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쁨으로 주 예수를 맞이하자 마1:1-17
주신 말씀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신약 성경의 시작으로 중요한 부분에 왜 이렇게 지루하게 17절에 걸쳐 낳고 낳고를 계속하고 있을까요?
지루하다고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족보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하는 말은 바울이 말하는 “너희가 그리스도에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진정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바로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족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혈통과 계보를 말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의 근원과 영적계보를 말해주는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가장 위대한 왕 다윗과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 왕중의 왕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 지혜이신 천지만물이 경배하는 이름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성도들이 지닌 영적 혈통이자 계보입니다.
우리의 배경은 만왕의 왕이자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며, 하늘의 시민권이 있으며 하나님의 기업을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우리 육신이 외적 조건이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영적 눈으로 자신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바라보면서 소망과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허락된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주 예수를 맞이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주 예수를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믿음과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때는 아브라함이 100세 그의 아내 사라가 90세 때였습니다(창17:17)
그들이 이삭을 낳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노쇠할대로 노쇠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태하에서 특히나 사라가 폐경이 된 상태 하에서 이삭을 낳았다는 것은 실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며 하란으로부터 떠나기를 명하신 것이 75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고향을 떠난지 25년 후에야 비로소 아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
몸은 하루가 다르게 늙고 노쇠해 가는데 몸은 점점 더 늙어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자 급기야 사라가 여종 하갈에게 아브라함이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했을까요?
그뿐 아니라 100세에 얻은 아들이 겨우 말귀를 알아들을 만 할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시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했고 마침내 이겨냄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늙었고 사라가 폐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잃지 않았으며(롬4:19),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그 모든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그 하나 하나의 역사의 과정 속에서 믿음과 인내의 과정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인내의 과정이 오늘 천국을 소망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으므로 우리들은 아무 노력할 것도 없으며 심지어 모든 고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담당했으므로 우리는 그 축복만 누리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살아가기 위해서도 많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야 하는데 하물며 영원토록 누릴 생명과 영광을 위해 심히 좁은 길, 무수한 난관과 시험을 거쳐야 하는 어려운 길임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진정한 인내와 믿음 그리고 쇠하지 않는 소망을 간직해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고 즉 장자권이 장자 에서가 아닌 차자인 야곱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장자권은 축복권과 상속시 두 배를 받는 특권이 있습니다. 에서는 이 장자권의 특권을 붉은 팥죽 한 그릇에 팔아 에돔의 조상이 됩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두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대조적으로 에서는 변두리 삶을 살다가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야곱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메시야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운명이 완전히 대조적이 된 것을 “이는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이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았다”(롬9:1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생의 길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그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에 대한 약속을 받고그 축복에 참여하게 된 것은 우리의 행위가 선하고 칭찬 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 예정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 축복중의 축복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백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물질을 주신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히 무릎 꿇고 나는 아무 공로 없으나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그 선택과 함께 해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봉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주신 은혜로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3-15)
5절에서[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에서 라함은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는데 이스라엘 정탐군을 살려 줌으로 구원을 얻은 여인이며 메시야의 조상이 된 여인입니다. 가장 천한 여인인 기생, 가부장적 사회에서 족보에 여인의 이름이 오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3절의 다말은 가나안 출신으로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아들을 낳았고,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룻 역시 모압여인으로 과부, 밧세바는 헷족속과 결혼했던 여인으로 솔로몬을 낳았다고 정숙하지 못한 여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종, 성별, 신분과 같은 모든 인위적인 장벽을 뛰어넘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세상의 평화로 오셔서 십자가로 모든 담을 허시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신 줄 믿습니다.
이렇게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 성도들도 마음속의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어떤 분처럼 현대에 살면서 마치 왕처럼 살며 밥도 혼자 먹고 자기를 도와 주는 사람을 시녀로 여기니 그 사람은 앞에서는 복종하는 것처럼 하고 뒤에서 ‘지가 아직도 공주인줄 아나봐’하며 뒷 담화를 하고 각종 부정을 저질러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골방에 쳐 박혀 하루 종일 티부이만 보고 어딜 갈라치면 몇시간씩 몸치장을 하고 결벽증 대인기피증으로 공식석상에서서는 일방적인 지시만 하고 다른 사람이 써준 원고나 읽는 꼭두각시가 된 것입니다.
충성은 바른 길로 가도록 잘 보좌하는 것이지 무조건 예스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5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사사 시대는 혼란의 시대요 영적 암흑기입니다.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각기 욕심에 끌리는대로 행동하다보니 온갖 우상 숭배와 불법이 만연이 만연해지고 여기에 더하여 이방족속들의 침입이 극심해져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의심받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신실하게 약속들을 수행하셨는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사사를 일으켜 구원해 주시고 동시에 보다 큰 구원의 계획 즉 룻을 통해 오벳을 낳게 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내실 일을 착착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제 각각 행동할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어 가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과 품성과 인격을 닮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지라도 성도들은 중심을 지키며 흔들림 없이 살아가야 될줄 믿습니다.
6절에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는 말에서 다윗이 살인교사를 하고 밧세바와 간음한 사실을 밝혀 이들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회개하였을 때 용서하시고 ‘여디디야’ 즉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위로해 주시고 솔로몬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하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의 크고 적음을 따지기 보다 얼마나 애통하며 부르짖어 진정으로 회개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진정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죄를 통회하며 자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넘치는 사랑으로 위로하시며 우리 상처를 싸매어 주실 줄 믿습니다.
10절에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라 합니다.
므낫세는 역대왕 가운데 가장 극악한 왕으로써 이방 족속의 우상을 섬기고 점을 치게 하고 사람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고 성전 가운데 이방신상을 세워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왕입니다. (왕하 21:6-)
므낫세가 신정국가의 왕으로써 한 인간으로도 도저히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언약 즉 “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원히 보존 되리라”(삼하7:16)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위해 비록 다윗의 후손들이 죄를 지을지라도 일시적으로 인생채찍을 들어 징계하시면서도 다윗을 기억하사 다윗왕가를 폐하시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눅10:20)
우리가 영광스러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이땅에 오시어 우리 죄인들을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의로우신 공로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러한 주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외모로 인생들을 판단하시지만 하나님은 주님을 통해 우리를 보고 계시기에 주님을 떠나지 말고 늘 주님 안에ㅓ 정결함과 능력을 입고 신령한 삶을 살아가야 될 줄 믿습니다.
12절에서 여고냐는 요시야 왕의 손자이자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을 말하며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간 왕입니다.(왕하24:6)
스룹바벨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이 차자 바사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제사장 예수아와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인물이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성전과 왕궁까지 파괴되고 나라가 완전히 망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하시며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때가 차면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이 지나자 그들을 귀환하게 하시고 스룹바벨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토록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죄로 인해 소망이 끊어질 것처럼 보이는 순간일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변개됨이 없이 이루어질줄 믿습니다.
아무리 어둡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열어 두시고 새로운 소망의 빛을 비추어주시는 참 좋으신 분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어둡고 답답할지라도 우리의 죄로 인한 징계가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의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의 문을 열어두신줄 믿어야 합니다.
13-15절에 나오는 아비훗에서 야곱에 이르는 9명은 신 구약 중간기 400년의 기록으로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들입니다.
이 중간기에는 하나님의 계시는 비록 없어 암흑기였고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더 정복기, 에피파네스라는 폭군이 일어나고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하며 유대자치 정부인 마카비 왕조가 잠간 들어서기도 하고 각종 묵시록들(위경 외경)이 생겨났으며, 사해를 중심으로 에센파는 동굴생활을 하며 메시아 오심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서 온갖 폭압과 흉흉한 소문이 나돌아 시대가 혼란스럽기 그지없을 때에도 계시에 관하여는 침묵하셨으나 인류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실 길을 조용히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절대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복주시기 위해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며 오신 예수님을 잘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도는 몸은 세상에 영은 하늘에 속한자입니다.(16-17)
성도는 몸은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다른 것은 마태는 다윗왕권의 법통중심으로 기록했고 누가는 혈통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정통성을 계승한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지만, 탄생에 요셉을 배제하고 성령으로 잉태하심을 강조하고 ‘마리아로부터 나셨다’ 하면서 [낳고] 수동태에서 나셨다는 능동태로 문맥의 흐름이 바뀌고 있습니다.
낳고(έγέννησεν 에겐네센)능동형으로 아버지가 자녀를 낳는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동사로써 한 가계의 가장이 그 가계를 이어나갈 자손 특히 아드를 낳는다는 의미를 나타내며 39회가 본문1-16절까지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낳고는 생리학적으로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
이삭을 낳았다는 사실은 그 이삭을 통해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쉽게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경륜 속에서 신실하게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심과 역사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나시니라(έγεννήθη 에겐네데)는 수동형으로 마리아는 자의적으로 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잉태된 메시야를 육체적으로 낳는 역할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바로 유대인들이 대망해 오던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며 전도했던 초대교회에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식해 갔던 것을 말합니다.
17절에서 마태가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족보를 14대씩 3기로 구분한 것은 의도적으로 몇 명의 사람들을 일부러 생략함으로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까지 14대 바벨론 이거후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14대로 맞추어 기록한 것은 족보의 명단을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함과 다윗 혈통을 타고난 다윗의 자손, 곧 약속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Δαυδ)을 게마트리아법칙 즉 문자를 숫자로 환산하면 14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14대씩으로 구별하여 맞추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족보는 비록 17절에 불과하지만 실제 역사적 기간을 기간은 2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의 기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잘못된 리더쉽으로 인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직장생활하고 열심히 의료법을 지키며 열심히 자기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허탈함과 공허함 박탈감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민족과 이 나라를 사랑하시어 동방의 제사장 나라로써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회개의 기회를 주신 줄 믿고 온 국민이 다시 한 번 일어나 교회를 다시 세우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해야 될 줄 믿습니다.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모든 중직자들과 제직들은 성경읽기와 기도하기 전도하기 예배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야 합니다.
나라 바로세우기를 위해 모든 백성들이 법과 원칙을 지키며 정의롭고 깨끗한 부정부패 없는 사회 더불어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성도는 이 혼란한 시대에 중심을 바로 잡고 좌면우고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몸은 비록 이 땅에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 나라에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눈앞의 이익이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일거수 일투족을 조심하고 거룩하게 구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예수님 족보를 통해 이 땅에 오신 사랑의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첫째로 믿음과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2)
둘째로 하나님 주신 은혜로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3-15)
셋째로 성도는 몸은 세상에 영은 하늘에 속한자로 살아야합니다.(16-17)
구약의 축약인 예수님의 족보를 깊이 묵상하면서 신실하신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 오실 때는 세상의 심판주로 오실 줄 믿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대망하며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므로 거룩하게 성결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
|
첫댓글 말씀 감사합니다 !
말씀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응원하고 함께 해주신 님들께 주의 은총이 충만하시길
아멘^^
말씀 감사합니다, 샬롬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