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긴 시간을 앉아 있다. 유일하게 책을 읽는 공간이다. 단편소설의 끝 무렵에서 책을 접는다. 대각선 앞 바닥에서 재빨리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 검고 작은 벌레였다. 달리는 동작은 여간 빠르지 않다. 이내 모서리에 착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조건반사적으로 손은 어느새 휴지로 간다. ‘저놈을 잡아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그러나 손을 거둔다. 저 미물도 하나의 생명체인데! 선뜻 다가온 이 가을에 저놈을 잡는다는 자체가 마음은 허하지 않아서였다. 그때 놈은 달아났다. 그리고 한동안 정지한 채로 있더니 욕실 주위를 돌며 가다 서길 반복한다. 나도 조용히 일어나고 만다.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문을 나서니 상큼한 공기가 기분을 돋운다. 정오가 지날 무렵은 운동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오전 시간을 서실書室에서 보내고, 마음에 점을 찍은 후 홀가분하게 운동화 끈을 묶는다. 까치 두 마리가 나뭇가지서 곡예를 하며 조잘대는 모습이 정겹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 동안 바라본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만난다. 나무 아래에 서서 바람을 맞는다. 산들바람이다.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시원하다. 한 줄기 바람이 이렇게 청량감을 줄 줄이야. 고맙다. 목덜미며 팔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쓱 훔친다. 얼굴에 맺힌 액체가 입술을 타고 입으로 스며든다. 짜다. 입을 크게 벌리고 옷자락을 들치어 바람을 가슴 가득 품어본다. 기분이 점점 상쾌해진다. 이처럼 좋은 날 스멀스멀 생각나는 앞으로의 일들을 어떻게 해결하지? 어쨌든 처리할 문제가 앙금처럼 남아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자기 속에 심증을 가지고 해야 한다. 심증을 가지고 한 일이라면, 남이 무어라고 한다 해서 쉽사리 부화뇌동, 주견도 없이 남의 의견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음만 못하다. 하지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듯, 생선 한 토막이라도 어떤 양념으로 얼마나 맛있게 요리하느냐는 요리사의 솜씨와 능력이 아닐까?
우생마사牛生馬死란 말이 있다. 소와 말을 강물에 몰아넣고 건너게 하면 말馬이 두 배 이상 빨리 헤엄친다. 그러나 급류에 몰아넣으면 말은 죽고 소는 살아난다. 왜냐하면, 말은 헤엄을 잘 치기 때문에 떠내려가면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저항하다가 결국, 힘이 빠져 물속으로 잠기지만 소는 물결 따라 떠내려가면서 차츰 언덕을 향하다가 모래톱이 나타나면 뭍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다. 조금 잘 나간다고 대세를 거스르면 우리의 삶도 실패한다는 교훈이다. 삶이 순리를 찾아야 하듯 우리 인생도 삶의 궤적을 찬찬히 음미하며 어제를 되돌아보고 내일의 지평을 열어가리라 생각된다. 어렵고 힘든 상황일수록 말처럼 발버둥 치며 힘을 빼기보다는 소와 같이 도도한 물살에 몸을 맡기는 지혜도 한 방법이지만 시간이 너무 흘렀다.
얼굴 이마 부분이 간지러웠다. 이리저리 만져보았지만 별 이상은 없었다. 조금 후 다시 가려워 이곳저곳 만져보니 까만 모기가 횅하고 달아났다. 아마도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탄 놈 같았다. 이놈이 이마에 대고 인사를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놈을 따돌리기에는 이 공간에서 난감하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난다. 자다가 모깃소리가 나면 온 식구들은 비상이 걸리곤 했다. 모기를 잡으면 다행이지만, 못 잡는 날은 방장을 쳤다. 별수 없이 기다리며 제발 나가길 바란다.
양껏 물오른 제철 사과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어도 이물감이 없다. 가을은 여름내 까칠했던 내 입속으로도 따라온다. 온몸에 사과의 물길이 번진다. 계절의 경이는 가까이에 있다. 비로소 생생하게 삼백육십오일 전의 계절을 기억해 내는 나의 오감이 고마웠다. 어젯밤 잠 못 들게 하던 책이 그대로 놓여있다. 그래! 오늘 문득 온 게 아니었다. 밤이 길었던…. 그래서 무심히 책을 펴든 지난밤부터 느껴야 했었다. 선뜻 다가온 이 가을에 엉큼하게도 이미 저 베르사유 책갈피 속에 먼저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