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처님 하면.. 대부분의 불상이 그러하듯 신체 간장한 중년 남자를 떠올린다.
예수님 하면 서른 살쯤 청년을 떠올리고..
그런데 부처님은 세상에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내고, 결혼하고 출가하여 부처님이 되시고 법을 전하다 80세에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역시 태어나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기와 서른세 살로 돌아가셨다. 만일 80세까지 살아더라면 노인 모습도 전하겠지.
석가모니 부처님 모습을 말하라고 하면 아기로 태어나 노인으로 돌아가시는 저 과정의 모습을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예수 또한 마찬가지고..
물론 석가의 순간적인 모습이 석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제 모습과 오늘 그리고 내일 모습이 아주 많이 다른 것도 아니니..
그러나 분명한 것을 원한다면 순간적이라도 같은 모습은 결코 없다.
석가나 예수는 한 찰라지간이라도 같은 모습으로 있었던 적이 없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해가는 것을 무상이라 한다. 그에 반해
찰나지간이라도 멈춤을 인정하는 것을 존재라 하고..
우리는 많은 사진을 찍고 담는다. 주변에 있는 꽃들을.. 여행하다 만나는 재미있는 것들을..
사진에는 어느 순간에 있었던 모습과 벌어진 사건을 담고 있다.
그런 사진은 바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사진 속에 있는 그 모습이나 사건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태평양이나 대서양 바닷물은 수십 억 년 거기에 있었고 있을 것이지만 한 번도 같은 모습은 없다.
해나 달, 별 역시 그렇다.
그런데 어찌 한 순간 또는 찰라지간에 있던 모습을 석가모니 또는 예수라고 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석가나 예수로 아는가?.
자연은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인 적이 없으나..
인간은 그것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이해하려 했으니..
인류 문화의 발전은 바로 분석과 종합의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상하지만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긴다고 하듯..
일체에 대한 분석과 종합은 문화 번영이라는 선물을 주었으나 그와 함께 번뇌라는 스트레스를 함께 주었다,
본래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는 무상인 것을 마치 사진처럼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하여 취하려 하거나 버리려 하니..
즐거움도 있지만 고통이 따른다.
서양 철학의 시작은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다. 우리는 오직 있는 것만 말할 수 있다' 하여
무상하게 변하며 흘러가고 있는 것을 마치 멈추고 있는 순간인 사진처럼 존재라 하여 존재 철학으로 시작되었는데..
무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서양 철학은 구름을 잡으려는 학문처럼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있다 없다가 아니라 중도[유무중도]'라 하신 것은
당시 인도 역시 서양 철학처럼 무상한 것을 존재로 인정하며 그것이 전부로 착각하고 시작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반복하지만 괴로움은 물론 즐거움 역시 그런 무상을 망각하고 마치 머물고 있는 존재로 여길 때 생긴다.
존재라고 할 때 생기는 게 분별이다.
분별될 수 있는 근거는 어느 시간 동안 변하지 않고 있다는 존재를 인정할 때이다.
만일 있는 그대로 무상을 인정하고 있으면.. 괴로움은 머물 곳이 없다.
'신심명'의 첫 번째 구인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을 가볍게 풀이하면..
이것과 저것으로, 좋다 또는 싫다고 분별하지 않으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 하여 어떤 괴로움도 항상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참 무상을 본다면 어떤 괴로움도 생기거나 머물지 않는다.
일체는 존재가 아닌 무상인데 어떻게 사람들은 그것을 존재라고 인식하는 걸까?.
"일체는 12처(處)인
안과 색(眼色), 이와 성(耳聲), 비와 향(鼻香), 설과 미(舌味), 신과 촉(身觸), 의와 법(意法)]에 의해 생기니,
이것을 일체라고 한다. / <잡.319. 일체경>
만일 일체가 존재라면.. 일체는 색, 성, 향, 미, 촉의 모습과 성질을 갖고 있는 법이 된다.
그러나 일체는 존재가 아니면서 존재처럼 드러나니 그 이유는
안과 색이 만나 색이라는 존재로,
이와 성이 만나 소리라는 존재로,
비와 향이 만나 향기라는 존재로,
설과 미가 만나 맛이라는 존재로,
신과 촉이 만나 촉이라는 존재로,
의와 법이 만나 법이라는 존재로 우리에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식이 생기므로
우리는 주체와 관계없이 외부에 색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촉이 되는 법[존재]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부처님 당시 선정[사마타]은
존재로 알려지는 일체를 존재가 아닌 주체와 대상이 만나 생긴 법임을 분명히 관찰하기 위해
마음을 순일하게 만드는 작업으로..
마음이 순일한 상태가 되면,
마음 속에 생긴 안과 색이 만나 색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는 위빠사나를 행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불자에게 삼학인 계학, 정학, 혜학이란..
계학.. 항상 선행을 가까이하며 악행을 멀리하는 계와 율을 지킨다. 왜냐면
탐욕은 본인은 물로 상대를 해쳐 괴로움을 일으키는 흉기와 같기 때문이다.
정학.. 선정[사마타]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어 행복을 누릴 수 있지만, 본래 목적은
바른 관찰[위빠사나]을 하려는 것이다.
혜학.. 부처님 가르침인 12처, 18계, 5온을 관찰하여 [위빠사나] 구경 목표인 무상과 무아를 깨치고 모든 괴로움을 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경>을 보면..
제자가 선정에 들어 위빠사나를 행하다 생긴 의문이 있으면 부처님께 다가와 그 의문을 묻고 답을 구하는 장면이 곳곳에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완벽하게 보이는 불교가 존재를 바탕으로 하는 힌두교나 이슬람교에 의해 인도에서 기운을 잃었을까?.
'12처라 쓰고 6근6경이라 읽는다'는 글을 쓰며 보니..
날아오는 화살이 보이면 일단 피하고 보듯..
나를 죽이고 살리는 화살을 존재라고 하지 않으면 일상 삶에서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괴로움을 멸한 세상인 출세간을 부정하지 않지만 우리 현실은 존재를 바탕으로 하는 세간이다.
그러기에 세간을 무대로 하는 대승불교가 방편으로 나오는데..
인도인에게 대승불교는 힌두교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니.. 둘 가운데 그들은 힌두교를 선택한다.
진리가 사람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선택한다.
방편이 진리인 까닭은 방편은 사람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힌두교가 불교를 몰아내듯 조선조가 불교를 박해한 것은 '새 술은 새 부대에'라 하듯 정치적 목적 때문이지만..
고려 중기 이후 불교의 타락은 분명했다. 그랬기에 조선조를 세운 새로운 세력은 불교를 타깃으로 삼을 수 있었다.
21세기 민주제는 종교의 자유를 중시한다.
민주제 핵심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이지만 전제는 공평하게 대접받을 만한 기본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본을 교육제도를 통해 익히도록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제대로 실천된다면
불교의 미래는 아주 밝다.
불교의 시작은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이고,
중간은 본인의 노력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것이며,
끝은 무아로 돌아간다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