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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8-23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 변한규 목사
본문 말씀의 배경은 아람왕이 이스라엘과 전쟁할 때 심복들과 비밀리에 전쟁계획을 짤때였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모처에다 진을 치자고 계획을 세우면 그 기밀이 곧장 상대방 이스라엘에게 알려지고 타처에게 진을 치자고 계획을 바꾸면 또 그 기밀이 이스라엘에게 알려져 그 기밀이 밝혀졌습니다.
여러차례 이런일이 있어 번민하던 아람왕이 본문 11절에 "참모들을 모으로 우리중에 누군가가 첩자가 있지 아니하냐"물었습니다.
그때 심복 하나가 말했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에 선지자 엘리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있기 때문이라니, 무슨말이냐?" 왕이 되물었습니다.
심복이 말하기를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 왕께서 침실에서 하신 말씀까지라도 알고 그것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람왕은 격분하면서 "그렇다면 엘리사가 어디있나를 보라. 내가 당장 그를 잡으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나이다." 그 말을 들은 아람왕은 곧장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서 밤에 도단성을 에워쌓습니다.
그때 엘리사의 사환이 이 광경을 목도하고서 절망하는 말로 본문 15절에 "아, 주여 우리가 어찌 하오리이까!" 위기를 만났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위기를 만났을 때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요령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위기에 대한 진단.
본문 14절에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쌓더라" “에워쌓더라”는 말은 강자가 약자를 완전히 포위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엘리사의 사환은 "아, 내 주여 이제 우리는 절망입니다"라고 한탄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엘리사의 사역이 끝장을 보았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부터입니다.
그 이유는 엘리사의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람 군대가 어찌 그 하나님의 군대와 맞서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골리앗이 큰소리 쳤던 이유는 다윗의 물맷돌의 위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람군대가 이스라엘 군대를 깔본 이유는 본문 17절에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라고 했습니다.
아람왕이 눈이 어두워서 불말과 불병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불말과 불병거는 하나님의 군대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입니다. 여기의 아람군대는 사단과 원수입니다. 위기, 질병, 시험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하나님의 군대와 맞서 싸워서 이길 군대가 없습니다.
이제 아람군대가 도전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가 도단성을 에워쌓습니다. 그러나 초전박살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엘리사가 기도의 힘을 빌어 아람군대 모두를 소경으로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눈뜬 사람과 소경의 전쟁은 전쟁이 될 수 없습니다. 성한 눈을 소경으로 되게 하신분은 눈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94편 9절에 "귀를 만드신 자가 어찌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어찌 보지 아니하시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많은 이적을 낳은 이적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요단강을 쪼개기도 했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게도 했습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기도 했고 그 문둥병을 게하시에게로 옮기게도 했습니다. 마라의 쓴물을 달게도 했고 물에 빠진 도끼를 물 위로 떠 오르게도 했습니다. 본문 12절에 "엘리사는 침실에서 하는 말 까지도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배경은 불말과 불병거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엘리사를 어찌 아람왕이 이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싸운 다윗을 골리앗이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싸운 모세를 바로왕이 이길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의 경우도 같습니다. 전쟁의 승부는 이미 끝난 셈입니다. 본문 끝절에 "이로부터 아람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 하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위기에 대한 자세.
위기를 만났을 때 엘리사의 사환은 절망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이까"슬퍼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본문 16절에 "두려워 하지 말라"했습니다.
이 뜻은 '염려하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신령한 눈이 아직 열리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람왕의 말과 많은 병거와 군사만을 보고서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는 수가 더 많고 힘이 더 강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시편 3편 6절에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했고 시편 27편 3절에서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답이 많은 사람들의 것을 소개하면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장 중에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죽음을 인생의 종국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 흔히들 말하기를 죽음의 사자가 자기를 데려가는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고 죽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생명을 한 자라도 더 할 수 없습니다.
또 죽음은 인생의 종국이 아닙니다.
시인 롱펠로는 '인생은 참이다, 인생은 진실이다. 죽음은 인생의 종국이 아니라 건너편의 영원한 생이 또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에 무섭게 생긴 죽음의 사자가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데려가심'입니다. 원수를 두려워 합니다. 원수의 세력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강한 아낙자손을 보고서도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생각하고 원수를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다나시우스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그는 당시의 집사이며 믿음의 대장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전 세계가 나를 반대하는가! 나는 전 세계를 반대하리라.' 얼마나 강하고 담대합니까!
우리는 루터도 배워야 합니다. 마귀가 원수 위에 기와장보다 많을지라도 가지 말라고 권하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는 그곳으로 가리라. 진리는 진리다'라고 외쳤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는 바로군대가 추적해 왔을 때 백성들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말하기를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하시는 일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친히 싸우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원수를 위하여 도리어 기도하고 사랑하고 복을 빌어야 할 것입니다. 환난을 두려워 합니다. 그 이유는 환난을 마치 우리를 삼키려는 풍랑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센 풍랑도 수령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풍랑이지만 수령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삶의 놀이터가 될 수가 있습니다. 유유히 풍랑 속에서 즐기면서 수영을 하지 않습니까. 그 환난이 도리어 우리의 믿음을 키우고 영혼을 영글게 합니다.
시편 49편 5절에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속담은 "풍랑없이 위대한 선장없다" 환난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평소에 부르지 않던 사람도 환난을 당하면 '오,하나님이여'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갑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우리의 찬송은
♬두려울 것 없겠네♬ 뿐만 아니라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인생을 살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백배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위기에 대한 대책.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극복할까요? 대책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신령한 눈을 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코스모스, 국화, 달, 별을 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없이는 불말과 불병거를 볼 수 없습니다. 영안이 있어야 하나님도 보고 천국도 봅니다. 영안이 열려야 성경을 바로 읽을 수가 있고, 내 속에 있는 죄악도 직시할 수 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육 안으로 보지만 내 눈속에 있는 들보는 영안이 열려야만 볼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크게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내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모세는 영안이 열리자 "내가 누구관대" 죄 된 자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도 영안이 열리자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둔한 자외다"라고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영안이 열리자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줄 모르나이다" 그는 바로 보았습니다.
바울도 영안이 열리자 "죄인중에 내가 괴수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허물많은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 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했고 세리도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을 바로 보게 됩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눈이 열려지지 아니했을 때 땅만 보고 두려워 했습니다. 아람 군대만 보고서 떨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려서 본 것은 불말과 불 병거입니다.
사람들은 엘리사의 종과 같이 잘 못 봅니다. 아람군대만 보면 누구나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러 하나님을 볼 때에는 없었던 소망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눈이 열리면 어떤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까?
강한 군대를 거느리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우리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여기의 '함께'라는 말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동행을 의미하고 '많다'는 말은 능력이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본문 17절에 "엘리사를 둘렀더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해하려고 하는 아람군대를 물리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군대로 엘리사를 둘러서서 그를 지키고 보호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위기를 결코 외면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엘리사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본문 18절에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며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이뜻은 '저들이 소경이 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기도한대로 저들이 소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확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들으시는 하나님이 또한 응답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새성전 건축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십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세상을 사노라면 누구가 위기를 만납니다.
크고 작고 많은 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위기를 극복하는 대책은 역시 기도밖에 없습니다.
본문 17절에 "기도하여 가로되" 여기의 기도는 믿음이라는 뜻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멘이 없고 믿음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응답도 없습니다.
스펄젼이 말하기를 '기도는 길이에 있지 않고 깊이에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는 비록 짧은 기도였지만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했더니 하나님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하셨습니다.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저들 모두를 소경되게 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119편 18절에서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칠려고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절에는 "너희 병을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두려울 때에 기도하십시오.
어려울때에 기도하십시오.
괴로울때에 기도하십시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습니까?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하나님이여 이것들을 없애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안을 열어서 그 어려움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의 핸들은 하나님께서 돌리시기 때문이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정돈하실 때에는 우리가 쓰던 시간, 재산, 지위, 기술, 권세, 자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돌려 드려야 합니다.
가지고 무덤으로 못 갑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말하기를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도적 맞은 페이지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도적맞은 것을 반드시 찾을 것입니다. 누가 동면의 거울을 개조할 수 있으며 누가 다가오는 화창한 봄날을 막을 수 있으리요.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은 결코 빗나갈 수 없습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은 그 밭의 주인도 되시고 농부도 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는 축복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