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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宋郊의 정읍 산내 낙향과 조선 후기 宋公菴 重修
한남대 허인욱
1. 머리말
宋郊는 礪山宋氏로, 충렬‧충선왕대에 활동하던 宋璘(?∼1307)의 아들이다. 宋璘이 知申事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知申公派라 불린다. 宋郊는 고려 말에 전북 정읍시 산내면에 자리한 운주산에 宋公菴을 짓고 居士의 삶을 살다가 사망하였다. 宋郊가 낙향하여 정착한 송공암은 산내면 매죽리 ‘송감’이라 부르는 지역에 위치했다. 송공암은 조선 후기에 가서 2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나, 어느 순간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는 1963년에 다시 3차 중수를 하고 2001년에 4차 중수를 한 현대식 건물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1963년의 중수 후에는 ‘수운재’라 불리다가 1970년대에 와서 ‘永雲齋’로 재호를 바꾸었다. 영운재에는 宋璘의 후손인 宋郊와 孫 宋禧 그리고 曾孫 宋繼性과 그 부인들을 모신 祭壇이 모셔져 있으며, 해마다 이곳에서 시제를 지내며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선행연구에는 宋郊의 태인 정착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료의 한계로 논의가 심도있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宋郊의 산내 정착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조선 후기에 가서 派祖가 宋璘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그의 아들인 宋郊가 부각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2. 송교의 태인 낙향과 그 배경
여산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해당한다. 世宗實錄 地理志와 東國輿地勝覽에는 여산현의 토성으로 宋이 있으며, 여산과 가까운 仁義의 토성 가운데도 송씨가 존재한다. 여산송씨의 시조는 宋惟翊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고려 때 進士로 나라에 공훈을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으며 은청광록대부‧추밀원부사에 추증되었다. 大東韻府群玉에는 “고려시대 政堂文學 宋淑文의 후손이다. 송숙문의 아버지 송유익은 戶長으로써 進士에 올라 비로소 鄕役을 면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여산송씨는 송숙문이 정당문학에 임명되고 그의 손자인 宋松禮가 문하시중에 올라 礪良府院君에 봉해진 후 가세가 창성하기 시작하였다.
송송례는 元宗 11년(1270에 권신 林衍의 아들 林惟茂를 주살하고 왕정을 복고시켰다. 그는 그 공으로 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봉되고, 위로 삼대를 추봉하는 은전을 받았으며, 推誠翊戴同德佐命功臣의 작호와 礪良府院君에 봉해졌다. 門下侍中․知都僉議事․上將軍․判典理司事를 거쳐 中贊으로 치사하였다. 부인은 배천趙氏인데, 아들로 宋琰과 宋玢을 두었다. 송염은 上將軍까지 오른 것이 확인되며, 송분은 임유무를 제거할 때 衛士長으로 참여하여 공을 세운 이후에 여러 관직을 거쳐 충렬왕 29년(1303)에 樂浪公에 책봉되고 충숙왕 5년(1318)에 中贊으로 치사한 후 사망하였다. 여산송씨 가문은 송송례와 그의 아들 송염과 송분대에 크게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송염과 송분의 아들대에 가서 크게 5파로 나뉘었다. 송염의 아들 宋惲이 元尹公派, 宋邦英이 密直公派, 宋元美가 小尹公派, 송분의 아들 宋璘이 知申公派, 宋瑞가 正嘉公派이다.
지신공파의 시조인 宋璘(?∼1307)은 충렬왕 25년(1299)에 前判密直司使 柳庇가 父 송분을 모함할 때 右副丞旨로 함께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충렬왕 30년(1304)에 지신사가 되어 여러 차례 충렬왕을 수행해 元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가 사이좋지 않음을 이용하여 從兄인 송방영 그리고 王維紹 등과 함께 이간질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충선왕의 비 寶塔實憐(계국대장)공주를 瑞興侯 王琠에게 개가시키려 하였으며 충선왕의 환국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송방영 등과 함께 원에 갔다가 征東省에 갇혀 있었는데, 이때 元의 테무르칸[成宗]을 보필하던 유모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충렬왕 33년(1307)에 충선왕에 의하여 서흥후 왕전과 종형인 송방영・왕유소・宋均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들 외에도 韓愼·宋均·金忠義·崔涓 등이 文明門 밖에서 같이 참수 당했는데, 그들의 가산은 모두 적몰 당했으며, 부자와 형제들 또한 노비가 되었다. 이 가운데 한신의 아들 韓用盉 등 3인은 驛戶에 충당되기도 하였다.
송린의 아들이 宋郊이다. 송교가 송린의 아들임은 조선 전기를 살았던 그의 후손인 宋演孫(1460~1508)의 신도비명에서 볼 수가 있다. 申光漢(1484∼1555)이 지은 「송연손신도비」에는 “玢이 知申事 璘을 낳았고 璘이 判密直寺事 郊를 낳았다.”고 하여 그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다음 내용을 보자.
가-1) 충렬왕 갑진년(충렬왕 30․1304)에 태어났고 충숙왕 병자년(충숙왕 5․1336) 문과에 급제했으면 ( 벼슬은) 中正大夫‧典醫令에 이르렀다. 匡靖大夫‧判密直司事에 추증되었다. 洪武 계해년(우왕 9․1383)에 사망했는데 나이가 80이었다. 묘는 태인 天涯洞에 있다고 한다. ○ 부인은 平康蔡氏로, 아버지는 政丞 蔡宗麟, 조부는 僉議中贊 蔡模, 증조는 少府 蔡子華이다. ○ 공이 늙어 은퇴하여 고부와 태인 사이의 雲住山에 집을 짓고 스스로 睡雲居士라 칭하였다. 후인이 公의 집을 일러 宋公庵이라 하였다. 후손들이 해마다 1차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가-2) 송방영 및 송린이 王[忠烈王]을 설득해 위구르[畏兀兒]문자로 된 글을 황제에게 올려 前王[忠宣王]의 환국을 막도록 한 일이 있었다.……蔡宗璘이란 자는 송린과 인척간이어서 역시 체포되었는데 마침 사면령이 내려 죽음을 면하였다.
가-1)은 여산송씨족보의 송교에 기재된 내용이고, 가-2)는 고려사의 송방영열전의 서술이다. 송방영은 송교의 父인 송린의 4촌 형이다. 족보의 서술을 보면, 송교는 갑진년인 충렬왕 30년(1304)에 태어났으며, 병자년인 충숙왕 5년(1336)에 과거에 합격했고 우왕 9년(1383)에 사망했다. 여기에 또한 그의 처가 평강채씨이며, 처부는 ‘蔡宗麟’임을 알 수 있다. 가-2)의 고려사 열전과 채종린의 父인 채모의 묘지명에는 ‘蔡宗璘’으로 기재되어 있다. 송교가 채종린의 사위임은 씨족원류의 ‘平康蔡氏’조에서도 살필 수 있다. 여산송씨와 평강채씨가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임은 가-2)의 채종린이 송린과 인척간이라는 언급에서 확인이 된다.
그런데 족보의 내용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송린의 죽음이 1307년이었는데, 송교가 1304년에 태어났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송린이 사형당하는 1307년에 이미 채종린과 인척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족보를 따른다면 송린이 4살일 때에 혼인을 했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기록이다. 고려시대 혼인 연령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이 고려사 등에서 잘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사례를 살펴보면, 남성은 17세부터 26세 사이, 여성은 13세부터 31세 사이에 혼인했음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원 간섭기에 들어서서는 貢女 등의 문제로, 여성의 혼인 연령이 13∼14세로 낮아지기는 했다. 원 간섭기 조혼의 습속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經國大典에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가 되면 혼인할 수 있다는 항목으로 정착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송교 또한 이러한 흐름을 벗어났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송린이 사망하는 1307년에 송교의 나이는 적게 잡더라도 10대 중반은 넘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송교가 15세 정도에 결혼했다고 가정한다면, 송교의 출생은 1292년보다 앞선 시점에 있었다고 봐야 하고, 80세에 사망했다는 그의 졸년 또한 1371년 이전으로 당겨지는 것이 옳다.
이러한 송교의 생몰년 조정은 그의 과거 합격 연도 또한 조정할 수밖에 없게 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족보에는 병자년인 충숙왕 복위 5년(1336)에 송교가 문과에 합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신공파 후손인 宋榮大(1885∼?)가 찬한 「睡雲菴公諱郊遺墟祭壇碑」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타난다. 이 비문을 보면, 송교가 3등으로 합격했으며, 당시 지공거가 蔡洪哲(1262~1340)이었다는 점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채홍철이 1336년 정월의 과거에서 지공거였음은 고려사에서 확인이 된다. 채홍철은 채종린의 아버지 채모의 동생인 蔡諴의 아들이다. 즉 채홍철과 채종린은 4촌간이 되는 셈이다. 송교와 채종린의 딸이 혼인한 것과 주목되는 서술이기는 하다. 하지만 앞서 논의한 대로 송교가 1292년 이전에 태어났다 한다면, 1336년은 송교의 나이 47세가 넘는 때이다. 과거 합격 연도를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송교의 과거합격과 관련해 庚申年인 禑王 6년(1380)에 同進士 2위로 합격하고 관직이 密直에 이른 登科錄前編의 ‘散員 宋子郊’라는 인물이 주목된다, 성과 이름이 송교와 유사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인적사항에 ‘父 璘, 祖 玢, 曾 松禮, 外 李德孫, 妻父 蔡麟 礪山人’이라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산송씨이고 증조와 조, 부가 송송례와 송분, 송린 그리고 처부가 채(종)린임을 고려하면, 송교와 같은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족보를 따르면, 송교의 과거 합격 연도가 1336년인데, 송자교는 1380년이기 때문이다. 44년의 연도 차이가 난다. 송자교가 합격한 1380년은 송교가 족보의 생년대로 1304년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의 나이 77세 되는 해에 해당한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송교가 1290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이미 사망한 이후가 되는 셈이다. 송교와 송자교를 동일인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송자교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송자교는 李穡이 지은 「贈宋子郊序」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 내용을 보면, “崔疏齋가 와서 말하기를, ‘彪가 廉東亭과 함께 星山 宋令公 문하의 출신인데, 지금 그 손자 子郊가 또 東亭에게 뽑히게 되어 장차 星山에 돌아가서 그 할아버지를 뵈려고 하므로, 우리들이 그 떠남을 전송하게 되자 동정도 또한 감히 자중하지 못하고 나와서 모임에 참여하였다.……선생은 비록 후진이나 함께 龍頭會에 있으니, 子郊를 보는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 비할 바 아니므로 행여 한마디 말로 빛나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라는 서술이 있다. 소재 최표[崔彦父]와 東亭 廉興邦이 ‘星山 宋 令公’의 문하이며, 송 영공의 손자인 송자교가 염흥방이 주관했던 과거에서 합격한 후, 성산에 거주하고 있는 ‘송 영공’을 만나고자 떠나려 하자, 이를 전송하려 했다는 것이다. 염흥방이 과거를 주관한 것은 1380년이었다. 이는 고려사의 이해 5월에 염흥방이 知貢擧, 密直使 朴形이 同知貢擧가 되어 進士를 뽑았는데, 李文和 등 33인, 明經業 6인에게 급제를 내렸다고 하여 확인이 된다. 앞서 언급한 송자교가 합격한 해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염흥방이 과거에 합격할 때 그의 시험관을 맡았던 송영공이 누구인지 알면, 그가 송교와 동일인인지 여부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염흥방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공민왕 6년(1357) 4월이었다. 이색이 쓴 「소재기」에 의하면, 최표 또한 丁巳年, 즉 1357년에 등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丁酉榜의 지공거는 政堂文學 李仁復, 동지공거는 簽書樞密院事 金希祖였다. 이인복이 ‘성산이씨’이므로, 이씨를 송씨로 오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이인복이 공민왕 23년(1374)에 사망했음을 고려하면, 그가 ‘성산 송 영공’일 가능성은 아예 없다. 그렇다면 국자감시일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자. 최표의 국자감시 입격과 관련된 내용은 찾을 수가 없으나, 다행스럽게도 염흥방의 국자감시 입격 연도는 이색의 「愚谷諸先生送洪進士詩卷」에서 찾을 수 있다. 염흥방이 계사년, 즉 공민왕 2년(1353)의 진사과에 입격하였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해 국자감시는 5월에 열렸는데, 당시 시관은 宋天鳳이었다. 牧隱詩藁를 보면, 廉東亭 즉 염흥방의 座主로 ‘宋先生 密直’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송천봉으로 봐도 큰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최표 또한 송천봉의 문생이라 볼 수 있고, 송자교는 송린의 아들 송교가 아닌, 송천봉의 손자인 셈이 된다. 실제로 김해송씨 가문에서는 송천봉과 송자교를 祖孫으로 보고 있다. 아마도 등과록전편의 정리자가 송교와 송자교를 혼동해 잘못 기재한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이러한 혼동은 송교의 과거 합격자료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송교는 송린의 사후 어느 순간 태인의 운주산으로 낙향했다. 그 이유를 가-1)은 나이가 들어 은퇴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견해에 따라서는 고려 멸망에 대한 반발로 보기도 한다. 이는 「杜門洞七十二賢錄」이나 「麗季淸士列傳」에 두문동 72현 중의 1인으로 典書에 이른 후 은퇴하여 礪山에 거주한 宋皎라는 인물을 宋郊와 동일인으로 봤기 때문이다. 송교를 행적이 드러나지 않는 두문동 72현 중의 1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수운암공휘교유허제단비」에도 杜門의 諸賢이 붙잡혀가자, 이에 송교가 武城, 즉 태인 운주산에 은거했다고 하여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송교가 고려의 멸망에 대한 반발, 즉 李成桂 세력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낙향이라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족보의 기록을 따르더라도 송교가 고려가 멸망한 1392년보다 10년 앞선 1383년에 사망을 했다는 점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이성계가 정치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10자 공신호를 받는 禑王 11년(1385) 9월 이후에나 가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충신으로 인정하는 정몽주가 이성계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 것도 恭讓王代에 가서였음을 고려하면, 이성계 세력에 대한 반발로 낙향했다고 보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낙향과 관련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의 부인 송린이나 삼촌인 송방영이 역모죄로 참형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참형을 당할 때, 그 일당들의 가산은 모두 적몰당했고 아버지와 자식 그리고 형제들은 노비가 되거나 일부는 역호로 충당되는 처벌을 받기도 했다. 송교의 낙향을 이러한 사정과 관련해서 살펴보는 것이 합리적인 이유이다. 그런데 송린의 아버지인 송분이 中贊으로 치사한 뒤, 1318년에 가서 사망했으며, 인척간인 채종린이 사면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가-2)]을 고려하면, 송교의 경우도 그러한 처벌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아버지인 송린이 역적죄로 인해 참형당한 이상 송교가 개성에서 기득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사실상 어려웠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송린에 대한 충선왕의 분노는 당시 재상이던 韓希愈에 대한 평가와 그의 자식 한검에 대한 처리에서 엿볼 수 있다. 한희유는 군졸에서 승진하여 재상까지 오른 까닭에 임금의 덕에 감사하고 순종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충선왕은 “한희유는 왕유소와 송린의 당이다.”라고 평하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인 韓儉을 가주로 유배보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송린의 아들인 송교 또한 충선왕의 재위기간에 기득권을 유지하기가 사실상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것은 송교의 처부였던 채종린의 자손들이 臨陂로 낙향했다는 사실이다. 채종린의 손자인 蔡陽生과 채양생의 아들인 蔡王澤[謨-종린-文紹-양생-왕택] 그리고 채종린의 재증손인 蔡智生[謨-宗瑞-文弼-琇-지생]이 개경을 떠나, 지금의 전북 군산시 임피로 入居한 것이다. 平康蔡氏族譜에는 채양생과 채왕택의 낙향 이유를 고려 멸망으로 인한 낙향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채왕생은 고려가 망하자 개경을 떠나 예성강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여 가장 험준한 곳인 임피면 상림면 香林佛舍(지금의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 향림)를 찾아 은둔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채왕택은 앞서 언급한 「두문동칠십이현록」에 “領護軍 麗亡 浮海而南 隱居臨坡”로, 「여계청사열전」에 “官領護軍 浮海而南 隱居臨陂”라 하여 낙향을 고려 멸망과 연관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채종린 또한 송린의 당여로 참형 직전까지 갔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또한 고려 멸망과 관련되어 낙향한 것으로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송린의 후손과 채종린의 후손이 모두 낙향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들의 낙향에 1307년의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만은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다만 이들이 낙향처로 임피나 태인의 산내를 택한 이유까지는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평강채씨의 임피 정착과 관련해서는 인척관계에 주목한 연구가 도움을 준다. 채왕택은 여산송씨 宋詹의 사위인데, 송첨은 송교의 조부인 송분의 형 송염의 증손이다[琰-惲-壺山-첨]. 그런데 송첨의 조부인 송운의 사위가 담양전씨 田得雨이고, 이 전득우의 사위가 沃溝에 세거하고 있는 제주고씨 高灝였던 것이다. 제주고씨는 12세기 중엽에 高惇謙이 옥구에 처음 입향한 이후 대대로 그곳에 세거하고 있었다. 고호는 고돈겸의 6세손에 해당한다. 즉 채양생과 채지생의 임피 낙향을 인척관계로 인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셈이다. 처향은 아니지만, 처가의 일부가 전북지역으로 이주했다는 점에서 송교의 태인 산내 낙향도 이와 관련해 이해해 볼 수 여지가 있다. 임피는 여산송씨의 본향인 여산과도 멀지 않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견해가 임피나 여산이 아닌, 태인의 운주산을 송교가 낙향지로 선택한 이유를 모두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송교가 낙향 후에 睡雲居士라고 자칭했다[가-1)]고 하는 점이다. 거사는 불문에 귀의하였으나, 속가에 살면서 보살행을 닦는 사람을 가리킨다. 송교가 낙향한 운주산의 송감 지역은 후백제대 세워진 龍藏寺의 영역 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용장사는 옥구에 처음 입향한 고돈겸의 시 「龍藏寺獨妙樓」와 金克己의 시 「龍藏寺」의 소재가 될 정도로 알려진 절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송교의 낙향은 불교적 삶을 살고 싶은 그의 개인적인 소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여지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용장사가 위치한 지금의 정읍시 산내면까지 굳이 낙향할 필요가 있었을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산내면은 1980년대만 해도 눈이 오면 교통이 쉬이 막힐 정도로 산간오지이다. 그곳은 산이 깊고 땅이 치우쳐져 있다거나, 땅과 산은 높고 험준하다고 표현될 정도로 외진 지역이다. 따라서 불교적인 삶을 살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본향인 여산이나 처가 일부가 거주처로 삼은 임피와 가까운 곳을 선택할 법도 한데, 굳이 운주산 자락을 선택한 것은 여전히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송교의 처가인 평강채씨 채왕택 또한 임피에서 가장 험준한 곳인 상림면 香林佛舍에 은둔했다는 앞선 언급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307년의 참형에서 살아남은 후손들이 깊은 산속으로 낙향한 것을 우연의 일치로만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심스럽지만 이는 송교가 1307년의 역모 사건에서 살아남기는 했으나,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후환을 우려한 나머지, 서울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 오지의 운주산을 낙향처로 선택했다고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3. 송공암 중수와 조선 후기 송교 追崇
송교는 말년에 雲住山에 집을 짓고 스스로 睡雲居士라 칭하고 불교적인 삶을 살았다. 후대 사람들이 그 집을 일러 말하기를 宋公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송공암 대신 永雲齋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 후기 2차례의 송공암 중건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후손들이 1942년에 와서 壇을, 1943년에 遺墟碑를, 1958년 3월에는 지신공‧전서공‧부사공 3位의 단을, 같은 해 9월에는 知申公事蹟碑가 세웠다. 그 후에 1963년 2월에 다시 3차 중수가 있었는데, 이때 중수한 건물을 睡雲齋로 부르다가 후에 다시 齋號를 영운재로 바꾸었다.
현재 영운재 내에는 ‘송린사적비’와 ‘宋郊遺墟碑’, ‘嘉靖大夫․工曹典書 宋禧와 貞敬夫人 義城金氏의 祭壇’, ‘通政大夫․延安府使 宋繼性과 淑夫人 尙州金氏의 祭壇’ 등이 모셔져 있다. 여산송씨지신공파보의 제단도에 보이는 지신공, 수운공, 전서공, 부사공이 이에 해당한다[그림 1]. 이 가운데 지신공은 송린, 전서공은 송교, 전서공은 송희, 부사공은 송계성을 지칭한다. 송희는 송교의 아들이고, 송계성은 송교의 손자이자, 송희의 아들이다. 즉 현재 영운재는 ‘송린-송교-송희-송계성’으로 이어지는 지신공파 4조를 모시는 재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宋公菴과 관련해서는 「제단도」([그림 1])를 보면, 영운재의 뒷산인 운주산의 한 봉우리에 보이는 宋公岩이 참고된다. 宋公岩은 운주산에 자리한 ‘조통바위(혹은 도통바위)’를 가리킨다. 「수운재기」에는 “(산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전설에는 즉 그 바위를 ‘도통암’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모양을 이름하여 송공암이라고 한다고 한다.”고 하여 ‘照通바위(도통바위)’를 송공암으로 인식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인식은 조통바위 아래에 자리한 자그마한 굴의 한쪽 벽면에는 “垂雲居士 宋公이라는 이의 20대 손 興燮이 쓰다.”[그림 2]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통해 증명된다. 지신공파 후손들이 조통바위를 송공암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宋公岩이 송교가 거주한 宋公菴이 자리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가 않다. 이는 태인에 살았던 道康金氏의 일원인 金灌(1575∼?)이 남긴 시 「照通庵贈坦悟」가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김관이 조통암에서 탄오라는 스님에게 시를 준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조통바위에 조통암이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여산송씨가 宋公岩이라 인식하는 조통바위에 조통암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 곳에 宋公菴이 자리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이다.
송공암은 조선 후기에 2차례에 걸쳐 중수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다음 기록을 보자.
나-1) 10대손 判書公 光淵이 淳昌宰가 되어 이 菴을 중수하였고, 11대손 판서공 徵啓가 泰仁縣監으로 와서 다시 중수하였다.
나-2) 英祖 을묘년(영조 11․1735)에 11세손 宋徵啓가 태인현감을 지내면서 고쳐 짓고 記를 지어 기록하였다. 계미년(순조 23․1823)에 19세손 宋榮祚가 遺墟祭壇碑를 처음 세우고 後孫 參贊官 宋榮大가 찬하였다.
나-1)은 1963년 2월에 후손인 송기섭이 작성한 「睡雲齋記」의 일부이고, 나-2)는 지신공파 족보의 송린조에 기재된 서술의 일부이다. 나-1)은 송공암이 송교의 10대손인 宋光淵(1638∼1695)이 순창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중수한 사실과 11대손인 태인현감 宋徵啓(1690∼1723)가 다시 한번 중수했음을 전하고 있다. 송징계에 의한 송공암 중수는 나-2)에서 확인이 된다.
송광연이 순창군수로 재직한 시기는 그의 행장에서 알 수가 있다. 송광연이 무오년인 숙종 4년(1678) 겨울에 淳昌郡守에 임명되자 3차례에 걸쳐 사양을 했다. 하지만 결국 기미년인 숙종 5년(1679) 봄에 가서 부임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1년 뒤인 숙종 6년(1680) 갑술환국 이후에 副修撰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를 하였다. 즉 송광연이 순창군수로 재직한 기간은 숙종 5년 봄부터 숙종 6년 10월 이전으로 보인다. 송공암이 그 사이에 중수되었음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송공암은 이후 태인현감으로 온 송징계에 의해 다시 중수되었다. 태인현감으로 임명된 송징계가 乙卯年에 고쳐 세우고 기문을 지어 이를 標識하였던 것이다[나-2)]. 송징계가 태인현감에 재직한 시기는 갑인년 10월부터 을묘년 6월, 즉 영조 10년(1734) 10월부터 영조 11년(1735) 6월까지였다. 그렇다면 을묘년인 영조 11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조금 더 기간을 한정할 수 있는데, 이는 산내면 지역이 산으로 둘러싸여 겨울에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수작업은 아무래도 봄이 되어서야 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므로, 영조 11년 봄부터 6월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보면 무난할 듯하다.
그 후 송공암에는 19세손인 宋榮祚가 송공암에 遺墟祭壇碑를 세웠는데, 그 비문은 宋榮大가 지었다. 송영대가 찬한 유허제단비문은 앞서 언급했듯이 여산송씨지장록에 전하고 있다. 송영대는 자가 季昌으로, 哲宗 2년(1851)에 태어나 35세인 高宗 22년(1885)의 정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송영조는 계성파인 壺巖 宋致中의 10대손이다. 주목되는 것은 송공암 중수에 힘쓴 송광연과 송징계가 숙질간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桂陽派로, ‘瑠-世仁-礎-克訒-時喆-光淵[4자]‧光涑[6자]’→‘광속[6자]-징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들은 태인이 아닌 서울[京]에서 오랜 기간 거주해 온 가문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그들이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 태인 산내에 위치한 송공암을 연이어 중수한 것은 어떤 의도성을 갖고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조선 사회가 성리학이 사회 전체적으로 바탕을 이루게 되면서 부계 친족 중심의 질서가 형성된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조선후기는 가문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개인의 평가에 있어서 가문의 전통이나 사회적 평판 등이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는 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각 가문들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족보를 간행하거나, 선조 관련 기록물을 정리하여 간행하는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여산송씨 집안에서도 宣祖 39년(1606)에 丙午譜를 시작으로 癸巳譜, 甲辰譜 등등의 족보 발간을 이어 간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앞서 송교의 유허제단비 입석에 힘을 쏟은 송영대는 丙寅譜 서문을, 송영조는 丁酉譜 跋文을 쓰기도 했다. 여산송씨도 가격을 높이려고 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사례인 셈이다. 송광연과 송징계에 의한 송공암 중수 또한 가문을 현창하고자 하는 의도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족보의 간행이나 조상 묘소의 정비 등의 조상 숭배의 여러 행위는 이를 수행하는 과정 내에서 문중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행위로 작용했다. 기존 연구를 참고하면, 17∼19세기는 재실이 활발하게 건립된 시기였다. 조선에 들어와 주자가례를 통해 가묘와 재실이 설립되었는데, 中宗 이후 예학 성립과 더불어 가묘 및 재실이 설립되었으며,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들어서서는 일반 사대부 및 서민들의 의례로 정착이 되어갔다고 한다. 송공암의 2차례 중수도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송광연이 가문을 현창하고자 하는 인식을 갖고 있었음은 1678년 그의 伯兄 宋光淹이 薰陶坊 竹前洞의 宗家를 중건하게 된 경위를 대신 기록한 「竹洞宗家重建記」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기에 “내가 보건대, 사대부는 충효와 근검으로 門戶를 창립해 그 자손에게 남기고, 그 자손은 대대로 계승하여 (명예를) 실추시키는데 이르지 않아야 한다. 영원히 세대가 이어지는 것은 대개 드물다. 입신양명에 이르러 장차 그 가문을 크게 하고, 삼가 先廬를 지켜 더하거나 늘리는 바가 없는 것도 선인의 뜻을 잘 이어받는 것과 같은 것이오. 용마루와 지붕이 기울고 무너져 기업이 장차 무너지려 하면 기꺼이 집을 지어, 舊制를 거듭 새롭게 하는 것 또한 선인의 사업을 잘 계승하는 것이다.”라고 언급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상대부터 살아 온 집, 즉 선려가 훼손될 경우, 이를 새롭게 짓는 것 또한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공암 중수도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이는 송광연이 송공암 중수 이후인 숙종 8년(1682)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가서, 황해도 장단에 위치한 지신공파 4세인 송송례의 「墓碑陰識」와 5세 송분의 「養毅公諱玢墓碣文」을 짓고 묘에 비를 고쳐 세은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묘비를 건립하는 일은 당사자의 정신적인 또는 육체적인 수고가 들어갈 뿐만 아니라, 석수의 품삯, 석재 구매 비용, 役軍 비용, 牛車 비용 등과 같은 경제적인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수고를 마다 않고 송광연이 송송례나 송분의 묘비를 건립한 데에는 조상에 대한 추숭, 즉 ‘가문 꾸미기’가 자신과 자신의 가문의 위상을 결정짓는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지신공파의 시조인 송린에 대해서는 추숭행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산송씨세보를 보면, 선조의 벼슬살이 행적을 기록한 宦績 항목에 「貞烈公宦蹟」‧「良毅公宦蹟」‧「正嘉公宦蹟」, 즉 宋松禮(정열공)‧宋玢(양의공)‧宋瑞(정가공)는 존재한다. 그런데 송린의 벼슬살이에 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1934년에 간행된 여산송씨지장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송송례는 송린의 조부, 송분은 부, 송서는 친동생이다. 그럼에도 파시조인 송린의 벼슬살이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성이 느껴지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조선시대는 직계나 방계 조상이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하였거나 역적행위를 했을 때는 그 조상과의 계보 관계를 아예 누락시켜버리는 ‘조작’이 행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작’은 ‘가계의 명예로운 존속’을 위한 치열하면서도 절박한 요구에 따른 행동이었다. 송린이나 송방영이 반역죄로 처단된 사실을 고려하면, 여산송씨 지신공파에서의 ‘송린 감추기’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 孝와 忠을 제일의 덕목으로 삼는 조선시대 사회에서 충을 저버린 조상, 즉 송린의 존재는 가문의 위상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파의 시조라 하더라도 가문의 위상 확립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조상이라면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송린의 존재를 아예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에 여산송씨 지신공파는 파조인 송린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가문의 위상은 드높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송린을 대신해 아들인 송교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송교는 반역행위를 한 것이 명백한 송린과는 달리 반역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신공파는 송교의 산내 운주산 낙향의 이유를 불교적 삶을 살고자 하는 개인적인 선호라거나 또는 고려의 멸망에 대한 반발로 인해 낙향을 선택한 것으로 서술하였는데, 이는 송교가 반역과는 무관한 인물이거나 또는 忠을 발현시킨 인물이었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송교의 강조는 송린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불충 행위는 시나브로 희석시킬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송교의 묘소를 정비하거나, 묘비를 세우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흥미를 가지게 한다. 송교와 관련해서는 거주하던 송공암의 중수 기록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송공암의 중수와 관련해서는 가-1)에 ‘송교의 묘가 태인 天涯洞에 있다고 한다[云]’는 언급이 도움을 준다. ‘있다고 한다’는 것은 족보를 저술할 당시 묘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여산송씨 지신공파에 송교의 묘가 천애동의 어느 부근에 존재했다는 전언만 전할 뿐 그 위치를 알고 있지는 못했던 것이다. 조선 전기 이전 선조 묘의 위치를 잃어버리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불과 100년 전의 조상들의 묘도 잃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조선 전기가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도 중시하는 사회로, 부계 혈통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사회 분위기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조선 전기는 처가나 본인이나 처의 내외 친속의 연고지 등에 따라 적어도 3대에는 한 번 정도 생활근거지가 달라지는 생활 방식 또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후기가 되면서 성리학적 관념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부계친족이 강조되었고 사족들은 이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관심 가운데 하나가 잃어버린 선조들의 무덤을 다시 찾는 일이었다. 당시 사족들은 조상들의 묘를 찾을 수 있는 데까지 찾아 확정을 하고, 그 묘를 수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과 관련해서는 柳成龍의 언급이 도움을 준다. 유성룡은 家牒, 즉 족보를 만드는 목적을 마음에 조상의 무덤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大孝’라고까지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여산송씨 지신공파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송광연이 송송례와 송분의 묘비를 고쳐 세운 것이 그러한 예이다. 송광연과 송징계는 송교의 묘 또한 정비하고 묘비도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송교의 묘는 실전되어 버린 지 오래되어 위치를 알 수가 없자, 대안으로 송교가 거주했다고 전하는 송공암을 중수하는 것으로 가문의 현창을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송광연과 송징계는 송공암 중수를 통해 ‘대효’를 달성하고자 했던 셈이다.
4. 맺음말
송교는 여산송씨로, 송린의 아들이다. 송린의 반역으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기득권을 상실하자, 태인 산내의 운주산으로 낙향을 선택했다. 낙향처를 운주산으로 선택한 데에는 처가의 일부가 여산과 가까운 곳인 임피로 이주한 것과 더불어 불교적 삶을 살고자 한 그에게 운주산에 용장사가 위치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곳이 외부와 소통이 어려운 궁벽진 곳이라는 점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역적으로 처형된 송린의 아들인 송교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후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교는 운주산에 송공암을 짓고 거사로서의 삶을 살았는데, 그가 거처했던 송공암은 조선 후기에 가서 그의 후손으로 숙질 사이인 송광연과 송징계에 의해 2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다. 송공암 중수는 조선 후기의 가문 현창과 관련을 맺고 있다. 묘비를 세우거나 계파의 시조 거주지를 중수하는 것은 자기 집안의 家格을 높이기 위한 ‘가문 꾸미기’의 일환으로 진행된 작업이었던 것이다. 여산송씨 지신공파에서 계파의 시조인 송린보다는 아들인 송교가 부각되었는데, 이는 반역을 한 행위가 분명한 송린은 가문의 현창에 도움을 크게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보를 포함한 가문의 문서에서 송린 대신 아들인 송교를 부각시켰던 것이다. 송광연과 송징계는 실전된 송교의 묘 대신 그가 거처했던 송공암을 중수하는 것으로 가문을 현창을 도모함으로써, 대효를 달성하고자 했다.
[김준태 호적수(17) 충렬왕과 충선왕]
권력은 피보다 진하다… 부자 간 권력 다툼
누군가와 싸울 때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방의 터부를 건드리고, 상대방의 존재자체를 말살하려 들면 싸움은 진흙탕으로 변한다. 중조(重祚) 혹은 재조(再祚). 아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용어일 것이다. 단어가 낯선 만큼 단어의 뜻도 낯선데, 퇴위하거나 폐위된 임금이 다시 왕이 된 경우를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고려의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다섯 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려의 24~28대 군주들로, 연이어 중조가 벌어졌다는 것은 이 시기가 상당히 혼란했다는 의미다. 특히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에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얽혀있었다.
흔히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왕과 세자가 부자간이라지만 ‘현재 권력’인 왕의 입장에서 ‘미래 권력’인 세자는 왕권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세자를 의심하고 견제하며 심지어 제거하려 들기도 한다. 예컨대 조선의 인조는 청나라를 등에 업은 소현세자가 자신의 왕위를 노린다고 의심한 끝에 그를 죽게 만들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반대로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친을 살해했다고 알려진 수나라의 양제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진 사례도 있을까? 보기 드물지만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왕좌를 놓고 혈투를 벌인, 바로 충렬왕과 충선왕이다.
원나라 등에 업은 충렬왕, 황실 핏줄 아들에 밀려
충렬왕은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원나라 황실과 혼인한 첫 군주로, 권세가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충렬왕이 먼저 요청한 것이다. 원나라에의 예속이 심화되는 폐단을 낳긴 했지만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의 사위로서 막강한 힘과 권위를 얻게 된다. 충렬왕은 스스로 몽골 사람처럼 변발하고 몽골의 복장인 호복을 착용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친조(親朝, 제후국 왕이 상국에 직접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는 것)에 나섬으로써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충렬왕의 이 행위가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충렬왕은 친조를 통해 외교 역량을 발휘, 고려에 부담을 주었던 여러 현안들을 해결했다. 원에 바치는 공물을 대폭 경감시켰고, 고려에 주둔한 원나라 군대와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철수토록 했다. 또 원나라에 아부해 고려 국정을 어지럽힌 부원(附元) 세력을 제압했다. 모두 황제를 직접 면담해서 얻어낸 성과다.
한데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혼인할 당시 충렬왕에게는 정실부인인 정화궁주와 슬하에 맏아들 자(滋)가 있었다. 제국대장공주가 왕후가 되면서 정화궁주는 후궁으로 격하됐는데, 충렬왕이 정화궁주를 잊지 못하면서 공주의 분노를 샀다. 여기에 왕의 장인인 쿠빌라이마저 붕어했다. 뒤를 이어 원나라 황제가 된 테무르(성종)는 비록 제국대장공주의 조카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충렬왕의 입지가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1298년, 충렬왕은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연로하다는 이유를 내걸긴 했지만 실상 원나라의 압력 때문이었다. 이때 보위를 승계한 사람이 그가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낳은 아들 충선왕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충선왕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굳세며 결단력이 있었다. 아첨을 일삼는다며 부왕의 측근인 신하를 면전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좋은 군주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충분했던 것이다.
이러한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과 마찰을 빚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 성향이 맞지 않고, 아버지가 저지르는 과오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16살 어린 나이에 의지할 사람 하나도 없이 만리타향 고려로 시집을 온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무관심했다. 그러던 와중에 1297년, 마흔이 채 안 된 제국대장공주가 젊은 나이에 눈을 감자 충선왕의 화가 폭발했다.
그는 모친이 죽게 된 원인이 충렬왕의 측근들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충렬왕의 애첩 무비와 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휘두른 환관 도성기, 최세연을 죽였다. 일당 40여 명을 귀양 보내고, 조정 인사를 대대적으로 물갈이 하는 등 정국을 뒤집어 엎었다. 아직 세자에 불과했던 그가 쿠데타에 준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배경 덕분이다. 그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성종의 조카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으니 황실과의 혈연이라는 측면에서는 아버지 충렬왕보다 우위에 있었다. 또한 원 황제로부터 고려의 임시 수상격인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에 임명되어 사실상 국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부왕의 후궁을 죽인 것은 불효이자 참람한 행동이었다. 더욱이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정치를 부정하고, 강력한 개혁교서를 발표했다. 부정과 비리를 발본색원하겠다며 충렬왕의 측근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을 벌였다. 그러던 중 충선왕에게는 불운이, 충렬왕에게는 행운이 일어난다.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부부 금슬이 좋지 않았는데, 이것이 충선왕의 다른 부인인 조비가 계국대장공주를 저주했기 때문이라며 공주가 직접 원나라 조정에 무고함으로써 사단이 벌어졌다. 물론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충선왕은 즉위한지 8개월 만에 원나라에 의해 폐위 당했다.
즉위 8개월 만에 폐위 당한 충선왕 이어 복위 성공
그러자 충렬왕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복위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충선왕 세력을 제거하고, 친위세력을 강화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이혼을 공작했다. 계국대장공주를 조카인 왕전과 재혼시켜 그를 다음 왕으로 삼는다는 복안이었다. 충선왕이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힘의 근원을 잘라내겠다는 것이었다. 충렬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직접 원으로 건너가 공주의 이혼 및 재가를 청원했다.
충선왕으로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정치생명을 끝장내는데 앞장서고 있으니 말이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그는 대대적인 역공에 나섰고, 고려 조정은 충렬왕과 충선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어 일대 혼란에 빠진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과 인종의 킹메이커가 되면서 다시 복위하긴 했지만 부자간의 정쟁은 고려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무릇 누군가와 싸울 때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방의 터부를 건드리고, 상대방의 존재자체를 말살하려 들면 싸움은 진흙탕으로 변한다. 감정이 이성을 억누르게 되면서 극단적인 대결로 치닫는다. 만약 충선왕이 무비를 죽이지 않았다면, 충렬왕이 계국대장공주의 이혼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두 사람 모두 능력 있는 군주들이었으니 서로가 못마땅했을지언정 고려에 해가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출처] [충렬왕과 충선왕] 권력은 피보다 진하다… 부자 간 권력 다툼|작성자 몽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