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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역사에 새벽을 가져온 사람
제 1장 기도의 사람
기도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생각하면서 성경에서 기도의 사람 혹은 사랑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모본이 없는가를 생각해 보았읍니다.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느헤미야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이 느헤미야서를 통하여 이 사람의 삶 속에 움직였던 기도와 그 사랑의 특성을 살펴보고 함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느헤미야의 프로필
느헤미야,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 삶의 배경을 잘 알수는 없습니다. 그의 어린 시적이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 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단서가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구절은 본문 1절,"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입니다.
느헤미야는 하가랴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그것이 느헤미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배경의 전부 입니다.그러나 아마도 그의 할아버지 때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하였고 (주전 586년) 그의 할아버지와 온 가족이 바벧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얀다 포로로 바벧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포로로서 이방 땅에서 태어나서 자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진 기지와 영특함과 인격적인 가능성과 여러 가지 자질로 말미암아 이방 나라에서도 상당한 출세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느헤미야서 1장에서 이 나라에서의 그의 직위를 알수 있읍니다.11절을 보십시요.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가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사람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그의 공식적인 직함은 술관원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직책이 없지만 고대에는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기사에도 술관원이 등장합니다.요셉이 무사히 풀려나서 바로 왕의 앞에 서게 된 것은 술 관원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술관원이란 쉽게 말하면 왕이 술을 마시기 전에 일단 그 맛을 보는 사람입니
다.'그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직힘이며 대단히 주용한 직책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마시는 술에 혹 독약이라도 타게 되면 왕은 죽는 것입니다.즉,왕의 생명에 책임을 지고 있는 주요한 직책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정치적인 지도자는 언제나 자기 신변의 안전에 관해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독재자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그러므로 이 직책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단순히 술을 검사하고 왕에게 바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왕과 같이 앉아서 왕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자리에서 국사를 논하기도 합니다.
즉 ,느헤미야는 국정을 논할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그를 술장관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오늘날의 직책을 찾는다면 그는 일종의,왕의 비서실장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1장 1절을 보십시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술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이 때 그 나라의 왕은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유대인의 달력으로 기슬르월은 지금 우리의 달력으로 십일월 말부터 십이월 초순을 가리킵니다.그리고 이 아닥사스다 왕이 머물던 궁이 수산궁입니다. 이아닥사스다 왕에게는 몇 개의 궁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궁이 수산에 있던 수산궁이었습니다.
이 수산은 바로 그 나라의 수도였습니다.이 수산궁에 대한 최근의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수산궁은 금과 은과 상아로 지어진 대단히 수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었습니다. 바로 이 수산궁에서 느헤미야는, 왕의 곁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느헤미야에게 한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그러니까 유대인 출신 가운데 하나니라는 삶이 자기 고향,예루살렘을 다녀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자세한 소식을 듣습니다.
3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 되었다 하는 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3,4절).
2. 기도의 사람 - 느헤미야
앞에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기도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기도의 사람이라고 할 때 윌의 머리 속에 얼른 연상되는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아마도 기도하는 사람은 눈을 감고,귀를 막고,세상 물정을 아무것도 모르고 깊은 산속,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로 세월을 보내는, 이세상 사람과는 상관이 없는 어떤 이상한 사람을 연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 기도하는 사람은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기도하는 사람은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눈을 뜨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 현실에 대해서 냉철하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사람입니다.그의 귀는 열려 있습니다.
그는 열린 귀를 통해서 자기 주변에서 들려 오는 소리들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주위의 소리를 듣고 주위 환경을 바라보므로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아파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열려진 귀가 있었습니다.오늘날 우리,현대인들은 자기 말만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어서 듣는 귀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 조국과 백성들의 형편을 물어 보았고 전해주는 소식을 들었읍니다.그리고 그는 자기 조국에 대해 안타까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결코 안일주의자나 이기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방 나라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사람입니다.그러므로 그는 이방 나라에서 자기의 지위에 만족하고 고국의 현실을 외면해 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걱정해서 무엇합니까? 800마일이나 떨어진 여기에서 조국의 현실을 알아 보았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왕의 술상을 차리고 왕의 곁에 앉아서 이야기나 나누는 그가 사랑하는 조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현실을 안다 한들 과연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이러한 자기 합리화의 작업을 통해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기 동족들의 모든 형편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아 자기만 잘 살고 잘 먹을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그는 자기 조국의 현실을 듣고 마음 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상처를 내가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마다 상처받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아픔이 없이, 희생이 없이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어느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민족을 사랑한다든지 교회를 사랑한다든지 한 사람을 사랑한다든지,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 아픔을 단순히 감상적인 아픔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는 앉아서 울고 슬퍼했다고 증언합니다.그런데 그는 울고 슬퍼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만일 그런 식으로 끝냈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운다고 해서 우리의 역사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기만 했읍니까? 그들은 울기만 했습니다.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위대한 삶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그는 기도를 알고 잇었던 사람입니다.그는 울고 슬퍼하다가 일어났습니다.그리고 그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이 사람은 기도를 알고 기도의 영광을 알았습니다.그는 기도의 아름다움을 ,기도의 힘을,기도의 권세와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기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기도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기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기도라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장식품에 불과할지 모릅니다.기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기도는 샤마니즘적인,미신적인 주술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는 기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까?
앞서 언급한 그런 정도입니까?
교회의 역사를 움직여 온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무디를 만나보십시오.
스펄젼을 만나 보십시오.루터와 칼빈을 만나 보십시오. 베드로와 바울을 만나 보십시오.역사를 움직였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무엇이 그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었으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역사의 현장 속에서 역사를 바꾸는 이 위대한 일어 동참하게 하였는지 이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기도가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금식하며 기도하는 의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금식기도'하면 밥을 굶는다는 것을 제일 먼저 연상합니다. 그러나 밥을 안 먹고 굶는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체중 조절에는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금식기도는 밥을 안먹고 굶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모든 기도 가운데서 금식기도는 가장 절박한 기도의 형태입니다.
느헤미야가 금식기도했다는 것은 밥 먹을 시간까지 아껴가며 기도하는 일에 전심전력했다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그는 전적으로 기도했으며 장식적인 기도나 의례적인 지고가 아니라 기도에 자기의 영혼과 마음과 심장을 싣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는 지속적으로 기도했습니다.한 번 기도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수일간을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왜 기도합니까? 자기 백성을 위해서 왜 기도합니까? 자기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십니까?
살자하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 중거는 기도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당신이 기도의 능력과 권세와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기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나요?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시나요? 아내를 사랑하십니까?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시나요? 내가 누군가를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의 증거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들부들 떨며 황폐한 예루살렘 성과 그 성에서 고생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될 사람인데, 수산궁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그날 그 날을 지냄으로 써 만족할 수가 있었던 사랑인데도 기도를 합니다.자기 백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합니다.역사를 바꿉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역사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그는 먼저 기도로 준비합니다.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위대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항상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최고의 힘을 쥐고 있었던 나라가 메대바사입니다.
즉,느헤미야가 모시고 있던 왕이 전 세계에서 최근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왕이었읍니다.만일 당신이 그런 왕을모시고 있다면 당신의 고향에 돌아가서 고향을 살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더구나 왕과 만날 수 있다다 기회가 언제나 있으므로 왕에게 가서 요청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먼저 호소하지 않았습니다.그는 먼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보다 하나님을 움직일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당신은 언제 기도합니까?
당신이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짜증나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 곤란한 상황에 부딪쳐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아마도 당신을 도와줄 친구를 찾을 지도 모릅니다.또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잘 되지 않고 환경이 자꾸 말히고 모든 것일 불가능해 보일 때 그 때에야 '기도나 해보자'는 식의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 했습니다.
3. 느헤미야의 기도 방법
느헤미야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고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일을 가능하게 했던 이 놀라운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의 한 놀라운 모본을 발견합니다.우리는 보통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모본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도 우리가 모본으로 삼을 수 있는 기도가 있읍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첫째로, 느헤미야는 기도의 대상을 알고 기도를 시작했읍니다.
모든 성서적 기도는 그렇게 시작해야 합니다.본문 5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는 기도를 할 때 먼저 기도의 대상을 불러야 합니다.우리의 기도는 벽을 향해서 부르짖는 독백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나 어떤 철학자들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향해서 스스로 기도하는 그런 따위의 기도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니님."
“위대하신 하나님”
그는 하나님을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칭합니다.
그가 고향에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고 민족을 회복시키는 일은 사실상 현재의 자기 입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그러나 그는 이 불가능한 과제에 도전하기 위하여 크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작은 신은 자기의 기도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께 큰 문제를 가지고 나아옵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크신 하나님이십니까? 위대한 하나님이십니까?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참모들을 불러 모아 놓고 "여러분, 그 동안 참으로 수고 많이 했소.이제 소원이 있으면 한 가지씩 이야기해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참모들이 집을 한 채 사달라든지 휴가를 달라는 요청들을 합니다. 그 중에 데닉이라는 한 신하가 알렉산더 대제에게 이런 요청을 합니다.
{대왕이시여,대왕께서 정복한 나라 중에 한 나라를 제게 주십시오}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또 왕이 그러한 부탁을 들어 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읍니다.그러나 알렉산더 대제는 뜻 밖에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라 하나를 그대에게 주겠소. 그대는 나 알렉산더가 나라라도 하나 뚝 떼어 줄 수 있는 큰 사람으로 믿어 주었기 때문에 나 역시 이러한 호위를 베푸는 것이오."
아시아에 기독교가 전혀 전파되지 않았던 어두운 시대에 윌리엄 케리는 세계 선교의 창을 열기 위해서 배를 타고 인도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으라.위대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라.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어주실 것을 기대하라."
“신실하신 하나님”
느헤미야는 또한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그는 하나님이 "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위대하시면서도 자상하신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므로 이 조그마하고 보잘것 없는 나 한 사람에게도 관심을 보이십니다.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눈물과 고통 속의 삶에 , 모든 사건 속에 관여하셔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의 기도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찬양과 경배를 드림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둘째로,느헤미야는 먼저 자기의 죄를 자백했읍니다.
6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6,7절).
그는 {내 민족이 범죄했습니다}라는 말만 하지 않고 자신도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민족의 범죄함에 대하여 자신도 책임이 있음을 통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제이시키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계 평화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자기는 상관엾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당신도 세계 평화를 파괴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자기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용서의 기도가 왜 필요합니까?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통로가 막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으면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죄 때문에 당신의 눈이 어두워져,당신의 귀가 막히고 당신의 지성이 막혀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당신의 죄를 자복해야 하나님과 나 사이의 통로가 열리고 하나님이 보이며 그분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죄를 자복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그 죄를 추적하십시오, 그 죄를 자백하십시오.그리고 그 죄를 버리십시오. 그 죄를 추적하십시오.그러면 하나님은 그 모습을 드러 내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죄가 하나님과 나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보라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 태양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그 캄캄한 구름이 태양과 나사이를 막았을 뿐입니다.
저 구름만 사라지면, 저 비바람이 그치면 우리는 다시 그 찬란한 태양을 보게 될 것입니다.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삶 속에 관여 하셔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이 하나 가로놓여 있읍니다."죄"가 막고 있읍니다. 이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세째로,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했읍니다.
8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안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찌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8,9절).
다시 말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청컨대 하나님이여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여 주십시오.우리가 그 약속에 의지하여 회개하오니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옵소서..}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 집 꼬마들이 제게 무엇을 요청할 때 저를 가장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빠, 지난 번에 약속하셨잖아요."
당신이 어떤 일을 위해서 기도할 때 먼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강한 감동을 주시는 말씀 앞에 머무십시오.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 다음, 그 말씀을 주장하십시오.
"하나님 이 말씀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이것이 성경적인 기도입니다.
네째로,느헤미야는 자기가 한 기도에 대하여 책임을 졌습니다.
본문 11 절을 보십시오.
"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아닥사스다 오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즉,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린 다음 왕께 나아가 왕에게 자기의 고향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데 도와 달라고 청하려고 한 것입니다.그러나 왕에게 청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는 것입니다.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실 것을 믿고, 이제 왕에게 가서 이야기할 작정이었습니다.
왕이 싫어할지도 모릅니다.필요없는 청탁을 한다고 직위를 박탈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자기의 기도에 책임을 지기로 결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뒤에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했으면 일을 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그것이 성경적인 기도 입니다.
"하나님! 저 이디오피아의 불쌍한 난민들의 굶주림을 보시고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돈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갈 수 있으면 가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오늘날 우리들은 기도는 많이 하는데 자기의 기도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말로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고향에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민족의 재건에 동참할 작정이었습니다.그는 자기의 기도에 책임지기로 결의하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4.결론
느헤미야는 당시 세계를 지배한 메대 바사의 술관원으로 당시로서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었t,q니다.그러나 그는 자기 개인의 안일에만 만족하지 않고 항상 조국의 현실에 대해 걱정했습니다.그는 열린 귀와 부릅뜬 눈으로 주위 상황에 대해서 똑똑히 보고 들으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고국을 사랑한 그의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모본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자기가 기도하는 대상 즉,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찬양과 경배를 드림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자기의 죄를 먼저 자백했습니다.
세째,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했습니다.
네째, 느헤미야는 자기의 기도에 대한 책임을 졌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과 더불어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해서도 기도하는 방법을 배워 성경적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입니다.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