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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경남 거제군(巨濟郡) 어민(漁民)의 소장(訴狀)과 청원서(請願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앞서 언급한 바가 있듯, 대한제국기 거제군 어민들의 여러 고충 중에, 정부 파견 관리들의 착복 피해에 따른 고충과 파견 관리들의 어업권 탈취 문제와 더불어, 관리들의 부패에 대해 끈질긴 저항을 드러낸 청원서(請願書)와 소장(訴狀) 2건을 소개하겠다. 당시 국운이 기우는 대한제국 황실이 재정을 늘리기 위해 민간 어장을 강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민관 갈등 사례로 보인다.
먼저 ①「1906년 6월 경남 거제군 어민(漁民) 파견 관리들의 횡포 시정 청원서(請願書)」는 1906년(광무 10년) 6월, 경남 거제군 어민들이 자신들의 생업 터전인 어장을 되찾기 위해 경리원(經理院)에 제출한 청원서와 경리원의 냉담한 거부 지령(답변)이다. 거제군 어민들의 사적 소유의 어장을 황실 기관인 궁내부(또는 내장원)에서 가져갔으나, 이후 다시 어민들에게 돌려주라는 황제의 칙령과 지시(완문)가 있었다. 그런데 파견 관리들이 이 지시를 어기고 어장을 돌려주지 않은 채,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어민들의 생업을 가로챘다. 그래서 거제 지역의 주요 어민 및 유력자 13명의 이름으로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경리원에서 어민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시끄럽게 굴지 말고 당장 물러가라”고 지령이 내려왔다. 어민들은 소유권을 박탈당했고, 중간 관리들의 수탈까지 겹치면서 생존권을 위협받았다.
다음으로 ②「1906년 6월 경남 거제군 어민(漁民) 어장 강탈 사기 피해 소장(訴狀)」은 1906년(광무 10년) 6월, 경남 거제군 어민들이 관리들의 수탈에 항의하며 궁내부(宮內府) 등 상부 기관에 제출한 소장(訴狀)으로,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이 재원 확보를 위해 민간 어장까지 억지로 편입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현지 관리들과 결탁한 수탈이 극심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다. 당시 거제도 어민들이 겪었던 어업권 탈취 문제와 관리들의 부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당시 국가 행정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백성들이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던 시대적 아픔이 담겨 있으며 소장(訴狀)의 명단에서 옥(玉)씨, 윤(尹)씨, 신(辛)씨, 원(元)씨 등 거제도의 주요 성씨들이 망라되어 있다는 것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거제도 전체 어민 공동체가 조직적으로 대응했음을 보여준다.
1) 「1906년 6월 경남 거제군 어민(漁民) 파견 관리들의 횡포 시정 청원서(請願書)」
이 문건은 1906년(광무 10년) 6월, 경상남도 거제군 어민들이 자신들의 생업 터전인 어장을 되찾기 위해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經理院)에 제출한 청원서와 그에 대한 경리원의 거부 지령(답변)이다. 당시 거제도 어민들이 겪었던 고통과 국가 기관의 냉담한 반응이 잘 드러나 있다.
(1) 어민들의 주장한 청원의 내용 : 거제군 어민들이 대대로 물려받아 사용하던 어장(민사어기, 民私漁基)을 황실 기관인 궁내부(또는 내장원)에서 가져갔으나, 이후 다시 어민들에게 돌려주라는 황제의 칙령과 지시(완문)가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 파견된 관리(파원)들이 이 지시를 어기고 어장을 돌려주지 않은 채,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어민들의 생업을 가로챘다. 이에 어민들이 호소한다. "우리 섬 사람들에게 어장은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관리들의 탐욕 때문에 한 군의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생겼다. 세금은 우리가 직접 국가에 낼 테니, 제발 황제와 궁내부의 원래 지시대로 어장을 돌려달라." 문서에 조석근, 신주일, 옥상신 등 거제 지역의 주요 어민 및 유력자 13명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2) 8월 9일 경리원의 답변(지령) : 어민들의 간절한 호소와는 달리, 중앙 기관인 경리원의 답변은 매우 고압적이고 부정적이다. "거제군 어장에는 원래부터 '백성 개인의 것(민사)'이라는 명목이 없다. 그런데도 어민들이 거짓으로 꾸며대며 억지 소송을 제기하니 매우 통탄스럽다." 처분하길, "당장 물러가고 다시는 이 일로 시끄럽게 굴지 마라. 만약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고 번거롭게 하면 엄히 처벌하겠다.“
(3) 역사적 배경과 의미 : 이 사료는 광무개혁 시기 황실이 재정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과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내장원 등을 통해 전국의 역둔토와 어장, 염전 등을 황실 소유로 편입(국유화)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어장을 운영하던 어민들은 소유권을 박탈당했고, 중간 관리들의 수탈까지 겹치면서 생존권을 위협받았다. 거제 어민들은 황제의 권위를 빌려 저항했으나, 실제 행정 기관인 경리원은 이를 '무고(거짓 고소)'로 치부하며 어민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이 재정을 늘리기 위해 민간 어장을 강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민관 갈등 사례로 보인다.
* 덧붙여 이번 「1906년 6월 거제 어민(漁民) 청원서(請願書)」는 발신자가 거제의 조석근(曺錫瑾), 신주일(辛周逸), 옥상신(玉相莘) 등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1906년 6월 경남 거제군 어민(漁民) 파견 관리들의 횡포 시정 청원서(請願書)」**
거제군 어민들의 청원서 및 경리원 지령. 광무 10년(1906년) 6월 일. 〈청원서〉 경상남도 거제군 어민들 올림.
삼가 호소합니다. 너무나 원통한 지경에 처하여 감히 백 가지 호소를 드립니다. 본 군(거제) 백성들의 사유 어장(民私漁基)에 대해서는 이미 궁내부로부터 황제의 명령(勅旨)을 받들어 "해당 군의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주라"는 지령과 훈령, 완문(증명서) 등의 근거가 이미 앞에 제출한 바와 같습니다.
지령 내용에 따르면 "마땅히 사실을 조사하여 조치할 일"이라고 하셨으나, 이미 황제의 명령을 받들었고 궁내부의 지령과 훈령까지 내려와 백성들에게 돌려주기로 한 사유 어장을 대체 어디서 다시 사실 조사를 한단 말입니까?
섬 전체 백성들의 생계 자산인 물건을 파견된 관리(派員) 개인의 배를 채우는 계책으로 삼아 삼켜버리는 것이 가당한 일입니까? 만백성이 자산으로 삼아 살아가는 생업을 빼앗는 것이 가당합니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러 온 군의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질 처지입니다. 또한 세금 납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해당 군에서 직접 세금을 거두어 올리는 것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계책입니다. 가장 존엄한 황제의 명령과 지극히 중대한 부처(궁내부)의 결정을 무시하고, 사리사욕에 눈먼 파견 관리들이 한 군 백성들의 살점을 뜯어내는 참혹하고 원통한 상황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에 이전의 청원서를 첨부하여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우러러 호소하오니, 부디 자세히 살펴주시고 외딴섬 백성들의 비참한 형편을 가엾게 여기어 흩어진 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경상도 관찰사와 창원 감리서에 엄중히 명령을 내려, 이 바닷가 구석의 힘없는 백성들이 원통함을 품지 않게 보살펴 주시기를 천만번 엎드려 간구합니다. 광무 10년 6월 일.
*명단 : 조석근, 신주일, 옥상신, 윤택근, 신석운, 옥선환, 윤영우, 박남기, 원석희, 김두영, 원세응, 옥영환, 윤영엽 등.
*경리원 경(卿) 각하 앞, 거제군 어장 백성 등이 본 군의 사유 어장을 돌려달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한 건에 대하여.
*[경리원 지령] 본 군의 어장에는 애초에 '백성의 사유(民私)'라는 명목이 없거늘, 망령되게 남의 이름을 빌려 핑계를 대고 오로지 속이고 호소하는 일에만 힘쓰니 지극히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즉시 물러가고 다시는 이 일로 번거롭게 떠들지 마라. 만약 다시 뉘우치지 않는다면, 이처럼 법을 어지럽히는 습관을 단단히 징벌할 것이다. 광무 10년 8월 9일.
[光武十年六月 日. 〈請願書〉 慶尙南道巨濟郡漁民等狀.
右訴求은 伏以, 極冤之地에 百訴敢陳이오니 以本郡民私漁條난 自宮內府로 奉承勅旨하시와 還出給該郡民人하라신 指令及訓令完文事蹟를 擧實於前呈이오즉, 指令內에 第當有査實措處 事이시오나 奉承勅旨하옵고 又承宮內府指訓完文시와 旣爲還出給該民人之民私漁基를 何處에 査實措處乎잇가? 一島生靈補産資業之物을 沒含於派員口腹之計가 可乎잇가? 萬民資業賴生이 可乎잇가? 事至此境에 一郡民人이 幾至渙散之境이온즉 且稅納를 言之올진 自該郡으로 自爲上納이 爲國安民之策이온즉 莫尊皇勅之下, 莫重府決之事를 挾雜派員의 壑慾之心을 一郡生靈漁肉之慘이 極爲冤抑하시와 緣由로 前呈을 粘連齊聲仰籲하오니, 萬加洞燭시와 前呈을 細細察焉옵시고 特念殘島生靈漁肉之慘情景허시여 渙散者安接之意로 嚴訓於本道觀察使及昌原監理署하시옵고 使此海隅殘氓으로 毋至含冤抱痛케 積善撫摩之處分를 千萬伏包홈. 光武十年六月 日. 後 曺錫瑾, 辛周逸, 玉相莘, 尹宅根, 辛錫雲, 玉宣煥, 尹永禹, 朴南基, 元錫禧, 金斗英, 元世應, 玉英煥, 尹永曄等. 經理院卿閣下.
巨濟郡漁基民等, 本郡漁基民私條, 還出給之意發訓事. 指令, 本郡漁基에 初無民私條之名目이거 妄生藉托고 專事誣訴가 極爲痛歎이라. 卽爲退去야 切勿以此煩聒이되 倘復不悛이면 此等挾襍之習을 斷當嚴懲 事. 光武十年八月九日]
2) 「1906년 6월 경남 거제군 어민(漁民) 어장 강탈 사기 피해 소장(訴狀)」
이 문서는 1906년(광무 10년) 6월, 경상남도 거제군 어민들이 관리들의 수탈에 항의하며 궁내부(宮內府) 등 상부 기관에 제출한 소장(訴狀)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덧붙이자면, 대한제국 말기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이 재원 확보를 위해 민간 어장까지 억지로 편입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현지 관리들과 결탁한 수탈이 극심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로써, 당시 거제도 어민들이 겪었던 어업권 탈취 문제와 관리들의 부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료다.
(1) 사건의 배경 : "민사조(民私條, 민간 소유 어장)를 돌려주라" 대한제국 정부(궁내부)는 원래 "공공의 어장(공조·관조)은 적절히 관리하되, 백성들이 사적으로 운영하던 어장(民私條)은 다시 민간에게 돌려주라"는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2) 관리와 대리인의 횡포 : 하지만 조사 파원(파견 관원) 정형기의 대리인인 이유형(李裕馨)이라는 인물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섬 주민들을 멸시하며 민간 어장을 강제로 빼앗고 사적으로 팔아넘겼다. 어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궁내부에서 "민간 어장을 돌려주라"는 엄중한 지시를 여러 번 내렸음에도, 이유형은 창원 감리서와 짜고 순검(경찰)을 동원해 오히려 어민들을 괴롭혔다.
(3) 이어 새로운 가해자 '김봉수'가 등장했다. 어민들이 끈질기게 호소하여 1906년 3월에 "영원히 생업에 종사하라"는 공식 문서(완문)를 받아내어 잠시 안도했으나 곧 김봉수(金鳳洙)라는 인물이 나타나 상황이 악화된다. 거제 어민들의 사적 어장과 해산물(미역 등) 채취권을 경리원(經理院, 왕실 재산 관리 기관)에 귀속시키겠다고 속였다.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어민들을 "국세 징수를 방해한다"는 죄목으로 몰아 창원 감리서와 경상남도 관찰부에 고발했고, 결국 어민들이 진주(晉府)로 끌려가 갇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4) 소장(訴狀)의 핵심 요구 : 어민들은 "황제의 명령과 궁내부의 결정이 내려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급 관리들이 이를 무시하고 백성을 핍박하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경상남도 관찰사와 창원 감리에게 엄중한 명령을 내려, 붙잡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더 이상 민간 어장을 침탈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결국 이 소장(訴狀)은 거제도 어민들이 법적 절차를 통해 권리를 되찾으려 했던 끈질긴 저항의 기록이다. 요약하건대 이 문건은 구한말 왕실 기관(궁내부, 경리원)의 이름을 팔아 현지 관리와 유력자들이 어민들의 생계 수단인 어장을 강탈하려 했던 사건이다. 당시 국가 행정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백성들이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던 시대적 아픔이 담겨 있다.
(5) 소장(訴狀)의 요점을 살펴보자. 거제인의 명단을 보면 옥(玉)씨, 윤(尹)씨, 신(辛)씨, 원(元)씨 등 거제도의 주요 성씨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거제도 전체 어민 공동체가 조직적으로 대응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시 왕실 재산을 총괄하던 경리원의 수장(經理院卿)에게 직접 호소한 것이다. 앞서 김봉수가 "경리원으로 이속되었다"고 사기를 쳤기 때문에, 진짜 경리원 책임자에게 사실 확인을 요청한 셈이다. 여기 지령을 보면 "사실을 조사해 조치하겠다"는 답변은 원칙적인 수준이지만, 어민들의 주장이 궁내부의 기존 결정과 부합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조사를 시작하겠다는 공식적인 약속이다.
* 덧붙여 「1906년 6월 경남 거제군 어민(漁民) 소장(訴狀)」은 발신자가 거제의 원석희(元錫禧), 신주일(辛周逸), 옥상화(玉相華)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1906년 6월 경남 거제군 어민(漁民) 어장 강탈 사기 피해 소장(訴狀)」**
광무 10년(1906년) 6월 일, 소장(경상남도 거제군 어민 소장).
이 소장을 올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엎드려 살피건대, 지난해 6월에 궁내부(宮內府)로부터 황제의 뜻을 받들어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 내용은 "연안 각 군의 어장 중 관청 소유(공조·관조)는 폐단을 바로잡아 공공으로 관리하되, 민간 소유(민사조)는 마땅히 민간에 돌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당 조사 파원(관원)인 정형기의 대리인 이유형(李裕馨)은 본래 남을 속이기로 유명한 자로, 섬 백성들을 멸시하고 민간 어장을 강제로 빼앗아 사적으로 몰래 팔아넘겼습니다.
이에 본 군의 백성들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궁내부에 직접 호소하였더니, 궁내부의 지시에 "민간 소유라는 문건과 예전 통영(統營)에서 돌려주었던 완문(공식 문서)이 분명히 있으니, 이것이 백성의 소유임은 명백하다. 진상품 외에는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어 원통함이 없게 하라"며 파원에게 엄중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토록 엄중한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리 파원(파견인)인 이유형은 창원 감리서와 결탁하여 순검(경찰)들을 대거 출동시켜 계속해서 어민들을 괴롭혔습니다. 군민들이 다시 궁내부에 호소하자 "민간 소유는 하나하나 조사해 돌려주고 강제로 뺏지 말라"는 지시가 거듭 내려졌습니다.
소위 파원이라는 자들이 자기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여 이토록 번거롭게 소송을 하게 만드니, 그 행태가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이에 엄히 조사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어 다시 지시를 내려, "각 포구에 엄명을 내려 진상품 외의 민간 어장은 즉시 돌려주고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하며, 해당 파원에게 알려 다시는 간섭하지 못하게 하라"고 창원 감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소위 파원이라는 자들은 나쁜 마음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진남(통영) 수비대에 청탁하여 민심을 어지럽히는 짓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 올해 봄에 다시 궁내부에 호소하였고, "영원히 이 결정을 준수하여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하라"는 완문(完文)을 지난 3월에 받아내었습니다. 이로써 저희 섬 백성들은 기뻐 춤추며 생업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김봉수(金鳳洙)라는 자가 암암리에 간사한 꾀를 내어, "본 군의 민간 어장과 해산물(미역 등) 채취권을 경리원(經理院, 왕실 재산 관리처)으로 이속시켰다"고 속이며 강제로 빼앗아 팔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관청에 호소한 백성들과 이향(吏鄕, 아전과 향임)들을 향해 "국세 징수를 방해한다"며 무고하였고, 창원 감리서에 부추겨 순검을 보내 잡아 가두게 했으며, 경상남도 관찰부에도 거짓 고발하여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멀리 떨어진 섬의 가난한 백성들이, 하물며 군수가 공석인 틈을 타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지금 진주(晉州)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황제의 지엄한 명령이 내려졌고 궁내부의 결정서 먹자국이 채 마르기도 전인데, 파원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휘두르고 도리를 뺏는 짓이 되풀이되니, 가여운 백성들이 장차 무엇을 믿고 법령을 따르겠습니까?
이러한 사연을 모아 소리 높여 호소하오니, 부디 먼 섬 백성들의 사정을 가엾게 여기시어 본도(경상남도) 관찰사와 감리서에 엄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 가련한 백성들이 호소할 곳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선처를 베풀어 주시길 천만번 엎드려 빌고 또 빕니다. 광무 10년(1906년) 6월 일.
*연명인(후단) : 원석희, 신주일, 옥상화, 윤택근, 신석운, 옥선환, 윤영우, 박남기, 조석근, 김두영, 원세응, 옥영환, 윤영엽 등. 경리원경(經理院卿) 각하 앞.
*거제군 민인(백성) 등이 올린 건 : "본 군의 어장 중 민간 소유(민사조)는 이미 궁내부에서 처결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파원(관원)의 이름을 내세워 억지로 빼앗아 팔려 한다"는 일에 대하여.
*지령(指令) : 해당 사안은 마땅히 사실을 조사하여 적절히 조치할 것이다. 광무 10년(1906년) 7월 27일.
[光武十年六月 日. 訴狀. 慶尙南道巨濟郡漁民訴狀.
右訴求은 伏以, 昨年六月日에 自宮內府로 奉承旨意시와 發訓하옵시기을 沿海各郡漁基中, 公條官條 救弊與付公間, 量宜施措고 民私條난 還出給民間이옵난듸 該調査派員鄭亨基代人昌原馬港居李裕馨, 本以有名挾雜之類라 蔑視島民고 壓奪民條야 私行帖賣故, 本郡民人等, 裹足仰訴于宮內府즉, 指令內에 私條文蹟與前統營還給完文案件自在, 則其爲民條也明矣。進上條外에 依民願一一還給하야 俾無呼冤事로 題飭派員, 若是嚴重커늘 同代派員李裕馨이 符同於昌原監理署하야 多發巡檢, 而一向侵漁故로 郡民等이 又訴於宮〈內〉府즉 民私條난 一一調査出給하야 俾無勒奪之意로 業經訓飭이 不啻申複이거늘 所謂派員輩가 專事肥己야 致煩訴之弊이 究厥所習에 寧不痛歎이리요? 不容不嚴査歸正이기 另玆發訓이 到卽嚴飭各浦하야 進上條外에 民私條난 這這推給고 毋或橫侵케며 亦卽知照該派員하야 更無敢干涉事, 訓飭於昌原監理이오나 所謂派員이 不改雜心하고 又爲囑付於鎭南隊中야 擾亂民情이 無所不到키로 今春에 又訴宮〈內〉府즉 永遵無替고 以爲安業하라고 今三月分에 成給完文故, 殘島民情, 蹈舞安業矣러니, 不意金鳳洙云者가 暗生奸計야 本郡民私漁條及海毛藿巖을 移屬於經理院이다고 勒欲奪賣하야 吏鄕與訴求宮府之民을 構誣以國稅沮戲라고 嗾囑於昌原監理署而發巡推捉며 捏告於本道觀察府而發傭推捉오니, 以若遐島殘民으로 況値空官之際야 不敢拒逆와 方今被捉於晉府이오니 莫尊皇勅之下에 已經宮府處決之, 墨蹟未乾에 派員名色, 勒權奪理가 荐復恣肆즉 哀此殘氓이 將安所恃以法令이오며 緣由齊聲仰籲허오니, 特念遐遠殘島之民情시와 另行嚴訓於本道觀察及監理署허시여 俾此含生之類로 毋歸無告之地케, 積善處分하시물 千萬伏乞홈. 光武十年六月 日. 後 元錫禧, 辛周逸, 玉相華, 尹宅根, 辛錫雲, 玉宣煥, 尹永禹, 朴南基, 曺錫瑾, 金斗英, 元世應, 玉英煥, 尹永曄等. 經理院卿閣下. 巨濟郡民人等, 本郡漁基中民私條, 已經宮內府處決之地, 派員名色, 勒欲奪賣事. 指令, 第當有査實措處 事. 光武十年七月廿七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