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도 너무 비웠다
정숙
삼월 생기에 푸욱 젖어들고 싶은 날
경산군 남산면 반곡지에서 바람을 맞았다
까막새 옛 친정을 지나온
내 물결, 고요하였다. 바람이
속 다 비운 뚝버들 자궁 속으로 들어왔다
몇 백 년 묵은 버드나무,
나무의 큰 입술은 닳고 닳아 매끄러웠다
서로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던 중, 아뿔싸!
나무는 사방 문설주까지 다 썩혀
하늘을 송두리째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거,
비워도 너무 비운 거네. 우리는 말없이,
아, 두 고요가 만났으니
저 작고 숱한 나뭇잎들까지 파도치는 걸까
바람의 색안경 속 눈부처가 반짝거렸다
이 비밀의 닻을 내릴 곳은 어디?
텅 빈 나무는 물 위에 누운 채 나룻배가 되어
바람, 바람이 날 적시며 밀고 간다
시집『연인 있어요』2020. 시산맥

정숙 시인
경북 경산 출생,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경주 월성중학교 전직 국어 교사
1993년 계간 『시와시학 』으로 등단
시집 『신처용가』『위기의 꽃』 『불의 눈빛』『영상시집』『바람다비제』 『유배시편』
시선집 『돛대도 아니 달고』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 전자 시집 『그가 날 흐느끼게 한다』, 한국대표 서정시 100인선 『청매화 그림자에 밟히다』
2010년 1월 만해 ‘님’ 시인상 수상, 2015년 12월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대구문학 아카데미와 여러 도서관과 녹향, 복지회관에서 시 강의, 시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