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늦게 와 죄송합니다
— 시인 이열 선생님 추모 모임에서
매년 스승의 날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선생님이 있다.
시인 이인열 선생님.
서라벌중학교 1학년 때 국어선생님이셨는데
고등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내게 삶을 일깨워주신 분이다.
'이열'이란 필명을 쓰셨는데,
단순히 국어 교사가 아니라 나를 문학으로 이끌어,
선생님의 가르침은 내 문학의 밑바탕이 되었다.
고교 2학년 때 학내 시위 문제로 상담실로 넘겨졌을 때
선생님께서는 내게 교회에 나오라 이르셨다.
그렇게 찾아간 교회 - 종로구 돈의동에 있었던
기독동신회 중앙교회 돈의동 교회학교 고등부였다.
신앙보다는 여학생들 만나는 재미로 다녔는데
그렇게 교회에 다니게 된 경위가 훗날 내 장편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의 소재가 되었고
그 작품이 내게 순수문학상을 안겨주면서
몇 주 연속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소설가로서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요기 참조 → https://blog.naver.com/lby56/221940667570)
교회에서 선생님의 훈육 방법은 독특했다.
단순한 신앙심 고취가 아니라 인간교육이었다.
성경 대신 노자나 장자를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을 읽었고
당시로는 금기시되던, 남여 학생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포크댄스까지 경험했으니까.
그렇게 입시 위주의 학교 생활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접하며 우리들의 안목이 넒어진 것은
오로지 선생님의 가르침 덕이었다.
고등부를 졸업한 후, 그해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매주 선생님 댁에 가 청년부들과 공부를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인도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 강의였다.
군복을 입은 후에도 거의 일주일에 한 번은 편지를 드렸다.
선생님도 매번 답장을 주셨는데
그렇게 오간 편지만 박스 하나에 가득찼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편지글을 통해 귀한 가르침을 받은 셈이다.
현역 육군 중사 신분으로 1978년 <소설문예> 신인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
선생님깨서는 당신의 일인양 좋아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쓴 시를 보시더니
시보다는 긴 글을 쓰는 게 더 낫겠다 하셨는데
그것이 결국 나를 소설가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평생을 앓으시던 페질환.
서라벌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계시는 동안 수시로 휴직을 하시며 요양을 하셔야 했으니까.
결국 1986년 11월 27일,
당시에는 남산 밑 퇴계로에 있던 중앙대학교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원경선 아저씨가 운영하던 공동체 풀무원에 누워계셨는데
몇 번 찾아가 묘소 앞에서 인사를 드렸지만
모란공원으로 이장을 한 후에는
선생님의 조카로부터 소식을 들어 위치를 알고 있었음에도
먹고 살기 바쁜 것도 아니었으면서
찾아뵙지를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비록 묘소에 참배는 못하더라도
문득 문득 그리고 매년 스승의 날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스승이 바로 선생님이셨다.
그저 마음속에 묻어두었다고 해야 할까 - 실은 그것도 변명이다.
.
.
지난 10월 어느날,
돈의동 교회학교 고등부 친구였던,
거창에 있는 샛별중학교, 거창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정년퇴직한 미숙이가 연락을 했다.
내게만이 아니라 동기생 여러 명이 단톡방에 초대되었다.
그리고 꺼낸 말 - 모란공원 선생님 묘소에 가보자는 것.
다들 나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다들 뚜렷하고 공통된 것이니
여러 명이 참여를 약속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0년이 훌쩍 지나고
이제 70줄에 들어서서야 선생님 생각을 한다.
내게는 참으로 특별한 선생님인데 내가 이렇게 무심했구나, 하는 자괴감.
그런 반성이 더 적극적으로 가자고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8 명의 제자들이 뜻을 합쳤다.
2024년 11월 14일,
늦은 두 시에 상봉역에서 만나서는
마석역으로 이동하여 그곳으로 온 친구와 합류했다.
나야 고교 졸업 후에도 중간 중간 만난 친구들이었지만
여덟 명 서로는 50년 만에 첫 만남인 경우도 있었는데, 막상 얼굴들 맞대고 보니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인데 서로 건네는 말이나 대답들이 50년 전 딱 고3 학생들이다.
두 대의 택시로 모란공원으로.
선생님께서는 가족납골묘에 누워계셨다.
선생님의 부모님 그리고 선생님과 치과의사였던 동생.
꽃집 사장인 준민이가 준비한 국화꽃 한 송이씩 들고 인증샷부터 찰칵.
전남대 교수였던 진봉이가 자동으로 설정을 했다.
(좌로부터 목사 경민이, 꽃집사장 준민이, 미숙이, 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시절 사무차장을 지낸 원수, 코트라에 있었던 응천이, 소명여고 교사 퇴직후 평화나무농장 농부인 혜덕이, 그리고 전남대 교수 출신 진봉이)
다 같이 한 사람씩 헌화를 했다.
경민이의 인도로 다 같이 기도하고.
나는 아멘 소리만 우렁차게 했다.
그리고 경민이가 준비한 찬송가 - 선생님께서 좋아하셨단다.
1절과 2절을 불렀다.
나도 잘 아는 찬송가 - 힘차게 불렀다.
이어서 혜덕이가 선생님의 이력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시인 이열의 시, 이병렬 낭송'
선생님 시 한 편을 내가 낭송했고,
(선생님의 이 시는 내 블로그에 해설을 해놓았다.)
→ https://blog.naver.com/lby56/221332810529
'1975년 5월 8일, 선생님의 생신을 맞아 제자 이병렬이 쓴 시 - <당신은~~>'을 내가 낭송했다.
군 복무중이었는데, 이 무렵 선생님의 고집(?)과 내 어리광(?)이 부딪혀 많이 지쳐있었다.
묘소 앞에 죽 늘어선 채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선생님과의 추억 한 토막씩 꺼냈다.
모두의 추억담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남학생 모두의 공통된 추억.
신앙보다 여학생 만나는 재미에 자주 나왔다는 것.
게다가 선생님의 가르침이 학교와는 전혀 다른 별천지였다는 것과
그러다 보니 어느 덧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것 같았다는 느낌은
남학생 여학생 모두 공통된 것이었다.
이는 미숙이의 추도문에도 잘 나온다.
교회학교 동창들이기에 추모 모임이 예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내가 추억을 말할 차례에 나는 '내 식으로 하겠다'고 하고는
넙죽 두 번 절했다.
'선생님, 너무 늦게 와 죄송합니다' 인사도 했다.
모두들 내 성향을 알기에 뭐라 하지 않았는데
예배고 기도고 간에 그렇게 절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어지는 미숙이의 추도사.
개인적인 인연으로 시작하여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
선생님으로부터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배웠으니까.
부러 박수까지 쳤다.
마지막으로 다시 간단하게 기도하고
남겨둔 찬송가 3절을 마저 불렀다.
목사인 경민이가 있고, 이런 행사에 익숙한 교사 출신 미숙이가 있으니
선생님 추모 모임이 아주 작은 예배 형식으로 잘 짜여졌다.
다시 인증샷 한 장 박자.
진봉이가 자동으로 설정하여 여덟이 다 함께 찰칵.
70을 넘기고 혹은 70줄에 들어선 학생들
말하자면 돈의동 교회학교 고등부 동기동창에 같은 반이었던 셈이다.
이들 중 일곱은 위 두 번째 사진에도 있다.
남학생들만 다시 한 장 찰칵.
마석역으로 와 상봉역까지 전철로 이동.
예약해 둔 음식점으로.
이런 음식을 먹었는데 당연히(?) 막걸리도 몇 병 비웠다.
나는 흑맥주(콜라)만 마셨다.
나야 뭐든 잘먹는 식성 - 맛나게 먹었다.
서빙하던 직원이 이렇게 찍어줬고,
다시 이렇게 찍고
요렇게 손수찍기로도 찰칵.
오랜 만에 보는 얼굴이 있으니 그간 어찌 살았는지 밝히라는 미숙이의 엄포(?).
하긴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다.
공통된 것, 70 줄에 들어선 삶에 음과 양이 왜 없겠는가
다만 모두가 하나 같이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
음식점의 저녁 시간 - 너무 긴 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미안하다며 자리를 옮기잔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대화는 계속된다.
하긴 50년 만에 만난 친구도 있으니 하고픈 말, 듣고픈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게다가 교회에서 마주했던 많은 어른들이 이미 하늘의 부름을 받았고
동기동창 승학이까지 먼저 갔다.
미숙이가 다른 친구들의 안부와 함께 근황을 전해줬다.
진봉이가 찍고,
응천이가 찍고.
사회적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같은 교회에서 같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는 것,
게다가 그 선생님이 참으로 존경스런 분이라는 것.
그런 추억으로 동기동창을 넘어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디 그 뿐인가.
내가 넘어졌을 때 이들 중 몇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가.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나야말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이들과 함께 이인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내 친구들이라는 게 참 자랑스럽다.
1년에 한 번은 정기 모임으로 하고
서로 연락하여 번개든 뭐든 종종 얼굴보자, 약속을 했다.
"나이에 비해 얼굴 빛이 참 좋네."
고등학교 동문인 경민이가 건넨 말.
내 대답은 - 능청맞게 "사랑하니까.'"
다들 웃는다.
그 나이에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게 놀랍단다.
사랑에 뭔 나이?
이들이 내 친구들이고, 이들과 함께 선생님 추모 모임을 가졌다는 것.
이 모임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 내게 있다는 것.
다 내 복이다.
그러니 나는 참 행복한 놈이다.
그런데, 선생님,
너무 늦게 찾아뵈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집으로 오는 전철을 타면서도 그런 생각이었다.
고마우신 선생님이이신데~~~
못난 제자 용서하시고
그 나라에서는 평안하소서~~~!
— 11월 14일 일기 끝
첫댓글 부러운 일입니다.
훌륭한 스승님을 모시게 된 점과
아직까지 친구로 이어지고 있다는 일은 쉽지않을 일입니다.
돌아가셨지만
친구들과 찾이 뵙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마음 훈훈해 지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