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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릉을 진득하게 돌아본 뒤, 남한강변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지방 소도시가 아닌 수도권에 자리해 있어 대중교통편에 대해 간과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핸드폰을 살펴보니 꽤나 많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원하게 불어오던 강바람이 가져다준 그 분위기가 사뭇 나쁘지 않았다. 약 1시간 30분 정도 걸었을까? 커피숍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던 사이 반대편에 여주 당일치기 여행의 행선지가 자리해 있었으며, 일반 사찰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바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오후 2시를 넘어 해가 서서히 세상 반대편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그 사이, 모든 것들이 여유로웠다. 나 또한 그 분위기에 녹아들며 아주 오랜만에 도보 여행을 즐겼고, 평일 오후에 이곳을 찾는 이들도 많지 않아 멀리서부터 스님들이 한창 진행 중이시던 불공 올리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의 산사는 산 중턱에 있기 마련이지만 여주 신륵사는 강변에 자리해 있어 탁 트인 경관이 아주 좋았다. 조금 더 그 분위기에 빠져들고자 안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1. 천년고찰
경내에 있는 문화유산들의 시작은 고려시대를 시작으로 잡고 있으나, 사찰의 시작은 신라 진평왕대에 원효대사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신라는 진흥왕대에 3배 이상의 영토를 넓혀 둔 것을 기반으로 안정화를 도모하던 시절이라 백제 또는 고구려의 영토에 지어진 사찰들과는 그 결을 달리하는 듯 보였다. 창건 기록 말고는 신라시대 당시를 다룬 사찰의 기록은 살펴볼 수가 없었으며, 본격적으로 신륵사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 부터였다.
신륵사라는 명칭의 유래가 두 가지로 나뉘어 전해지는데, 한 가지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가 나타나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자 나옹선사가 신비로운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이를 통제할 수 없었는데, 이때 '인 당대사'가 나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고 한다. 그때 신력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신력의 '신' 제압의 뜻인 '륵'을 합쳐 '신륵사'라 불렸다는 이야기다.
고려시대를 지나 유교가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했을 때도 신륵사는 다른 사찰들과 다른 행보를 있어갔다. 조선의 4번째 왕 세종대왕의 능침이 이곳으로 옮겨오자 조선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로 지정, 그에 따른 지원도 아낌없이 이뤄졌으며 이듬해에 대왕대비의 명에 따라 '보은사'라고 명칭이 바뀌었다 전한다. 그 지원에 힘입어 현재와는 다른 규모로 사찰이 중창되었다고 하나, 오늘날 이곳에서는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신륵사를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은 우연히 마주했던 사진 한 장 덕분이었다. 남한강변에 자리해 있던 것 때문에 피어오르던 그 물안개를 잡아낸 사진 한 장이 날 이곳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 신비로움은 이곳에 깃든 설화를 납득시킬 만큼 매력적이었으며, 공간에 남겨진 서사를 탐닉하고 싶게 만들었다. 아담한 공간에 담긴 시간의 힘이란 여느 매혹적인 향수들보다 강한 힘을 가졌고, 기록에 남겨지지 않은 여백의 미는 개인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언덕과 계단 위를 오르내리며 주변을 돌아보니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짙은 잔향에 빠져들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사찰 건너편으로 잔잔하게 흐르던 강물은 시간의 그 성질을 담아내기에 충분했으며, 갈수록 부드러워지던 하루의 분위기가 필터를 씌운 것처럼 색다르게 다가왔다. 여주로 단체 여행을 오신 분들의 탄성과 해설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등진 채 흘러가던 나룻배의 유유자적함에서 상하이 여행 당시 느꼈던 그 운치를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방방곡곡 여행을 조금만 다니다 보면 천년고찰이라는 수식어는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찰들을 포함해 불교가 워낙 이 땅에 오래도록 뿌리내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하지만 지역의 특성에 따라 비슷한 듯 판이하게 다른 매력들을 담고 있는 것과 더불어 같은 표현 아래 그 매력의 결이 다르다는 것과 조화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을 깨달았을 때, 여행지에 대한 흥미로움은 배가 되어 다가왔다. 물론 이곳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2. 분위기
경내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눈을 끌었던 석탑이 있었다. 석가탑 또는 다보탑처럼 쌓아 올린 것이 아닌 벽돌 형태로 만들어진 그것들이 경주 분황사의 모전석탑을 연상케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찰도 신라시대 당시 건립됐으며, 진평왕도 선덕여왕 직전에 왕위를 지켰던 인물이라 호기심이 고조되어 갔다. 하지만 석탑은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으며 모전석탑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설명에 관심을 그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웅장했던 사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며, 아담한 가람들의 배치와 한적한 분위기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더불어 경내에 자리한 주요 문화재 8개는 경내 분위기에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었는데, 대웅전 바로 앞에 자리한 다층석탑이 그 중심을 오롯이 잡아주고 있었다.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곳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려봐도 거스를 수 없는 그 중후함은 절로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잠시 자리에 앉아 시선을 멀리 두어 본다.
모전석탑을 연상케 했던 그 전탑 또한 보물로 지정되며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고려 시대 당시 만들어진 작품으로 현존 유일의 문화유산이라 전한다. 시선은 남한강을 향하고 있었으나 한창 열과 성을 다해 말씀을 이어가던 해설사 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분위기는 지식과 맞닿아 내 안의 잠재된 궁금증들을 하나하나 해소해 주고 있었다. 집에서 이곳까지 대중교통으로 2시간. 여러모로 이번 당일치기 여행에서 많은 것들을 얻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곳으로 올라가 시선을 강 건너편에 둘 때, 여유로이 흘러가던 그 황포돛배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노을 진 분위기가 깊어져 갈수록 운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문득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신륵사의 모습도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소소하다 생각했다. 마냥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아기자기하거나 오밀조밀한 매력인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 더하기도 덜하지도 않은 매력에 젖어가며 우리나라에 대해 다시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신륵사에서도 물론 템플스테이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2019년을 마지막으로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들이 중단된 상태였으며, 조금씩 완화되어 가고 있는 요즘에도 진행된다는 소식을 접할 길이 없었다. 문득 통도사와 법주사에서 상상했던 그 템플스테이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해가 저물고 세상이 어둠과 맞닿을 때, 사뭇 이곳의 분위기가 어떨지도 궁금해진다. 얼핏 보기에는 비슷해보일수도 있겠으나 그 작은 차이를 어느샌가 부터 크게 받아들이고 있던 나였다.
사소해 보이던 부분들이 모여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신륵사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여러 포인트들이 모여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2022년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유혹하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도 정말 많은 음식점들이 즐비했지만 혹시나 싶어 이곳에서 공양을 받을 방법이 없나 싶어 찾아본다. 날이 갈수록 오롯이 그 순간의 분위기와 사찰에 녹아있는 요소들을 즐기고 있는 나였다.
3. 숨은보물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한창 짙은 녹음이 떠나가기 직전이었다. 아직 무르익어가던 가을의 다채로움과 겨울의 알싸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신륵사를 다녀온 뒤, SNS를 통해 사진으로 마주했던 강천섬의 은행나무와 남한강변의 다채로움은 예상했던 것 처럼 감탄사를 불러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져버린 은행잎들과 내 건강 이슈로 인해 내년을 기약할 수 밖에 없음에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작년 겨울은 마냥 춥진 않았다는 기억이 강하다.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얼어붙은 남한강의 모습과 철새들이 날아드는 모습은 쉽게 마주할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거기에 살포시 눈이 내려준다면 말이 필요없는 정도의 풍경이 기대가된다. 시간이 갈수록 반대편으로 부터 불어오던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는데,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이번 겨울에 그 모습을 고대해 본다.
모든 구경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가고자 사찰 밖으로 나섰을 때, 하루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주변을 꾸며주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순간을 즐기고자 사찰 안으로 들어가던 사람들과 집으로 돌아가고자 밖을 나서던 단체 여행객들이 섞여 장사진을 이루었다. 마침 식사 시간대가 얼마 남지 않아 식당가의 분주해지던 그 모습들과 맛있는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번 여주 여행은 바로 옆에 자리한 이천과 더불어 다시 한번 찾고 싶은 곳으로 어느새 내 안에 자리매김해 있었다. 아직 발굴하지 못한 그 숨은 보물들을 담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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