 란창강을 향해 간다. 멀리 산등성이에 자리한 루띵마을이 안개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절벽과 벼랑 아래로 황토색 란창강이 거칠게 흘러간다. 그런데 절벽을 따라 가로로 길게 실오라기처럼 이어진 것이 있다. 길이다. 까마득한 벼랑에 걸린, 한발만 삐끗하면 바로 란창강이 집어삼키는 위태로운 길이다. 그 위태로운 길을 건너편에서 보고 있자니 내 오금까지 저려온다. 염전을 향해 조금 더 협곡을 내려가자 아, 입이 쩍 벌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건너편의 실오라기같은 길로 10여 마리의 말이 소금짐을 싣고 간다. 그 뒤로는 마방(말이나 노새, 당나귀를 이용해 차와 소금 등을 거래하고 운반하던 상인조직)으로 보이는 세 명의 마부가 뒤따르고 있다. 사실상 옌징에 남은 마방은 옛 차마고도의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마방이나 다름없고, 옌징을 마지막 근거지로 삼고 있는데, 당연히 이 곳의 소금이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소금 짐을 싣고 궁궁을을 뻗친 오르막을 다 올라온 마방의 행렬은 루띵마을로 이어진 낭떠러지 벼랑길을 위태롭게 이동하고 있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벼랑길에서 마부들은 짐을 싣지 않은 말일지라도 절대로 타지 않는다고 한다. 고원에 부는 잦은 회오리바람에 말이 몸을 가누지 못해 마부를 벼랑으로 떨어뜨렸다는 웃지 못할 사건이 이 곳에서 종종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실 옛 차마고도의 길이 대부분 저랬다고 보면 맞다. 해서 차와 소금을 나르던 마방들이 숱하게 길에서 죽어야 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방의 행렬이 루띵마을까지 무사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소금 계곡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곳에서는 증발지 소금(오른쪽)보다 여과를 통해 고드름처럼 달린 소금(왼쪽)이 더 유명하다. 에움길을 돌아서자 말로만 듣던 다랑이 염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S자로 휘돌아나가는 란창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계곡에 빼곡하게 들어선 것들이 모두 염전이다. 염전을 바로 발 밑에 두고 소금을 나르는 소금꾼의 행렬도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서 말들을 몰고 산길로 올라섰다. 이 곳이야말로 말이 걷는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곳이다. 나도 천천히 말이 걷는 속도로 염전에 도착했다. 사내들은 보이지 않고 몇 명의 아낙들만 염전을 오가며 두렁에 미장을 하고 있었다. 우기에 내린 비가 상당수의 염전을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다랑이 염전 두렁에 미장을 하고 있는 나시족(추정) 여인. - 여기에 소금 우물이 정말 있는가? - 온천처럼 소금물이 솟아나온다. 물동이로 그 물을 퍼서 날라다 소금연못(1차 염지)에 채우고, 그 물을 다시 소금밭에 붓는다. - 이 흙바닥에 그냥 부으면 소금이 더럽지 않은가? - 그 위의 소금은 주로 가축에게 먹인다(물론 이 소금이 가축을 위한 소금은 아니지만, 티벳인들은 이 소금이 가축의 다산을 돕는다고 믿는다). - 그럼 사람은? - 이 아래(나무기둥이 받치고 있는 곳)를 보라. 저기 고드름처럼 매달린 것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수확한다. - 그렇다면 이 위의 소금밭은 증발지가 아니라 여과지란 말인가? - 그렇다. 여기에 소금물을 부으면 일부는 위에서 증발하고, 일부는 이 밑으로 스며들어 저기 천장(밑에서 봤을 때)에 고드름처럼 매달리게 된다. - 그럼 이 소금밭은 당신 것인가? - 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여러 구역 중 한 구역을 가리킴)의 소금밭을 모두 스무 가족이 같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 공동소유? - 그런 셈이다. 한때 이 곳의 소금밭은 중국에 의해 국영으로 운영(중국이 티벳을 점령한 이후 모든 것은 대부분 국영으로 운영되었으며, 80년대 이후 민간에도 조금씩 양도되었다)된 적도 있다. 다시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 남자들은 왜 보이지 않는가? - 나도 모르겠다.
옌징의 미래는 이 아이의 눈처럼 밝지가 않다. 소금밭에서 일하는 소금꾼은 거개가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소금을 나르거나 내다파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소금물을 퍼나르거나 소금밭을 고르고 생산하는 힘든 일은 대부분 여자가 담당한다. 티벳에서는 도대체 남자들은 뭐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여자가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옛날 기록에 따르면 나시족은 모든 힘든 일을 여자들이 도맡아 하는 대신,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철저한 모계사회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는 알지만, 아버지는 알지 못했으며, 여성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고, 재산이나 아이에 대한 소유권이나 양육권도 여성에게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나시족(중국과 티벳에 현재 2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은 진사강과 란창강, 얄룽강 유역에 주로 살고 있는데, 리장에 나시족 자치현이 세워져 있다. 이들은 티벳인들과 달리 지금도 물과 바람, 산과 같은 물신을 숭배하며, ‘동파’라고 불리는 무당이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 일처다부제 생활을 했던 티벳인과 비슷한 면이 많지만, 종교와 생활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나시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갔던 나는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시족인지 티벳족인지 알지 못했고,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공부 좀 할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티벳일기 5: 옌징에서 훙라산까지
차와 소금을 교역했던 차마고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역로이자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문명통로였다. 어떤 이들은 차마고도가 실크로드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주장하지만, 알 수가 없고, 다만 실크로드의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당나라(7~10세기) 때 차마고도의 교역도 활발하게 전개된 것만큼은 사실이다. 우리에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교역로와 문명통로를 대표하던 길이 바로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였다. 현재 티벳에 남은 차마고도의 흔적은 군데군데 남은 옛길과 옛길을 따라 낸 도로들을 제외하면 옌징의 염전과 이 곳을 무대로 근근히 활동하는 마방이 가장 확실한 차마고도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마방이 걸어갔을 옌징의 황토 에움길을 나는 편히 차를 타고 달린다. 옌징을 벗어나면 곧바로 또다른 옌징을 만나게 된다. 옌징(해발 3109미터)은 윗옌징, 아랫옌징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랫옌징에 살고 있다. 옌징에서 고작해야 차를 타고 5분도 걸리지 않는 윗옌징에는 티벳의 유일한 외래종교이자 유일한 천주교 교회가 자리한 곳이다. 약 130여 가구, 600여 명이 사는 윗옌징에 천주교 신자는 의외로 많아서 약 3분이 1이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 교회는 외관이나 건물 형식은 물론 벽화나 단청의 무늬까지 티벳 사원풍을 고스란히 따랐다. 그러나 예배당에는 분명하게 십자가가 걸려 있고, 입구에는 경전의 문구 대신 주기도문이 적혀 있다. 이 곳에도 여느 천주교처럼 주말 미사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이 어김없이 예배를 보러 온다. 티벳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일 수밖에 없다.
윗옌징에 자리한 티벳의 유일한 천주교 교회. 옌징을 떠나기에는 말과 야크의 속도로 떠나는 것이 어울리지만, 개념 없는 봉고차는 고약한 흙먼지를 날리며 순식간에 옌징을 벗어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옌징다운 풍경을 다시 만났다. 마방의 행렬이었다. 3명의 마부와 6마리의 말로 이뤄진 마방의 행렬은 잠시 쉬었다 가려는지 길가의 너른 공터에 짐을 풀었다. 미라 씨(53) 일행이다. 갈색 마포자루를 내리고 마구를 내려 말도 쉬게 하고, 마부 한 명은 나무를 해오고 또다른 마부는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는 때가 시커멓게 낀 양재기를 올렸다. 여기에 미라 씨는 역시 때가 시커먼 주전자에서 물을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길에서 짐을 푸는 마방. 미라 씨 일행. - 물은 왜 끓이는가? - 물을 끓여야 차를 마시지 않겠는가 - 이렇게 다니면서 늘 차를 마시는가? - 그렇다. 차는 지친 몸을 풀어주고, 영혼을 맑게 한다. - 아까 말에서 내린 짐은 무엇인가? - 옌빠(소금)다(미라 씨는 짐을 풀어 소금을 보여 준다). - 아, 이건 붉은 소금이 아닌가. - 그렇다. 옌징의 염전에서는 홍염과 백염을 다 생산한다. - 왜 다른 색깔의 소금이 나오는가? - 강 이쪽의 소금은 백염이고, 저쪽은 홍염인데, 저쪽은 흙(증발지의)이 붉은색이어서 홍염이 된다. - 이걸 싣고 어디까지 가는가? - 마캄까지 간다. - 옌징에서 얼마나 걸리나? - 4일 걸린다. - 옌징에서 마캄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나? - 120킬로미터(112km)쯤 된다. - 이걸 가져가면 거기서 얼마나 받나? - 100근(한근에 600그램)에 45~50원 받는다. - 그것밖엔 안되나. 그런데도 마캄까지 가야 하나? - 가야 한다. 이제껏 그렇게 살았다. 옌빠(소금) 짐과 차주전자.
미라 씨 일행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주루막같은 보따리에서 커다란 빠바를 꺼내 권했다. 손으로 한주먹 뜯어 입에 넣었으나, 먹기가 쉽지 않다. 내내 먼지가 날리는 길을 온 터라 빠바에서는 모래와 먼지가 아작아작 씹혔다. 이건 숫제 먼지빵이다. 내가 빠바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목이 메인줄 알고 티벳에서 김치처럼 먹는 나물무침(‘양유’라 한다)을 건넨다. 포우싼에서도 양유를 입에 넣었다가 너무 짜서 인상을 찡그린 기억이 있어 나는 손을 내저었다. 모래가 서걱이는 빠바를 억지로 삼키고는 미라 씨 일행과 헤어졌다.
미라 씨 일행이 불을 피워 덩어리차를 끓이고 있다. 모래가 서걱이는 빠바(왼쪽)와 양유(소금에 절인 나물무침, 오른쪽). 계속되는 비포장길. 차는 덜컹거리고, 탈탈거리고, 쿵쾅거렸다. 갈수록 풍경은 기가 막혀 아! 우와! 쩌억, 짜악, 크아! 계속해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갈수록 날씨도 좋아져, 전형적인 티벳의 푸른 하늘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덩달아 사진을 찍는 나도 신이 나서 덜컹이는 차가 폐차가 되든 말든 정차, 출발을 연발한다. 사실 중띠엔에서 옌징까지 오는 길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처음 이틀은 비가 왔고, 이후에는 계속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지루한 우기를 벗어나 이제야 제대로 된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다.
간체 시가지에서 팔코르 사원으로 이어진 길가의 집들은 모두가 무언가를 파는 가게들이다. 이 많은 가게가 제대로 운영될 리가 만무하지만, 가게마다 비슷비슷한 물건들이 잔뜩 전시돼 있다. 거리의 좌판도 거개는 비슷비슷한 물건을 판다. 신발과 옷, 철물과 과일, 차와 같은 것들은 주로 점포에서 팔고, 잡화와 농기구, 마구, 온갖 장신구와 불교용품은 좌판에 펼치고 있다. 게중에는 10 초반의 소녀까지도 거리에 나와 팔릴 것같지 않은 물건을 팔고 있다. 사원이 가까울수록 좌판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점포는 열이면 열 한족이 운영한다면, 좌판은 티벳인의 몫이다. 티벳인들은 외국인을 보면 물건값을 4배 이상 높게 부른다. 10원에 살 수 있는 팔찌를 50원으로 불러놓고는 흥정을 하면 10원까지 내려간다. 30원짜리 마니석도 10원, 외국인이 꼭 하나씩은 사 가는 마니차는 200원 이상을 부를 때가 많지만, 60~80원이면 살 수 있다.
샬루파 사원에서 바라본 간체종(위)과 간체 주변의 들판(아래).
사실 좌판에 나온 티벳인들은 외국인들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외국인에게 처음에는 몇 배 이상 가격을 불러 사면 큰 이득이고, 안사면 흥정을 통해 사게 만든다. 이들은 실로 팔려고 하는 의지가 눈물겨울 정도다. 제대로 된 가게는 한족이 모두 차지하고 있으니, 거리에서 작은 것이라도 팔아넘겨야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이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악착같이 달라붙어 물건을 파는 행위는 절실한 생존의 모습인 것이다. 시내에서 사원으로 이어진 길에는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을 빙 둘러쌓은 고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간체종(왕궁과 성)이다. 간체종은 본래 있던 산성을 14세기 들어 팍파 펠장포(Phakpa Pelzangpo)가 요새형 궁전으로 만든 곳인데, 9세기쯤 얄룽 왕조의 마지막 왕인 팔코르첸(Palkhortsen)의 궁전도 이 곳에 있었다고 한다.
마차와 마부 너머로 간체종이 보인다. 이 곳은 과거 라다크(Ladak)를 비롯한 주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요새로써, 오랜 동안 함락되지 않는 성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904년 영국군의 침공으로 성벽과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중국 점령 이후 또 한번 파괴되어 성벽 일부를 제외하곤 옛 모습(현재 복원중)을 거의 잃었다. 그럼에도 간체를 찾는 많은 여행자들은 한번씩 간체종을 올라가곤 한다. 이 곳이 팔코르 최데 사원을 조망하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팔코르 사원은 이 간체종을 오른쪽에 끼고 걸어서 채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팔코르 사원은 9세기 팔코르첸의 집권 시기에 처음 지어졌지만, 15세기 들어 다양한 종파의 사원이 팔코르에 들어서면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중국 점령 이후 남아 있는 사원 건물은 현재 두 곳(샤카파 사원과 샬루파 사원)에 불과하다.
티벳 전통구역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 매표소를 지나면 오른편에 대법당이 있고, 왼쪽에 거대한 간체 쿰붐이 자리해 있다. 간체 쿰붐을 돌아 대법당 뒤쪽으로 올라가면 샬루파 사원이 자리해 있는데, 지금은 건물의 뼈대만 남아 내부는 텅 비어 있다. 하지만 이 사원의 지붕에 올라가면 팔코르 사원과 간체종, 간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최고의 전망대 노릇을 한다. 나는 이 곳에 올라 한시간쯤 하늘과 들판과 사원과 구름만 구경하다 내려왔는데, 개인적으로는 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다. 날씨는 뜨거웠고, 오랜 동안의 여정으로 내 몸은 지쳐 있었다. 내 눈은 계속해서 간체 쿰붐의 사방에 그려진 부처의 눈과 마주쳤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단지 나는 쿰붐에 그려진 눈과 마주쳤을 뿐인데, 죄인처럼 자꾸만 나는 눈을 피해 달아났다. 그 눈은 지난날의 내 모든 치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티벳 전통구역에서 만난 빨래하는 아낙들. 어쩌면 내가 폐허가 된 사원 지붕에 더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서둘러 내려온 것도 나를 보는 부처의 눈 때문일지 모른다. 눈을 피해 나는 캄캄한 대법당 안으로 피신했다. 한낮에도 법당은 한밤중처럼 어두웠고, 종종 하늘로 열린 계단을 통해 한줌의 빛이 겨우겨우 쏟아져내렸다. 거기서 나는 아주 인상적인 풍경을 보았는데, 중국 인민복을 입은 티벳 소년이 계단에 비스듬히 기대 그 겨우 쏟아지는 빛을 한참이나 쳐다보는 풍경이었다. 그것은 마치 소년의 어두운 현실에 필요한 한 줄기 간절한 빛과 같았다. 식민지 티벳의 어두운 현실에 겨우겨우 스며드는 한 줄기 빛을 나는 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피하려고 했던 ‘부처의 눈’이었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지붕과 대문에 흔하게 장식하는 야크뿔. 팔코르 사원에는 유난히 개가 많다. 사원의 개들은 그늘이란 그늘을 다 차지한 채 누워 있다. 말은 마차를 끌어주고, 야크는 젖과 고기를 제공하며, 산양은 털과 유제품을 사람에게 주지만, 티벳에서 개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이 땡볕에 가장 편하게 쉬는 녀석들이 바로 이 녀석들이다. “아무것도 주지 않다니요. 시체를 뜯어먹지요.” 한 순례객은 개의 쓸모가 야크와 같다고 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조장(鳥葬)을 하거나 수장(獸葬)을 하는 것이 오랜 전통인데, 수장 즉 짐승에게 주검을 맡기려면 ‘개’(들개)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티벳에서의 매장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장법이다. 날씨가 건조해 매장을 하게 되면, 시체가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 시체가 썩지 않는다는 것은 환생을 믿는 이들에게는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나의 관점에서는 시체를 들개에게 내어준다는 것이 썩 유쾌한 방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난전에 앉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들(왼쪽). 그 옆에서 얌전하게 기다리는 말(오른쪽). 팔코르 사원을 한바퀴 둘러본 뒤 나는 사원 앞에서 시가체종까지 펼쳐진 티벳 전통구역을 한참 떠돌았다. 이 곳은 티벳의 도심에 존재하는 티벳 전통구역 가운데 가장 티벳다운 풍경이 존재하는 곳이나 다름없다. 흙벽돌로 된 2~3층의 집들은 대체로 모든 벽에 흰색 회칠을 해놓았다. 1층은 따로 외양간이나 마굿간으로 사용하는 집도 있지만, 상당수의 집들은 골목과 집 사이가 그냥 외양간이고 마굿간이다. 해서 티벳구역 골목에서는 유난히 많은 소들이 눈에 띈다. 집의 담과 벽에는 ‘쭤’를 붙여놓은 풍경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담과 옥상 벽에 쭤(야크나 소똥을 칭커짚과 이긴 덩어리)를 붙여놓은 티벳 전통가옥. ‘쭤’란 야크나 소똥을 칭커짚과 섞어 흙반죽을 하듯 둥그렇게 만든 덩어리를 가리킨다. 이 쭤는 볕이 잘 드는 벽이나 담에 붙여놓았다가 다 마르면 불쏘시개로 사용한다. 지붕에는 나뭇가지에 타르쵸를 걸어놓은 룽다가 집집마다 걸려 있고, 대문에는 티벳불교를 상징하는 해와 달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다. 내가 골목을 배회하며 자꾸만 셔터를 누르자 멀리서 나를 보고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던 아이들이 금세 대여섯명으로 늘어나 졸지에 나는 아이들을 이끌고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녔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검사를 맡아야 했다. 아, 이 귀여운, 무서운 녀석들!
라마불교를 상징하는 해와 달을 그려놓은 대문. 아침에 간체에 도착해 저녁이 다 돼 얼추 구경이 끝났다. 가는 길에 시가체로 간다는 택시를 집어탔으나, 택시 기사는 능청맞게 50원을 부른다. 25원에 시가체에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는 내게 바가지를 씌우려 했던 것이다. 내가 택시를 세우고 25원 아니면 안가겠다고 하자 택시기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4명의 손님을 채우기까지 무려 50분이나 간체 시내를 돌아다녔다. 갑자기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한바탕 소나기를 퍼부어댔다. 택시는 그 소나기를 뚫고 시가체를 향해 달렸다. 역시 택시는 아침의 자가용이 그런 것처럼 단번에 시속 100킬로미터를 넘어섰다. 졸음이 밀려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느 새 택시는 시가체에 당도해 있었다. 이제 티벳에서의 날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비가 그친 하늘에서는 슬프고 아린 초승달이 돋았다. = 글/사진: 이용한 http://blog.daum.net/binko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