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는 자 /최장순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베니스 영화제에 이은 쾌거라며 전 매스컴에서 앞 다투어 보도하였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밀양’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나는 서둘러 영화관을 찾았다.
신애라고 하는 여인은 남편이 죽은 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밀양을 찾는다. 죽은 남편은 입버릇처럼 ‘나중에 밀양에 내려가 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밀양은 남편의 고향일 뿐, 신애에게는 낯선 곳이었다. 거기서 정붙이고 살기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그녀는 아들이 유괴당해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그녀는 영혼의 어둠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뿌리가 약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에 회의를 품고 반항하는 과정을 겪는다.
주인공의 아들이 하늘을 보는 시선으로 첫 장면이 시작되는 이 영화는 누추한 흙바닥에 햇살이 비추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신과 인간의 세계를 은유 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의미 부여가 모호한 ‘씨크리트 썬싸인’ 그 자체이기도 한 것 같다.
영화의 중간 중간에서 타인의 입을 통해,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충실하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런 그가 결국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신애는 ‘남편은 나와 우리 아이를 끔찍이 사랑했다’고 강변한다. 그렇게 말함으로 사랑하던 남편의 고향에서 살려고 하는 자신의 희망을 정당화 한다. 그녀는 불행 가운데서도 긍정적으로 삶의 힘을 얻으려는 가련한 캐릭터를 대표한다.
진정 남편을 사랑했다는 말은 진심 이었을까? 나는 다소 의문스러웠다. 그녀는 아마도 남편의 배신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비록 추상적일지라도 가족이라는 따뜻한 울타리 속에서, 이미 죽어버린 남편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에 밀양을 선택했을 것이다.
땅을 살 만큼의 넉넉한 돈이 없으면서도, 그녀는 남들이 자신을 깔보지 않게 하려고 과시하듯이 땅을 보러 다닌다. 좋은 집을 지어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는 이유를 대면서. 그러나 그 과시가 아들을 죽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 상징적으로 땅을 갖는다는 것은 정착을 의미한다. 신애는 이질적인 존재로 떠돌지 않고 정착하여 동화하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들을 잃고 극도의 슬픔과 절망 속에 있을 때 무심히 지나쳤던 교회의 ‘심령 대 부흥회’ 현수막이 클로즈업 되었다. 지쳐있는 심신에 부흥회의 참회기도와 찬송 소리는 그녀를 충분히 위로할 수 있었다. 갈급한 영혼에 내리는 단비처럼, 안정되고 편안한 교인들의 권유는 그녀를 교회로 끌어들인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한다. 그녀가 교도소로 범인을 만나러 갔을 때, 범인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며 너무나도 평온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허탈했다. 자기가 베풀고 싶었던 용서의 몫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피해 당사자인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다는 말인가? 신애의 분노는 광적으로 돌변했다.
‘누가 용서 했는지?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라고 그녀에게 물을 수 있을까?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기에는 신애의 신앙은 아직 어린애였다.
남편과 아들을 다 빼앗긴 신애,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비탄 가운데 매달려 믿고 싶은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은 누구의 편인가? 그녀는 원망의 눈초리로 하늘을 쏘아본다.
그녀는 신앙의 권위로 여겨지는 교회의 장로를 유혹하여 벌판으로 나간다. 그녀의 눈에는 일개 남자일 뿐인 장로의 욕정에 자신을 허락한 채, 하늘을 흘기며 하나님께 반항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장로가 아슬아슬한 최후의 장면을 피해간 것은 영화감독의 배려였을까?
신애라는 인물은 성경의 사마리아여인처럼, 야곱의 우물로 대체된 미장원에서 동네 아낙들의 과녁이 되었다. 애초부터 수상쩍었고, 불온한 과부로 보였으니 그럴 만도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를 신이 있다는 전제하에 만들었다고 했다. 고통으로 방황하는 신애를 위한 기도회, 신애가 좋아서 무작정 교회를 따라 다니는 보통의 서민인 카센타 주인의 무던함, 교회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그가 교인이 되어가는 모습, 살인범의 딸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는 것에서 그런 점이 보였다.
가엾은 여자 신애. 그녀가 밀양으로 갈 때부터 그녀의 가슴엔 세상을 향한 막연한 ‘용서’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신애, 이름 그대로 믿음信 과 사랑愛을 지닌 우리 이웃인 그녀는 남은 소망所望도 꼭 움켜 쥘 것 같다. *
# 최장순 수필집 <이별연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