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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곡 주륵사지에서 낙동으로 올라가 낙단보 마애불을 보고 다시 도개로 내려왔다. 신곡 문수사에 가기 위해서다.
신곡은 도개에서는 가장 큰 산이 있는 험한 곳이고 골짜기가 길고 깊어서 어릴 때부터 참으로 먼 곳으로 여겨지던
곳이다. 거기엘 가자면 웃장터에서 신평을 지나고 한실을 지나고 다시 오른쪽에 농바우를 지나 한참을 더 동쪽의
산을 향해 올라가야 한다.
거기서도 친구들은 걸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간혹 고사리가 찍힌 화석을 주워오기도 하고 수정을 주워오기도 하며
노루고기를 도시락 반찬으로 가져 오기도 하여서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마치 동화 속의 먼 산골 아이들 보듯
하였다.
신곡을 현지 어른들은 사일, 새일, 사곡 등으로 불렀는데 그 어원을 짐작하기는 힘들었다. 아마 가장 먼저의 이름은
'사일'일 것인데 그 '일'은 골짜기를 뜻하는 '실'에서 나와서(임호의 '야가실'처럼) 반치음 과정을 거쳐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사일'이 'ㅣ'모음 역행동화로 인해서 '새일'이 되었을 것이고...그 '실>일'을 한자로 적어서
곡(谷)이 나온 것이다.
즉 사일, 새일이란 이름은 '사실>사일>새일'의 변천과정을 거친 것이다. 또 '사일'에서 '일'을 골짜기로 알아서
'사곡'이 되었고 '새일'에서 '새'를 '새로운'의 뜻으로 보고 新谷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 저 이름들 중에서 신곡이
가장 나중에 생긴 이름인데 원래의 '사'를 '새로운'의 '새'로 잘 못 해석한 결과이다.
그런데 사실상 '사일' 할 때의 '사'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불분명하다. 보통의 경우 마을은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
들어서는 수가 많아서 '사이'의 뜻으로 쓰이는 수가 많기는 하다. 어쨌든 신곡의 원래의 이름을 따르자면 지금 전하는
이름 중에서는 '사일'이 가장 오래된 이름일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은 '사실', 또는 '사이실'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곡에는 큰 산봉우리가 두 개가 있는데 문수사가 있는 뒷 편 산이름이 장자봉(421.5m)이고 오른 쪽에 있는 산이
문수산(366m)이다. 장자봉은 그 왼쪽으로 '열재'를 지나 만경산(499m)으로 이어진다. 만경산을 넘으면 의성군
단밀면이다. 어릴 때 만경산에 올라 꼭대기에 장대를 세우고 깃발을 하나 단 적이 있었다.
열재는 신곡 '열골'에서 단밀로 통하는 지름길인데 옛날 산적들이 출현하곤 하여 열 사람이 뭉쳐야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것을 또 굳이 한자로 적어서 십령(十嶺)이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십령이라... 처음 지도를 보고는 저 십령이 뭔지를 몰라서 한참을 어리둥절하였으니...한자로 안 적으면 어디 탈이라도
나는 것인지...알고보니 열재인 것을...
1618년에 발간한 <일선지(一善志)>에는 이 열재를 여을현(余乙峴)이라고 하였다. '재'는 뜻을 따라서 峴으로
썼고 '열'은 소리를 따라서 억지로 한자를 '여을(余乙)'로 적었는데 그래도 십령보다는 원음에 가까워서 훨씬 낫다.
어릴 때 가끔 마을에 소도둑이 들어 밤에 소를 훔쳐 가는 일이 발생하곤 했었는데 그 다음 날 마을 어른들이 편을
맞추어 온 사방을 수색하다 보면 주로 열재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도둑이 밤새 열재를 넘어서 단밀
쪽으로 빠지고 나면 그 다음은 내륙 깊숙히, 큰 장이 서는 안계 쪽으로 통하니 찾지도 못 할 일이었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집안에서 보물 1호였을 텐데 소를 잃어버리고 가족들은 얼마나 시름에 겨웠을 것인가...
장자봉 아래에는 사곡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는 1964년인가...내가 국민학교 저학년에 다닐 때 몇 년 동안
사람들을 동원하여 지게를 지고 흙을 나르며 판 것이다. 아마 지금 생각하기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일을 하고 밀가루며 옥수수가루 등을 타오기도 한 것으로 보아 일종의 구휼정책이었던 것 같다.
절은 거의 산 중턱보다 위에 있지만 차도가 잘 나 있어서 절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다. 이 절은 부모님을 모신 곳이라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랫 동안 이 절의 주지를 맡아오신 혜향스님은 세수 74세로 작년
11월 초에 입적하시고 지금은 다른 분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상 1972년부터 그 스님이 오시고 절을
현재상태로 중창한 것이나 다름없다. 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는데 옛날과는 무척 달라져 있어서 건물이며
모든 것이 옛 기억과 잘 맞지 않는다.
이 절은 당나라에 유학을 갔던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과 같은 이 곳 지형을
보고 이 산 굴에 들어가 이레 동안 기도를 올리고는 문수보살이 현신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따라서 땅을 파
보니 문수보살상이 나와서 거기에 문수전을 짓고 절이름을 문수사라 했다는 것이다.
자장율사는 생몰 연대가 불확실한데 신라 중기에 활약한 분이다. 자장의 이름은 김선종(金善宗)이며 신라 귀족
진골 출신 소판(蘇判) 김무림(金茂林)의 아들로 636년(선덕여왕 5)에 왕명으로 제자 실(實) 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운제사의 원향(圓香)을 만났다. 자장은 원향의 권유에 따라 청량산(당)으로 가서 문수보살상에
정성을 다해 예배했다고 한다.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해서 분황사, 황룡사 등에서 강론하였고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황룡사를 비롯 월정사,
태화사, 대둔사를 차례로 건립했다. 또한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 645년(선덕여왕 14)에 완성하고,
취서산 독룡이 사는 연못을 메우고는 통도사를 창건하여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했다. 만년에는 강릉군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뒤에 태백산에 석남원(石南院; 淨巖寺)을 세워 그 곳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어느 절이나 다 창건역사를 올려잡고 고승 대덕을 창건자로 삼아 절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장자봉인 이 산을 더러 청량산(淸凉山)으로 부르기도 하고 또 절이름이 문수사(文殊寺)인 것을 보면 자장율사와는
이런저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근거를 따지자면 전래하는 탑재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절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618년에 간행된
<일선지(一善志)>에는 납석사(納石寺)로 이름이 나오고 있어서 문수사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 납석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수사라는 이름은 그 후대에 지어진 이름임을 알 수 있는데 전래하는 연혁으로는, 1865년(고종 2)
도적의 침입으로 폐사되었고, 수년 후 혜봉선사(慧峰禪師)가 중건하면서 문수사로 사명을 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라시대의 자장율사와 관련된 것은 '문수사'란 이름의 공통점을 찾아 미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절이 신라시대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 때는 납석사였거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을 것이므로 자장, 문수보살..등의
이야기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문수사란 이름은 조선 말기에 와서 비로소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절은 1948년에 재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의 사세를 가지게 된 것은 1972년에 오신 혜향스님 덕분이다.
문수사가 있는 이 산은 높은 바위벽으로 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오랜 옛날 강바닥이 융기해서 형성된 산임을 알 수
있다. 강에서 모래에 닳은 자갈과 모래가 퇴적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 위쪽으로 170미터 정도를 더 올라가면 1993년에 개축한 사자암이 있다. 사자암은 천연 동굴을 이용해서 앞에만
반쪽 처마를 달아내어서 만들었는데 옛부터 이 골짜기에 이런 굴이 있어서 굴암골이라고 불리어 왔으며
옛날 이 굴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이 굴은 천연동굴로서 길이가 약 10m, 높이는 약 6m,
너비가 약 15m이다.
내부는 움푹 들어간 굴로 되었는데 모래와 자갈이 퇴적된 것으로서 굴은 아마 해식작용으로 인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는 강이 아니라 바다였다는 뜻인데...그것까지는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이다.
굴 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삼존불을 모셨다.
사자암에서 다시 천천히 내려온다. 해는 서산에 기울어져 가고 조금씩 어둑해 지는 시각이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이고
여기는 그야말로 내 고향 땅이니 두려울 것도 없고 낯 설 것도 없다.
불상은 절 옆 마당에 넓은 터를 잡고 잘 모셔져 있다. 이 불상들은 원래는 다곡에서 면소재지로 오다가 있는 마을인
재궁과 원당곡 뒷산의 부처골에 있던 것이다.
국민학교 3학년 때던가 4학년 때던가...쿵쿵바우를 간다고 그 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쿵쿵바, 사진제공;한샘>
쿵쿵바우를 줄여서 쿵쿵바라고 하는데 그 쿵쿵바는 이 곳처럼 큰 굴이 산 꼭대기 바위에 파여져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 가슴을 치면 쿵쿵 울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산길이 지금은 숲이 우거졌을 것이지만 그 때의
기억으로는 이 곳 문수사에서 보는 것처럼 작은 자갈이 많은 척박한 땅에 메마른 소나무들이 겨우 붙어 사는
그런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원당곡과 재궁은 이웃해 있는 동네여서 뒷산을 같이 쓰는 셈인데 따라서 재궁 뒷산이라고도 하고 원당곡
뒷산이라고도 한다. 거기 부처골에 있던 불상을 1973년에 도개중학교 교정으로 가지고 왔는데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불상이 없었으니 아마 졸업한 다음 해에 옮겨 온 모양이었다. 그 불상은 학교 정문 옆 화단에 모셔져 있다가 학교를
다시 증설하고 교정을 바꾸는 관계로 2008년 1월 10일에 이 곳 문수사로 옮겨져 왔다. 그 때 다른 절과 경쟁을
하다가 문수사로 오게 된 내력, 유형문화재로 등록 될 때의 이야기 등은 재미있는 내용이지만 여기서 밝힐 수는 없다.
불상이 모셔져 있는 이 터와 건물이 있는 곳이 옛날 납석사터라고 알려져 있다.
불상은 2기가 모셔져 있는데 왼쪽 것이 문화재로 등록된 것이고 오른 쪽은 비지정문화재이다.
불상은 대좌와 몸체, 광배까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광배의 윗부분과 불상의 머리가 크게 파손된 상태이다.
대좌는 사각형으로 만들었고 대좌의 아랫부분까지 옷주름이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다.
광배는 윗부분이 잘려 나간 상태로 아마도 끝이 뾰족한 타원형의 배모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배에는 타원형의 선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여 안과 바깥을 구분하였다. 바깥 쪽에는 불꽃 무늬를 조각하였고
안 쪽에는 덩쿨무늬와 연꽃무늬, 작은 부처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조각은 선이 굵은 편이지만 깊고 화려하다.
머리는 파손이 심하여 자세히 살필 수는 없는데 우뚝 솟은 상투형 보계의 흔적이 보인다. 얼굴 역시 마모가 심하여
눈,코, 입의 윤곽을 알 수 없지만 짧게 표현된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신체는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어깨는 좁고 허리는 아주 가늘게 묘사되었는데 좁은 어깨와 가슴, 양 팔 등은
양감이 있어서 풍만해 보인다. 거기에 비해 결가부좌의 하반신은 다소 좁은 모습이다.
옷은 양어깨에 걸쳐져 있다. 마모가 심해서 구체적인 것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흘러내린 옷은 신체에 얇게 밀착되어
신체의 굴곡이 잘 드러나 보인다.
옷은 무릎 아래로 흘러내려 대좌를 완전히 뒤덮고 있다. 대좌 밑으로 드리워진 옷주름은 대좌의 중앙에서 U자로 반원형의 층단을 형성하며 마무리되었다.
왼 손은 배꼽부분에 대고 있고 오른 손은 가슴 쪽으로 올려 연꽃 줄기를 잡고 있는데 연꽃 줄기는 맨 아랫 부분이
왼 손바닥 위에 있고 가운데 줄기를 오른 손이 잡고 있다. 연꽃가지의 줄기가 왼 쪽 허리에서부터 가슴을 거쳐
광배에까지 두드러지게 올라와 있으며, 광배에는 연꽃 봉오리가 크게 돋을새김 되어 있다.
두 손으로 이렇게 연꽃줄기를 잡은 예도 희귀하려니와 연봉의 끝이 광배에까지 이어져 크고 도드라지게 묘사된 예는
독특한 것으로서 잘 보지 못 한 것이다.
손모양으로 본다면 어느 본존불의 좌우 협시보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의 특징은 광배의 뒷면에도 앉아 있는 모습의 작은 부처를 선으로 새겼다는 점이다.
대좌의 밑 부분은 이중으로 솟은 연꽃을 새겼고 그 위에 띠를 두른 다음 다시 꽃무늬롤 조각하였다.
<도개중학교 시절의 옛 사진>
조각은 얕은 선각으로 하였다. 불상이 앉은 주변은 마치 방석모양으로 넓고 크게 연꽃을 둘렀다.
머리부분과 신체 부분에는 두광과 신광을 둘렀고 머리는 육계가 뚜렷하다.
목 위로는 마모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 없는데 어깨 이하 몸 부분은 비교적 형채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손모양을 보아서 비로자나불인데 옷모양은 간략하게 몇 개의 선으로 처리하였다.
광배 뒷면에 이렇게 조각을 하는 예는 통일신라시대에 가끔 나타나는 것으로서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균형잡힌 몸매, 단아한 형태미와 특징적인 광배, 섬세한 조각 수법 등 당시 보살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으로서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오른 쪽에 있는 불상은 마모가 매우 심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 불상도 광배를 몸과 한 돌로 만들었는데 목 위 부분은 완전히 파손되었지만 어깨 아래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신체의 비례는 왼쪽의 지정문화재와 거의 같은 모습이다. 좁은 어깨와 잘룩한 허리, 양감이 풍부한 가슴, 팔의 모습이
그러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고 가슴 쪽을 둥글게 원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왼쪽 다리와 발은 또렷하게 형상이
남아 있다.
이 불상도 왼쪽 불상과 같이 왼손으로 연꽃 줄기를 받치고 오른 손으로는 줄기의 가운데를 잡고 있으며 연꽃은
오른쪽 어깨를 지나 광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뒷면에 조각을 하지 않았는데 왼쪽 불상과 협시보살이라면 양쪽에 배치하였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두 불상이 연꽃을 서로 어긋나게 들고 있어야 할 것이다. 즉 한 불상은 왼쪽 어깨로 올라가야 할 것인데
두 분 다 오른쪽으로 들고 있으면 어쩐단 말인가?
혹시 재궁 뒷산 부처골에는 이와 똑 같은 양식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연꽃을 든 불상 두 기가 또 있다는 말인가?
재궁 뒷산에서 내 모교 교정을 거쳐 부모님을 모신 이 문수사에서 두 불상을 뵙게 되다니 그 인연도 남다르다면
남다를 것이었다.
절 옆에는 석탑재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원래 이 절에도 석탑이 한 기 있었다고 하며 40여년 전만 해도 부재가 꽤 남아 있었다는데 그 사이에 탑재를
다른 용도로 써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몇 부재만이 남아 있다.
기단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옆면에는 안상을 새겼고 지붕면은 경사를 두었으며 위에는 호각형 2단의 괴임을
새겨올렸다. 기단의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같은 돌에 형식적으로 표시만 한 것이다. 지붕돌의 파편은 밑면에
2단의 받침을 두었고 찰주공이 뚫린 상층 몸돌도 보인다. 낮은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주변에서 발굴되었다면 부재를 더 찾을 수도 있지 않을런지...이 탑재들도 불상 옆에 같이 안치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기단에 안상을 새기고 하나의 돌로 기단의 상,중,하대를 합쳐서 만든 것, 몸돌이 저렇게 낮은 것 등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양식은 아니니 시기는 고려시대 이후로 내려올 것이다.
이 절이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있었다고 하는 유일한 증거가 이 탑재이다. 절보다 탑이 늦게 건립되는 수도 많으니
절은 그 이전, 즉 신라시대부터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자암에서 내려다 본 도개면 소재지이다. 바로 앞에 보이는 저수지가 사일못(사곡지)이고
멀리 낙동강이 쭉 뻗어 흐른다. 낙동강이 만들어 준 논밭에 우리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강을 건너 사진 한가운데 있는 산을 넘으면 선산인데 그 산 왼쪽 너머에 그 유명한 죽장사 오층석탑이 있고
오른쪽 너머에는 무을 수다사가 있다.
아까부터 저 눔 사자개가 나를 유심히 보고 있더니 날이 저무는데도 안 가고 있는 것이 못내 불만인 모양이다.
이제는 더 보아줄 수 없다는 듯 참지 못 하고 나에게로 접근해 온다. 저 눔도 내가 보신탕을 먹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물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겁이 나서 얼른 내려왔다. 고향에 와서 개한테 물렸다는 것이 소문이라도 나면
얼마나 큰 창피일 것인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이다.
소재지 ; 경북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산68번지 문수사
2011. 5. 7.
머루눈
첫댓글 글올리는 공간이 같은 다음인데도 블로그와 다른가 봐. 거기 글을 바로 복사해 올리면 옆에 자꾸 잘려나가서 조정하니 들쭉날쭉이네...불편하구만...
신곡 촌넘들 단디 봐라. 문수사다. 신평, 한실, 농바도 마찬가지...^&^
신평 오워인데... 단디 보고싶은디 이렇게...... 길면........ 에혀.. 저 사자개는 잘생겼네.... ㅎㅎ
술마시면서 읽어바바.
나도 이제 기력이 다 떨어져 가나보다...중간쯤 내려오니 앞에서 멀 읽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그나저나 이 자세한 내용들을 어떻게 알아낸거여?? 땅을 파면 나오나..하여튼 대단타..ㅎ
ㅋㅋ...삽질을 열심히 하다 보면 나와여.
대단하다,머루눈 ^^우리 동기회의 자랑이다. 역시 국문학자라 글도 사진도 ....놀랍다. 김교수님은 능력이 있으셔 ~ 가끔씩 좋은글 올려봐라^^
ㅋ..칭찬하믄 자꾸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