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고유명사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예능프로그램 원로배우들의 이름이 알쏭달쏭하다. 습작을, 할 때도 익히 알던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끙끙댄다. 노래는 아는데 제목을 몰라 노래 신청에 애를 먹는다. 기억력의 노화현상, 피할 수 없는 늘그막 삶의 고충이다.
암보다도 더 무섭고 피하고 싶은 질병이 침해라고 한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치매라는 단어가 생소했었고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복싱의 영웅 무하마드 알리와 레이건 대통령이 알츠하이머로 힘들어, 할 때 치매의 폐해 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옛날 시골에서 횡설수설하는 노인을 보고 ‘노망’들었나 했는데 그것이 바로 치매가 아니었나 싶다.
건망증과 치매의 구분은 어떻게 하는 걸까. 핸드폰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을 못하면 건망증이고 그것을 찾고도 뭐하는 것인지 모르면 치매라고 한다. 얼마 전에 치매 테스트를 받은 적이 있다. 고유명사 세 개를 들려주고 조금 있다가 그것이 무엇이었냐고 다시 묻는다. 치매는 가까운 과거를 잘못 기억하기 때문이다. 100에서 7을 빼면 몇이냐고 묻는다. 처음에는 93이라고 쉽게 답하지만 계속해서 7을 빼라고 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옆자리에 앉은 어떤 할머니는 5를 빼라고 하면 좋을 건데 왜 자꾸 7을 빼라고 하냐고 투덜투덜댄다. 한참을 웃었다. 독서와 글쓰기를 하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열심이다.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황혼의 몸부림이다.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하신 시인이 인문학 동아리에 신입으로 오셨다. 건망증이 심하다며 명찰 목걸이를 제안하여 오랜만에 큼지막한 명찰 목걸이를 목에 걸어본다. 좀처럼 기억되지 않던 이름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명찰 목걸이가 하나 둘 자취를 감춰 버린다. 왜 그랬을까. 목에 거는 것이 불편해서일까. 이름이 촌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목에 걸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워서일까. 알 수가 없다. 나 혼자 목에 걸기도 뭣하여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이제는 마음속에 품고 다닌다. 내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감독관을 모시듯이.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족적이며 인품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후세인들에게 좋은 감정으로 회자되는 이름은 세상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연인들끼리 부르는 애칭은 가슴 설레는 사랑이며 연식이 오래된 사람에게는 경륜이 묻어나는 인격이다. 그 사람 고유의 삶이 고스란히 이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하여 이름이 차지하는 삶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이 중하고 고유하다.
이름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 천차만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어진 영역에서 자기의 이름값을 올리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방탄소년단과 손흥민 같은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보배로운 이름이다. 국격을 높여주는 애국자이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료봉사에 헌신하다 49세의 일기로 선종하신(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님은 우리 모두가 승상해야 할 성자이시다. 남수단의 슈바이처, 거룩하신 신부님의 삶을 어찌 이름값으로 호가할 수 있으랴.
나라의 얼과 운명을 헌신짝처럼 팔아넘긴 매국노의 증손자가 조국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타국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 아파한 적이 있다. 매국노라는 조상의 이름값을 호되게 치려야 하는 그 역사적 불행의 의미를 마음속 깊이 새긴다. 이름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삶의 그림자. 이승에서 저승까지 따라다니는 생명의 발자취이기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성심을 쏟아야 할 삶의 가치이리라.
좋은 이름으로 남고 싶다. 후손들에게 적어도 손가락질받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었어.’라고 기억되는 이름이 고 싶다. 하여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속에 명찰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스스로를 돼새김 한다. ‘그건 아니야, 네가 잘 못 한 것이야.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부모님이 지어주시고 평생을 함께하는 내 이름 석 자, 난 결단코 너를 욕되게 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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