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읽을거리
5. 팔미라(Palmyra) 유적의 수난
광대한 팔미라 유적군(遺跡群)
아름다운 알랏의 사자상 /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는 엄청난 규모의 팔미라 유적 1,2
참수된 아사드 박사 / 폭파되는 알랏의 사자장 / 폭파되는 바알신전
팔미라(Palmyra)는 시리아(Syria) 사막 가운데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번성하였던 고대도시로 지금은 인구 5만의 타드무르(Tadmur)라는 작은 도시로 존속하는데, 그 인근에 흩어져있는 ‘팔미라 고대도시 대 유적군(大遺蹟群)’은 1980년 유네스코에서 인류문화유산 제25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시리아 사막 오아시스에 실크로드(Silk Road)의 중계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대도시 팔미라는 AD 129년경,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Hadrianus/14대 황제/1세기)가 방문하며 ‘자유시(自由市)’가 되었다가 카라칼라 황제 때 식민도시(植民都市)의 지위를 얻고 세금을 면제받으면서 3세기부터 전성기를 맞았다고 하는 고대도시이다.
로마의 식민도시였던 팔미라는 페르시아 사산(Sassanid Persia)왕조 때 왕권을 잡은 제노비아 여왕이 로마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AD 273년, 로마황제 아우렐리우스의 명령으로 수도(首都)였던 팔미라는 파괴되고 여왕은 로마로 압송되는 비극을 맞게 된다.
고대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Damascus)와 함께 가장 유명한 도시였던 팔미라는 그 이후 수백 년간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묻혀 잊혀 졌었는데, 17~8세기 낭만적인 여행가들과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이 사막의 도시는 그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보는 순간 경이(驚異)를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 성서(聖書)에서도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지혜의 왕 솔로몬(Solomon)이 악령(惡靈)들을 동원하여 건축하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중세부터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팔미라를 일컬어 ‘사막의 진주’, ‘중동의 베네치아’ 등으로 칭송하였고, 근래에도 매년 15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몰려들던 세계 문화유산 중 하나였다. 시리아 사막 가운데 사방 10km에 걸쳐 흩어져있는 팔미라 유적은 건물은 모두 그리스식이지만 모든 의식은 오리엔트 형식을 따랐다고 한다.
유명한 건축물들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개선문(凱旋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욕탕(浴湯)’, 사방 200m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알(Baal)신전’, 극장 역할을 했던 84m×71m의 규모의 ‘아고라(Agora)’, 신전으로 가는 1km 길이의 도로 양편에 늘어서 있는 11m 높이의 열주(列柱) 등은 지금도 보는 이들을 압도한단다.
‘팔미라’는 현지어로 ‘대추야자 숲’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팔미라 대유적의 비극은 2015년 5월 20일, 이슬람 수니파의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Islamic State/이슬람국가)에 점령당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알카에다(Al-Qaeda)가 이끄는 무장단체의 일파(一派)로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Abu Bakr al- Baghdadi)’가 이끄는 조직인데 시리아와 이라크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2014년 6월, 독립국가로 선포한다. 그러나 국제기구(UN)를 비롯한 서방(西邦) 여러 나라에서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들은 정통을 잇는 이슬람 국가로, 옛 영광을 되찾는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시리아(Syria)와 이라크(Iraq) 및 이들을 지원하는 서방국가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고 전쟁을 피해 이 지역을 탈출한 난민들은 유럽 여러 나라로 흘러들며 주변의 나라들은 이들 난민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슬람 무장단체 IS는 자신들의 종교(이슬람)와 다르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가 하면 팔미라 대 유적도 우상숭배의 잔재들이라 하여 파괴를 서슴지 않고 있어 세계를 경악시키고 있다. 이들은 전쟁포로들뿐만 아니라 무작위로 납치하는 인질은 물론 무고한 기자들까지 잔혹하게 칼로 목을 자르는 참수(斬首)를 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만들어 유포시키고 있어 더욱 악명이 높다.
팔미라 연구의 세계 최고의 권위자였던 시리아의 고고학자 칼리브 아사드(83세)는 보물이 있는 장소를 대라는 이슬람 무장단체의 압박과 고문에 끝까지 함구하다 지난 8월, 결국 참수를 당한다.
이 밖에 우리에게 알려진 사건으로 ‘21명의 이집트 곱트 교도 참수(斬首)’, ‘한국인 김선일 선교사 참수’,‘일본인 고토겐지(後藤健二/프리랜서 기자) 참수’,‘미국인 기자 폴리 참수’..... ♣ 참수(斬首)-칼로 목을 자르다.
이들이 지난 7월 파괴한 알랏의 사자상(높이 3m, 15톤)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팔미라 최고의 보물로 꼽혔는데 ‘알랏’은 이슬람 이전의 아랍의 여신(女神) 이름인데 우상(偶像)이라는 이유로 파괴당했다. 1세기에 만들어진 2000년 역사의 이 아름다운 사자상은 팔미라 박물관 앞으로 옮겨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팔미라 왕족의 아름다운 영묘(무덤)들 50기, 바알 신전(8월), 벨 신전(8월), 엘라벨의 탑(9월) 등 이들이 폭파한 아름다운 유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세계인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엊그제(10월 27일)는 이슬람 무장단체(IS)가 또다시 신원 미상의 인질 3명을 팔미라 유적 기둥에 묶고 폭파하여 살해했다는 기사를 보고 써 본 글이다. (2017)
6. 격동(激動)의 세월
형 피델 카스트로(1,2) / 동생 라울 카스트로
벽면 글씨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쿠바 아바나 혁명광장> / 체 게바라(그림) / 체 게바라(실물사진)
2015년 8월 14일, 쿠바(Cuba)의 수도 아바나(Havana)에 미국 대사관을 재개설(再開設)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1961년 미국과 국교가 단절된 후 실로 55년 만이다. 기사를 읽으며 중남미 격동의 60년대가 새롭게 뇌리에 떠올라 당시 상황들을 정리하여 회상해본다.
독자 생존을 부르짖으며 비동맹국의 맹주로 자처하던 카스트로(Fidel Castro/1926~)는 결국 고립을 이기지 못하고 55년 만의 화해라고 해야 하나 굴복이라 해야 하나, 결국 미국과 다시 수교를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과의 대결은 쿠바의 자존심은 세워줬지만 끝없는 경제침체를 헤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번 미국과의 화해는 49년간 장기 집권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2008년 2월 동생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1931~)에게 정권을 물려주었고, 형에 비하여 온건한 협상파인 동생 라울에 의해 미국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쿠바의 비극은 1952년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중남미 경제 헤게모니(Hegemonie/주도권)를 노리던 미국은 쿠바에 쿠데타를 사주하여 친미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미국 기업들은 50년대 중반까지 쿠바의 모든 경제권을 장악하고 마피아 세력은 호텔업과 향락산업을 차지한다.
1958년,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는 반미감정이 팽배했던 쿠바의 민중들을 끌어모으고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와 힘을 합쳐 친미정권을 몰아내는 혁명에 성공하는데 주로 미국인들의 소유였던 ‘외국인 소유기업 국유화’ 등의 정책으로 미국과 등을 돌리고 1959년 공산화를 선포한다. 미국의 코앞(플로리다에서 145km)에서 공산정권 수립을 선언하자 크게 자존심이 상한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피그스만(Bay of Pigs) 침공을 시도하는데....
1961년, 미국은 1.500명의 쿠바 출신들로 구성된 게릴라군을 피그스 만(灣)에 공중 투하시켜 카스트로 정권의 붕괴를 노리지만, 사전 정보누출과 기대했던 쿠바 내 동조도 일어나지 않아 3일 만에...
100명 이상 피살, 1.1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히며 실패로 끝난다.
1962년, 기고만장한 카스트로는 소련 총리 후르시초프와 결탁하여 쿠바에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 4곳을 건설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격분한 미국의 케네디(Kennedy) 대통령은 ‘소련에서 오는 모든 배를 수색하겠으며, 만약 미사일이 발견되면 즉시 격침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며... 세계 3차 대전(핵전쟁) 발발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으나 결국 소련의 양보(항복)를 받아내어 핵미사일 기지는 철수된다.
당시 쿠바 내 미사일 기지에는 핵미사일이 이미 9기나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고 미국 연안에서 미국에 포위된 소련의 핵잠수함 함장은 이미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착각하고 핵어뢰(核魚雷)의 발사를 명령했는데 부함장 아르키포프(Vasili Alexandrovich Arkhipov)가 발사를 조금 주저하는 바람에...
인류 멸망의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1928.6.14.~1967.10.9.)는 본명이 에르네스토 게바라(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이다.
진정한 영웅, 용기가 무엇인지 몸소 실천으로 보여 준 사람, 전설 같은 삶, 높은 도덕성, 불꽃 같은 혁명가, 끊임없는 인류애,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망하는 아이콘..... 체 게바라를 향한 찬사(讚辭)는 끝이 없다.
불꽃 같은 혁명의 길을 걸어간 체 게바라의 삶을 잠시 조명해 본다.
체 게바라는 의과대학생이던 시절, 남미대륙을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며 끊임없이 착취당하는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을 보며 안정된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고난의 연속인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혁명의 불길을 좇아 볼리비아로, 과테말라로, 멕시코로 달려가 혁명의 선봉에 서던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비로소 쿠바혁명에 성공한다. 혁명 성공 후 쿠바의 국민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전권대사 등 정치활동에 잠시 몸을 담지만,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을 알고는 훌훌히 던져버리고 다시 혁명전선에 뛰어든다. 콩고(Congo) 혁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로 끝나자 다시 볼리비아(Bolivia)로 건너가 혁명전선에 뛰어드는데 체 게바라가 왔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군들에게는 엄청난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체 게바라는 그곳에서 결국 체포되었고, 다음날인 1967년 10월 9일 처형당한다.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사망을 확인시키려 시체에서 두 손을 잘라 쿠바에 보냈다고 한다. 진정 불꽃 같은 삶을 산 혁명가의 일생이라 할 것이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혁명광장 내무부 건물 벽면에는 체 게바라의 캐리커처와 함께 그의 좌우명인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