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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숭깊은 감성 건져 올리기 위한 나르시스의 자맥질
박주용 시인
색의 채도와 빛의 파장으로 심상의 깊이 재고 있는
물에 잠긴 수선화
어떻게 건져 올릴까 고민하는데
바람이 먼저 손 뻗어 팽팽하게 둑 당긴다
순간, 햇살 아래 몇 개의 붓이 물속에 익사하고
가라앉은 꽃 그림자 맑거나 노랗지 않아
나르시스 되는 연습한다
― 「나르시스 건져 올리기」에서
1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뻗어 서쪽으로 내달리다 능선 들어 올린 고만고만한 봉들이 달천강에 여맥(餘脈)을 웅숭깊게 가라앉히고 있다. 달천강을 막아 댐이 건설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수력발전소라고 교과서에 소개된 바 있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에 위치한 이 괴산호는 지명을 본떠 칠성저수지라 불리기도 한다. 김태숙 시인이 어릴 적 자맥질을 하며 노닐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시인은 그야말로 깡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계절의 빛과 색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산빛을 사시사철 거꾸로 담아내고 있는 저수지를 휘감아 도는 산막이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물에 비춰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보고, 들은 자연의 풍광과 소리는 훗날 시인의 감성을 깨워 시로 승화시키는데 커다란 몫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김태숙 시인은 방동저수지가 있는 대전 근교의 시골 외딴집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한때는 군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한 시인은 남편의 사업으로 필리핀에 잠깐 거주하기도 했지만 시의 많은 소재들에서 찾아볼 수 있듯 세상살이의 대부분을 시골에서 풀과 나무와 꽃과 더불어 살아왔다. 봄이 되면 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면 알곡을 수확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천상 촌뜨기이기는 하나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하는 기품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번 첫 시집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랩소디로 편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랩소디는 악곡 형식 중 하나인데 서사시의 한 부분이라는 뜻도 있다. 어느 인생인들 굴곡 없는 삶이 있겠냐마는 김태숙 시인 또한 삶에 녹록하지 않은 서사가 있었음을 시집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보고 해석하며 살아간다. 인간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변화의 기록이다. 세상 만물이 변하고 또 변하는데 어찌 시만 제자리에서 홀로 움 틔우고 꽃 피울 수 있겠는가. 발랄한 비유를 끊임없이 건져 올려 세상과의 교감을 이루는 일은 시인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이 내게로 걸어 들어오거나 내가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풀과 나무와 꽃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되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김태숙 시인은 투사(投射)와 동화(同化)의 방법으로 시 창작의 자맥질을 끊임없이 해오고 있다. 꽃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 나르시스가 되기도 하고, 꽃이 되어 나르시스를 건져 올리기도 한다. 시적 대상은 무수히 많은 것이어서 또 다른 나일 수도 있고, 나 이외의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시인이 끊임없는 자맥질을 통해 시적 대상과 교감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의 시편을 하나하나 음미해가며 밝히고자 한다.
2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활과 리라』에서, “시는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시집의 대부분은 김태숙 시인의 자전적인 삶을 탁본한 시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비록 가면이라고 해도 시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시적 화자에 주목할 때, 우리는 이미 그가 연출하고 연기하는 무대와 언어에 젖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일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복면 가왕’에서처럼 가면을 쓴 시적 화자인 퍼소나(persona)를 바라보는 일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며, 동시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이고, 그의 영혼을 공유하는 일이다.
오래된 성전이 발견되었다
허리 잘록하게 동여맨 다리 밑
강물은 만삭이 된 채 섬을 숨기고 있었다
허물처럼 벗어 놓았다던 울음
컴컴한 강바닥에서 어린 마음 낡고 있다
이제, 그만 놓아 주실래요
화석같이 굳어진 말들의 뼈
말랑해질 때까지 비릿한 기억 더듬는다
물빛 깊어져 심박수 늘어나
발긋한 살비늘 강물로 직립한다
엉킨 물살 헤집고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
자꾸만 어둠 속에서 내가 울고 있다
횃불 들고 수런거리는 사람들
건져 낸 울음의 정체 물었고
다투어서 아이의 엄마 예측한다
누가, 다리 밑 기웃거렸던가
꼬리 치켜세우고 축대 걸터앉은 강아지풀과
노란 꽃 팬티 갈아입은 민들레뿐
진흙 같은 바람만 지나가고
오랜 시간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다리
물 빠진 문양이 풀린 목줄 같아
내게 발목만 남기고 떠난 자리
갇힌 섬이 그리울 때가 있다.
―「엄마의 성전(聖殿)」 전문
수십 년 전만 해도 어른들은 아이들을 어르거나 놀릴 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고, 너의 진짜 엄마는 지금도 그곳에서 예쁜 옷과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울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해왔다. 어른들의 그 말을 처음에는 별로 믿지 않던 아이들도 정색을 하고 몇 번씩 이야기하는 어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리는 아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다리를 특정(特定)하여 말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신빙성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 시에서 “화석같이 굳어진 말들의 뼈”, “말랑해질 때까지 비릿한 기억 더듬는” 퍼소나(persona)는 시인이지만 동시에 시인 자신이 아닌 시인 안의 또 다른 어떤 존재인 ‘나’이다. 시인이 창조한 무대에서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는 ‘나’는 시인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일 수도, 시인이 그리워하는 ‘나’일 수도 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진득하게” 자맥질하며 “오랜 시간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다리”의 실체가 “꼬리 치켜세우고 축대 걸터앉은 강아지풀”과 “노란 꽃 팬티 갈아입은 민들레”였다는 것을 알고는 “풀린 목줄”처럼 허허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내게 발목만 남기고 떠난 자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 시를 보면 시인에게 있어 그리움은 외로움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읽힌다.
벌판에 집 한 채
반생 고스란히 쌓였을 풍경 얇다
오래 방치된 날들이 비집은 틈새마다 세월의 흔적이 등고선처럼 찍혀있고
유행마저 지나친 형색 더듬으면 함구했던 과거가 잡히기도 하는
그 싸늘한 입자는 얇아지기 직전의 아픔과 방심 이전의 깊은 곳까지
몸피 부풀렸을 것이다
가끔 늦은 귀가가 있는 날이면
무관심에 쩍쩍 갈라진 굳은살 같은 심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세월의 가장 바깥으로 내몰린 기억을 데려오는 것이며
벌어진 안쪽으로 저물고 있는 나를 살피는 일이다
밟힐수록 단단해지는 땅에 두 발로 견디어 본 사람은 안다
중력이 때론 얼마나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지를
그리하여 오랜 체념을 견디는
그 안은 많은 이야기가 잠겨있어 사방 험난하다
운명을 잇는 생과 사의 정류장이었고
새로운 출발점일 수도 있었던
그곳은
모두가 아는 패잔병의 뒷모습처럼 생존의 위기를 대물림하고 있을 것이다.
―「낡은 집」 전문
가스똥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는 『공간의 시학』에서 “우리들이 고독을 괴로워하고 고독을 즐기고 고독을 바라고 고독을 위태롭게 했던 공간들은 우리들 내부에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우리들의 존재가 그것들을 지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존재는 본능적으로 그의 고독의 그 공간들이 본질적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였다.
김태숙 시인은 지금까지 벌판에 덩그마니 떨어져 외롭게 살아왔다. 그곳은 “오래 방치된 날들이 비집은 틈새마다 세월의 흔적이 등고선처럼 찍혀있”고, “유행마저 지나친 형색 더듬으면 함구했던 과거가 잡히기도” 하는 공간이다. ‘낡은 집’은 “운명을 잇는 생과 사의 정류장이었고”, “새로운 출발점일 수도 있”는 곳이기에 어머니가 그랬듯이 대물림하며 살 수밖에 없다. 외롭게 지내 온 자만이 외로움을 이겨내는 법을 안다. 더욱이 외로운 곳에는 외로움만큼 생각도 깊은 것이어서 “무관심에 쩍쩍 갈라진 굳은살 같은” 외로움의 “심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세월의 가장 바깥으로 내몰린 기억을 데려오는”일이며, “벌어진 안쪽으로 저물고 있는 나를 살피는 일이다.” ‘나’는 내가 옆에 있어도 언제나 외롭기에 항상 그리운 것이다. 시인은 더욱 웅숭깊게 삶의 내력을 반추하기 위해 투사(投射)의 시적 장치를 활용하기도 한다.
문 열면 타원형 속에서 흘러나오는 서너 평짜리 방엔 여자가 산다 난, 소소초 찾아 헤매다 지친 몸 누이던 고비사막의 낙타 떠올리고 넌, 뜨거운 태양 아래 꿈 태운 빛으로 어제의 얼굴 씻으며 황혼 이고 오는 여자 생각한다 난, 널 모르는데 너는 날 기억하고 어제와 오늘의 경계 빗질해도 찾아드는 골진 이마 어둠의 실마리 흔들어 깨워도 새벽은 고요하여 멀다 밤새도록 뒤척이던 독백 같은 말들 털고 오늘을 곱게 분칠하여 내일의 밥을 짓는 여자 나는 보았다, 너 닮은.
―「낙타의 거울」 전문
폴 리콰르(Paul Ricoeur)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를 무대로 이끌고 더 나아가서 스스로를 무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시인에게 이 말을 적용해 본다면, 시인은 시적 퍼소나를 무대로 이끌고 더 나아가서 스스로를 퍼소나라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위 시에서 여자는 다름 아닌 시인이고, 시인은 자신을 사막으로 이끌고 더 나아가서 스스로 낙타가 된다. “소소초 찾아 헤매다 지친 몸 누이던 고비사막의 낙타”가 된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투사해 본다. 시인은 가시풀인 소소초를 씹어 제 피로 목을 축이면서 하루하루를 견디어 내더라도 “골진 이마에 찾아든 어둠의 실마리”는 아득하기만 하다. 새벽이 멀더라도 어찌하겠는가? “밤새도록 뒤척이던 독백 같은 말들 털고 오늘을 곱게 분칠하여 내일의 밥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여자인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이렇듯 김태숙 시인은 낙타와도 같이 홀로 사막을 타박타박 거닐며 삶을 버티어낸 것이다. 앞으로도 똑같은 일상이 펼쳐지겠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밥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마찬가지로 시인에게도 세월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황혼 이고 오는 여자”가 생각보다 먼저 저만큼 앞에 와 서성이고 있다.
출산 멈춰버린 검은 바다
희미하게 흐르는 별빛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낡은 폐선에 소복이 쌓인다
얼마나 많은 별이 쓰려져 왔던가
나는 오늘 낡은 폐선에 박혀 간
별들의 긴 이야기를
파도로 들으려 한다
태어나 반짝이다 사라져간
모든 꿈 풀어놓아도
흉이 되지 않을 태초의 요람
굳게 닫혔던 바다가 밤하늘 품어
상처의 아픔만큼 출렁인다
비바람 끌어 앉고
뽀얗게 제 속 뒤집어 가는 바다
아련한 그리움에 젖는 난
어머니의 가슴만 만지고 있다.
―「폐경기」 전문
주워온 아이라고 놀림을 받았던 유년의 ‘나’는 어느새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 출산이 멈춘 낡은 폐선이 되었다. 폐선에는 어머니가 살아온 내력이 별빛으로 쏟아진다. 별들이 들려주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인은 어머니와 동화(同化)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시에서 어머니는 바다인 동시에 폐선이고, 아울러 바다와 폐선은 ‘나’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나’이다. 어머니의 삶을 웅숭깊게 자맥질하고 난 연후에야 ‘나’는 어머니와 동질감(identity)을 획득하게 된다. “비바람 끌어 앉고”, “뽀얗게 제 속 뒤집어 가는 바다”를 보며 어머니도 나처럼 힘들게 살았던 가슴 달린 여자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출산도 멈춰버린 바다, 낡은 폐선이 되었지만 ‘나’의 삶은 여자로서의 삶 이전에 어머니로서의 삶이었기에 결코 “반짝이다 사라져간 모든 꿈 풀어놓아도 흉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완성
모든 생명의 의미이며
한 생애 어둡고 칙칙한 터널
관통한 꽃 트림이다
그것은 세상 바라보는 눈
세상 향해 두 주먹 불끈 쥔 용기며
가슴에 옹이 더듬는 푸른 젖줄
심장에서 뿜어내는 꽃말이다
그것은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간 별
등 마디마디
슬픈 색 지우며
한평생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여린 생 털고 웃음 툭,
터짐 기다리는
초경의 설레는 이름이다.
―「몽우리」 전문
신(神)이 아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보니 당연히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 때문에 세상살이에서 ‘기다림’이라는 말은 대상이 온다는 확정된 약속이 아니기에 쓸쓸하고도 슬프다. 어찌 보면 ‘기다림’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의 또 다른 이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다림’이 때로는 앞으로 다가올 기회와 희망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몽우리’는 아직 채 피지 않은 어린 꽃봉오리이다. 하지만 시인은 몽우리를 “그것은 내면의 완성”, “모든 생명의 의미이며 한 생애 어둡고 칙칙한 터널 관통한 꽃 트림이다”라고 읊조리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세상 바라보는 눈”, “세상 향해 두 주먹 불끈 쥔 용기며 가슴에 옹이 더듬는 푸른 젖줄”, “심장에서 뿜어내는 꽃말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것은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여린 생 털고 웃음 툭, 터짐 기다리는 초경의 설레는 이름이다.”라고도 한다. 추위와 비바람의 시간을 마주하며, 인내와 연단(鍊鍛)을 통해 기다림을 견디어 왔기에 ‘몽우리’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태숙 시인이 지금까지 기다려 온 대상은 어떤 외적 존재라기보다는 본인 자신이었다. 내면을 완성하고자 끊임없는 자맥질로 스스로를 다져온 것이다.
3
서정시의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감성이라 할 수 있다. 외로움, 사랑, 미움 등의 감성도 따져보면 그리움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김 시인의 시편에서도 이 그리움은 중요한 시적 소재이다.
그녀의 시편에는 대부분 가족을 비롯하여 풀과 꽃과 나무가 등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 시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은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닌가 싶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두 분은 순간순간이 고통스러운 일상의 선택이며 낯선 길을 가는 나그네같이 불안을 동반하는 여정을 사신 분들이다. 때로는 행복과 기쁨의 순간이 없지 않으나 근원적으로 연민스러운 것이며, 삶의 근간에는 언제나 슬픔과 고독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장미 지운 저녁 비가
밤새 퍼덕이더니
아침 안개 통과해
꽃잎에 머금고
가난 때문에 멍든 꽃잎 툭툭 털어
노란 속내 다 드러내며
올망졸망 사랑 피워냈을 어머니
흙의 젖줄로 밀어 올린 접시꽃처럼
나를 키워 바람에 심고
빗길로 떠나가신지 어언 삼십 년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고
내 가슴 지그시 밟던 시간
비로소 여름날을 뒤척이며 출렁이던
그리움 저편 눈시울 적시던 선홍빛
문득, 그때가 보인다.
―「접시꽃」 전문
시인이 그려낸 어머니의 시간에는 늘 가난과 절망이 존재한다. 돌아가신지 삼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머니는 가난과 뗄 수 없는 고리로 가슴 저편에 남아 “멍든 꽃잎 툭툭 털어”, “노란 속내 다 드러내며”, “올망졸망 사랑 피워”낸 존재로 기억된다. “흙의 젖줄로 밀어 올린 접시꽃”의 마디 따라 시집을 읽어가면 어느새 시인의 어머니는 우리의 어머니가 된다.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분들의 삶을 부정해 보지만 우리도 어느새 당신과 마찬가지로 아등바등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서야 “그리움 저편”의 구석에서 우리는 시적 화자처럼 선홍빛 눈시울을 적시는 것이다. 다음 시도 스스로를 내려놓고 희생하며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연민의 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시간 넘나드는 당신은
늦은 봄 보랏빛 추억
찬바람 사라진 가시밭 두렁
엉덩이 질퍽하게 떡잎 깔고 앉은
쓰디쓴 속울음 우려낸 지칭개 된장국으로
입맛 지친 한 끼의 밥상 차렸던 어머니
먼저 보낸 자식에게
허연 밥 부뚜막에 올리고
푸르뎅뎅하게 멍든 봄날 보내셨지
하루해는 언제나
온몸으로 기우는 것이어서
함지박에 별을 이고 달을 지고
덩그렁 덩그렁, 워낭소리로 힘겨우셨지
파릇한 청춘 벅벅 문질러 살았던 삶
봄만큼이나 자식 자랑하셨던 마음자리
아스라이 사라지는 기억 붙잡아
한 소꿉 꽃으로 피어오르셨지
곰살맞은 자식 위해
흔들리는 세상 바르게 서라 하셨던
그리워서 뜨거웠던 말
길 위 풍경으로
끝내 곁 지키고 있었지.
―「지칭개꽃」 전문
마음은 저릿한 경험 속에서 잎이 돋고 꽃이 핀다. 시인에게 이 저릿한 잎과 꽃은 시 창작의 단초(端初)가 된다. 부모님의 저릿한 사랑을 경험하였기에 우리는 그분들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랑은 자타와의 동질성의 발견이며, 분리된 관계를 합일로 이끌어가는 행위이다. 시인에게서 분리된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공포가 되기에 다른 형태의 합일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김태숙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는 시간을 넘나들며 기억되는 존재이다. 그 기억은 언제나 보랏빛이기에 우울하고 가슴 저리다. 시인이 추억하는 어머니는 “파릇한 청춘 벅벅 문질러 살았던” 분이고, 늘 “함지박에 별을 이고 달을 지고”, “덩그렁 덩그렁, 워낭소리로” 힘겹게 사신 분이다. 더욱이 “먼저 보낸 자식에게”, “허연 밥 부뚜막에 올리고”, 봄날도 “푸르뎅뎅하게 멍든” 가슴 부여잡고 절망을 견디신 분이다. 시인은 지칭개꽃을 보며 평생 지친 삶을 살다 가신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고, 연민의 정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을 것이다. 더욱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바르게 서라 하셨던” 그 뜨거운 말을 자맥질하며 버팀목으로 삼아 살아왔을 것이다.
잘 차려놓은 제상에
나물 하나 더 올립니다
세파에 나부끼며 잘 자란 터전 한쪽
오래 잊혔던 컴컴한 망각에 불 켜고
내게서 네게로 또 다른 너에게로
밀고 들어오는 안부가 많은 저녁입니다
그래 그랬어, 그때는 그랬지
형제들 둘러앉아 담방담방 피기 시작한 이야기 속 엄마
아침밥 짓다가도 불현듯 화 치밀었는지
서쪽으로 가신 아버지께 돌직구 날리십니다
부지깽이 장단에 치맛자락 타는지 모르던
걸진 한풀이 깨알처럼 터트리다가
육거리 장단에 푸념으로 사그라들기도 했던,
그런 날엔 온종일 비가 내렸고
엄마의 눈에 걸려드는 나의 게으름
학교 늦겠다, 지집애가 게을러서 어디에다 쓰겄냐
푸릇한 내 청춘 점령했던 지긋지긋한 잔소리
가끔은 휘발성을 잃곤 합니다
오늘, 제상에 올리는 부지깽이나물
오래된 유년 들쑤시는 씁쓰레한 추억 하나
툭, 건드립니다.
―「부지깽이나물」 전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머니에 대해 무한한 사모와 애정을 가진다. 일생에 변함없는 그리움이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애인이 생명처럼 소중하다 하더라도 조건적이라서 그것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우리의 그리움은 영구적이며 무조건적이다.
오늘은 어머니의 제삿날, 다른 때보다 그리움이 더욱 사무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 공유했던 어머니와의 시간에는 그늘이 내재 되어 있다. 5남 1녀의 외동딸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했을 법도 하지만 시인의 어머니는 늘 “부지깽이 장단에 치맛자락 타는지 모르”고, “걸진 한풀이 깨알처럼 터트리다가”, “육거리 장단에 푸념”을 어린 딸에게 늘 쏟아부었다. 시인은 부엌에서 들려오던 “푸릇한 내 청춘 점령했던 지긋지긋한 잔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올 때마다 “오래된 유년 들쑤시는 씁쓰레한 추억” 떠올리고는 눈시울 적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딸자식에 대한 이러한 행동은 어머니가 무남독녀(오빠가 있었으나 성년이 되기 전에 저세상으로 갔다고 함)로 자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에 따르면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니가 오빠를 잡아 먹은’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셨다는 것이다. 피해의식이 딸에게로 전이된 것이다. 어머니의 이러한 딸에 대한 행동은 시인이 시집을 간 후에도 계속 되었는데, 그것은 동생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듯싶다. 「제망제남가(祭亡弟男歌)」라는 시에서 시인은 “잘나/ 나라에 바친, 꿈 많던 짧은 생/ 너에게로 가는 길은/ 저 산모퉁이 눈물로/ 굽이돌던 삼백예순날”이라고 읊고 있다. 남동생이 잘못된 이후로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니가 동생을 잡아 먹’은 것이라고 딸에게 “육거리 장단”의 푸념을 쏟아냈을 것이다.
시 내용은 시 속에 담겨 있는 정신이자 혼이다. 시가 풍기는 향기까지도 언어 속에 깃들어 있다. 따라서 작가의 삶을 음미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김태숙 시인이 담고 있는 시심의 핵심은 위의 시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외로움’이자 ‘그리움’이다.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서야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이해는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화해를 낳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자취와 추억이 깃들어 있는 뒤란을 거닐며 “어머니!/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은 왔는데 돌아올 길 없고/ 울새 속눈썹 습해/ 차마 발걸음 떼지 못합니다.”(「어머니의 뒤란」)라고 읊조리고 있다.
김태숙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그리움이겠지만 더 큰 그리움의 대상은 아버지이다. 시에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는 보는 이로서는 아프지만 언제나 따스하고 포근한 사랑을 품은 모습이다. 그 때문일까? 김 시인의 시에는 전반적으로 우리들 아버지의 초상을 떠오르게 한다.
하루치의 태양이
서산 향해 걸으면 들판으로 나가
짙푸르게 밀려오는 기억 하나 더듬습니다
잊은 듯, 잃어버린
묵은 발자국의 잿빛 얼굴
바람에도 떠나지 못하는 이름입니다
힘겨워도 내려놓지 못한 짐
땡볕에 그을린 어깨 한쪽이 기울어
소주병으로 평행을 잡던
그 모습, 눈물겹습니다
지금 어디쯤에 계신가요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 얹으니
푸르게 푸르게 화답하는 들판
나, 이렇게 죄인처럼 서 있습니다.
―「아버지의 들녘」 전문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시인의 아버지도 “힘겨워도 내려놓지 못한 짐/ 땡볕에 그을린 어깨 한쪽이 기울어/ 소주병으로 평행을 잡”으며 사셨던 분이다. 언제나 식구를 위해 농사일을 하며 잿빛 얼굴로 평생을 들판에서 서성였을 것이다. 시인은 그런 아버지와의 조우(遭遇)를 위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판에 서게 되고, 그럴 때마다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늘 “푸르게 푸르게 화답”해 주시는 것이다. 지금도 시인이 들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인은 아버지의 희생적인 삶에 대해 한 번도 보답해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죄인처럼 서 있”는 것이다.
너 없이 어찌 봄이 오겠는가
성묘하러 가는
신작로 가로지른 오솔길
봄 피워내고 있지, 너는
나 어릴 적
아버지의 지게 발채에 얹혀와
좁다란 책상에 이른 봄 먼저 피워냈지
지금도, 산기슭 양지바른
한 뼘 자리 연분홍으로 자리 잡은 너는
아버지의 쉼터에서 울컥하는
그리움의 이름이지
어찌, 너 없이 봄이 가겠는가.
―「진달래꽃」 전문
시인이 추억하는 아버지는 늘 진달래꽃을 “지게 발채에 얹혀와/ 좁다란 책상에 이른 봄 먼저 피워” 주셨던 자상하신 분이다. 때문에 “지금도, 산기슭 양지바른/ 한 뼘 자리 연분홍으로 자리 잡은” 진달래는 “아버지의 쉼터에서 울컥하는/ 그리움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깃들어 있는 진달래 없이는 봄은 올 수도 갈 수도 없다고 시인은 읊조리고 있다.
4
한 조각을 잃어버려 이가 빠진 동그라미,슬픔에 찬 동그라미.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길을 떠났다.데굴데굴 굴러가며 부르는 노래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 쪽은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 쪽은에이야 디야 나 이제 찾아나섰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 쪽은
나, 이제 찾아 나선다, 잃어버린 한쪽을.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라는 우화의 첫 부분이다. 이 이야기는 이 빠진 동그라미가 잃어버린 자신의 한쪽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진리를 소박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모든 인간적인 성취와 추구의 본질을 자상하게 파헤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김태숙 시인의 시 편을 읽으며 ‘외로움’과 ‘그리움’ 외에 주목한 또 한 가지는 반쪽에 대한 ‘사랑’이다. 이 시 편에 등장하는 반쪽의 대상은 대체로 ‘너’나 ‘그’로 명명되어 있다.
걷다가 한 번쯤 그리웠다
말을 해도 좋으련만
기다릴 줄 모르는
그래서 붙잡을 수 없는,
떠나가는 너를 수없이 보냈다
햇살 얼기설기 내려앉은 연산역 벤치에서
비 오다 갠 파란 하늘
꽃도 피고 지는 건 시 같아
너 안에 꽃 피어, 나도 따라 핀다
물에서 건져낸 나르시스
꽃들이 지나간 숲에 우거졌을 기억
기다리지 않을 너에게 간다
언 땅 바람이 할퀸 연둣빛 자리
노란 꽃 얼룩 지우며
지고 말 그 길
온몸으로 간다.
―「수선화」 전문
인간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인생을 산다. 그러나 찾고 나면 그것을 잃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런 역설적 상황 앞에서 존재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시인은 시 「수선화」에서 “기다리지 않을 너에게 간다/ 언 땅 바람이 할퀸 연둣빛 자리/ 노란 꽃 얼룩 지우며/ 지고 말 그 길/ 온몸으로 간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너’를 붙잡을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그리하여 떠나가는 ‘너’를 수없이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너’는 타자인 동시에 ‘자아’인 ‘나르시스’이기도 한 것이다.
입술과 입술
들숨과 날숨에 피었다 사라지고
잠시, 칼디의 가슴 촉촉이 적시다
전설 속에 묻어둔 사랑
혀끝에 말려 올려진 시간만큼
향기로 되살아나는 문양(文樣)이여.
―「커피의 문양」 전문
‘자아’인 나르시스는 “들숨과 날숨”으로 피었다 사라진 전설 속에 묻어둔 사랑을 자맥질하여 건져 올리지만 향기로 되살아날 뿐 사랑의 실체는 부재 상황이다. 시인은 이렇듯 만나고 이별하는 과정에서 얻음은 잃어버림을 전제로 해야 함을 체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비극이지만 비극을 피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비극을 직시하고 “노란 꽃 얼룩 지우며 / 지고 말 그 길/ 몸으로 간다.”라며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한다. 아래 시 「수요일엔 기차를 타요」에서도 사랑에 대한 시인의 적극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일기예보의 표정을 살펴요
노란 장화 신은
기상 캐스터는 비 부르고
촉촉이 젖는 그리움은 한 뼘이나
자라 플랫폼 서성이죠
미쳐야 살 수 있다면, 불나방처럼 모든 걸 걸고
불에 뛰어들 자신감으로 용기 꿈꾸는
어쩌면 한 번쯤 가슴 뛰는 사람이 되어
신발 끈 묶어요
기차는 숲으로 들고
그가 울고 간 터널의 깊이와
한세월 푸르게 기록된 사연을
난 어찌 다 읽어 낼 수 있을까요
오래도록 땅속에 잠겨있던
저 속울음의 마디마디를
은밀하게 속내 열어
이정표 없는 쓸쓸한 숲 끌어안고
우린 서로 다른 생각으로
긴 하루를 차창 밖에 흩뿌려요.
―「수요일엔 기차를 타요」 전문
수요일은 비가 오는 날이고, 그리움은 촉촉이 젖어 한 뼘이나 자라 플랫폼을 서성인다. 기차를 타고 ‘그’를 찾아 나서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쳐야 살 수 있다면, 불나방처럼 모든 걸 걸고/ 불에 뛰어들 자신감으로 용기 꿈꾸는/ 어쩌면 한 번쯤 가슴 뛰는 사람이 되어/ 신발 끈 묶”자고 적극적인 어조로 스스로에게 말한다. 하지만 사랑의 대상은 언제나 어긋난다. “너의 육체는 팔월의 붉은 장막 밀고/ 내 영혼은 밤마다 너의 담장 넘는다.”(「사랑은 떠난 뒤에 온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의 사랑은 다가서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그리운 상사화 같은 어긋난 사랑이라서 애틋하다.
바람의 근원지 찾으러
북쪽으로 뿌리내린 것들 이정표 삼아
마닐라에서 열두 시간 달려 도착했을 땐
이미 바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의 햇살이 집요하게 따라오던 구름 밀자
날아오르는 새의 종아리 사이로
부산하게 펼쳐지는 길고 좁다란 협곡
칭얼대던 새의 울음조차 둥글게 말리는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곳엔 바람도 신이 된다
신들의 근간은 사랑이었을까
지상의 낮은 시간 속에 살다 신이 된 여인 흠모하여
피었다 지고 지었다 피었을 이고로트족의 시신들
벼랑에 둥그렇게 걸린 풍경 위태롭다
숨길 사연 무엇 그리도 많아
깊은 곳에서 자란 솔향까지 바람의 무게로 견뎌야 했던,
떠남과 돌아옴이 하나인 에코밸리
떨어진 꽃잎에도 메아리 투명하게 쌓이는 곳
손 내밀어 바람의 기억 들추는 여인들의 눈빛에
산 그림자 그득히 고여있다.
―「에코밸리」 전문
시인은 이렇듯 애절하고, 애틋한 사랑의 근원지를 찾아 떠나지만 마음에 사랑을 불어넣었던 “바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손 내밀어 바람의 기억 들추는 여인들의 눈빛에/ 산 그림자만 그득히 고여있”을 뿐이다. 사랑의 실체는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허허롭다. 허허롭기에 더욱 아프다.
햇살이 바스러져
허허로운 날엔
누군가의 의미가 되어
떠나고 싶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사랑하다
기약 없이 이별할 때
하염없이 네게로 가고 싶다
어쩌면 생은 장엄한 침묵
눈 감아 가슴 열고
내 환영 바라보는 풍경
허상에 집착하지 않고
진실이란 믿음으로 돌아와
말갛게 씻긴 은사시나무로
서 있고 싶은 것
때론 떠난다는 것은
비우고 이별하다 새겨진
삶의 주름진 문양
푸른 핏줄로 녹여 지워질 때
쓸쓸한 우리로 추억하는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전문
가수 김광석이 부른「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은」이라는 노래가 있다. 시인또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어떤 특정 대상을 사랑하기보다는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고 한다. “생은 장엄한 침묵/ 눈 감아 가슴 열고/ 내 환영 바라보는 풍경”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인은 이제는 “허상에 집착하지 않고/ 진실이란 믿음으로 돌아와/ 말갛게 씻긴 은사시나무로/ 서 있고 싶은 것”이다.
나무가 풀어놓은 그늘과 버선발로
마중 나온 꽃들 있어 정겨운 산사
담장 휘어 감는 개울물에
이끼 낀 마음 헹구고
나의 비루함에 촛불 들어 머리 조아리니
번뇌와 번민 사이에서 잠깐 동안
인간은 믿음과 관계없이 충분히 종교적일 수 있다는
씨알머리 없는 내 발칙함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대웅전 앞 노송
구름에 걸려 현기증 앓았을 터
너의 여름은 너그러웠는지
붓끝에 피지 못한 묵향 손끝에 시들어
황량한 마음 문지르건만
저기, 저 노승은 한 생애 저물도록 붉고,
얼마나 많은 사리 품었기에
저리도 청청할 수 있을까
땅거미 내리자 돌계단 오르던 담쟁이도
하루 등진 채 생각 내려놓을 시각
흔들리고 흔들렸던 여인, 적막 짊어지고
면벽 수행 들고 있다.
―「수덕사에서」 전문
사랑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은 시인은 산사 찾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대웅전 앞 노송”을 보며 “번뇌와 번민 사이에서 잠깐 동안/ 인간은 믿음과 관계없이 충분히 종교적일 수 있다는/ 씨알머리 없는 발칙함에” 대하여 깊이 마음 문지르며 성찰과 숙성의 시간을 갖는다. 또한 지금까지 세상에 “흔들리고 흔들렸던” 자신을 생각하며 비구니처럼 “적막 짊어지고/ 면벽 수행”에 들고 싶은 생각도 든다.
5
김태숙 시인의 시 편은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난 존재들과의 관계 양상을 구체화함으로써 개인적 한계에 포박된 우리의 시선을 외부로 확장시켜 준다. 아울러 타자의 감정을 나의 감정에 이입함으로써 내적 자아의 진정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려준다. 더욱이 지금까지 살아온 자전적인 삶을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애정을 견지하며 웅숭깊은 감정을 자맥질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랩소디를 잔잔하게 들려줌으로써 오래도록 시적 여운이 남게 한다.
특히 시인의 삶에서 자연적으로 파생된 시적 상상력은 단지 관념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언어적 테두리를 지니고 있어서 독자들과 공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결국 시인이 지어나가는 시의 집은 자연의 공법으로 지은 개미집과도 같이 정치(精緻)하면서도 웅숭깊다. 이러한 특징은 자유로운 뿌리줄기를 가지기에 앞으로 뻗어나갈 새로운 상상력의 지평에 기대를 걸게 해준다.
특히 김태숙 시인의 시는 진정성이 있고 어렵지 않기에 독자들과 공감의 폭이 넓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듯하면서도 울림이 크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와 함께 존재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흘러넘친다.
산다는 것이 무어냐고 묻자
느낌표와 물음표 쉼표와 마침표 섞어
심상 관통해 은하수로 쏟아지는
세상의 씨방들
흰고래 산다는 심해 헤엄쳐
언어의 물결 보듬어 백지에 부려놓으니
산호처럼 돋아나는 황홀경
울림으로 조합되는 언어는
한 줄의 시행 되어 시공간 넘나든다
행과 행 사이 정성스레 가늠하니
까만 연밥처럼 익어가는 시어들
농부가 곡식 수확하듯
개구리울음 자양분으로 키워가는 마음 꽃
쭉정이 벗는 알곡 진 시어들 툭, 쏟아놓으면
시인들도 시 농사짓는 것이리.
―「시 농사」 전문
중요한 것은 시적 대상이 무엇이든 시는 땅속에 묻혀있는 감자를 수확하듯 감동을 캐내는 일이다.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맑은 우물에서 자맥질하여 건져낸 정제된 감성이다. 감동은 시적 대상을 직관의 힘으로 꿰뚫어 보아야 나온다.
시적 대상을 자연을 매개로 한다면 기왕에 그려진 모습보다는 당연히 새롭게 형상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생태학적 상상력은 그 자체가 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성을 지니고 있기에 발랄하다.
지금까지 풀과 꽃 데리고 들판에서 농사를 잘 지어왔으니, 이를 바탕으로 시 농사도 잘 짓기를 바란다. 음악적인 감성이 살아있는 발랄한 상상력으로 개성 넘치는 감동적인 다음 시집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