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벌써 오래전부터 학생 수를 채우지 못해 폐교가 되는 초등학교가 하나 둘씩 늘고 있다. 시골에 있는 작은 학교일수록 살아남기 힘들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눈물로 마지막 졸업식을 하는 모습도 종종 뉴스를 통해 볼 정도로, 흔한 일이 됐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교는 학생들이 참 많았다. 어릴 때부터 키가 컸던 나는 초등학생 시절 내내 60번에 가까운 번호를 달았다.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아마 꽤 신기해할 것이다. 한 반에 60명이 수업을 듣는게 가능하냐고. 더욱이 졸업할 때 개근상을 부모님 품에 안겨드리는게 큰 효도이던 시절이라, 결석자 한명 없던 교실은 매일 학생들로 북적댔다.
여기서 눈치챘겠지만 난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세대다. 1996년 정부는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라고 판단하여 일괄적으로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국민학교는 아주 먼 옛날로 사라져 버렸다.
폐교를 미술관으로
그리운 레트로 감성을 느끼다
우리나라 또한 인구절벽이 심해지며 학생수는 매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도시에 있는 초등학교마저 학생 수가 절반으로 줄었고, 사정이 더욱 어려운 시골 학교는 문을 닫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나마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시골학교는 미술관이나 게스트하우스, 체험장 등으로 재탄생됐지만 여전히 폐교는 계속 생겨나고 있다.
당진에 위치한 아미미술관도 그 중 하나다.
폐교를 개조해 만든 당진 아미미술관
이 종이 울리면 어디선가 팅커벨 요정이 나타날것같다
아미미술관은 1993년 (구)유동초등학교를 임대해 만든 생태 미술관이다. 단순히 미술품을 전시하는 것에서 나아가 지역 건축, 문화, 생활상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개방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곳은 문화 공간이자 지역 상생 공간이다.
무엇보다 아미미술관의 가장 큰 매력은 동화를 연상케하는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있다. 야생화와 푸른 숲에 둘러싸인 아담한 단층건물은 평화롭고 따뜻하다. 건물을 감싸는 담쟁이 덩굴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왠지 학교 어디선가 팅커벨 같은 요정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요정의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박기호 작가, 구현숙 설치 미술가는 당진시 순성면에 폐교된 농촌학교를 근사한 미술관으로 조성했다. 예술가들의 손길로 운동장은 야외전시장이 됐고 교실은 국립갤러리 못지 않은 멋진 전시공간으로 재 탄생돼다. 누군가에게는 풋풋한 어린시절의 추억 속 공간이 지금은 또 누군가에게 설레임과 행복을 주는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아미'라는 이름이 독특한데, 산의 능선이 여인의 아름다운 눈썹을 닮아 이름 지어진 아미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그대로 미술관 이름이 됐다. 또 아미(ami)는 친구를 뜻한다. 친구처럼 가깝고 친근한 미술관이라는 의미도 있다.
담쟁이 넝굴 곳곳에서 예술적 감성이 느껴진다
곳곳에 숨은 보물을 찾다보면 어느새 시간도 훌쩍
시골 초등학교 답게 겨우 20명 남짓 들어갈 작은 교실들이 4~5개가 있다. 이 교실이 바로 미술 전시장이다. 작가의 예술 세계가 표현된 공간이자, 여행자들을 연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교실 한켠에 투박한 나무 의자와 책상이 보였다. 요즘은 초등학교에도 편리성이 강조된 고급 소재 책상을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짙은 갈색의 나무 책상이 전부였다.
국민학교 세대에게는 국민학교만의 아날로그 감성이 남아있다. 한여름 선풍기도 없는 좁은 교실을 가득 채웠던 아이들의 짙은 땀냄새,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우당탕당 마루바닥을 뛰어다니던 발소리. 수업이 끝나면 일렬로 줄을 지어 왁스를 걸레에 묻혀 청소하던 모습.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은 이렇게 또 다른 공간에서 되살아나고 만다.
'그때 그 시절이 참 좋았구나'
참 많이 웃었던 시절이었음을.
국민학교 세대가 아니라해도 특별하고 예술적인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에게도 아미미술관은 최적의 놀이공간이다. 미술관 어디를 배경으로 찍어도 근사한 예술 작품의 오브제가 되는 마술을 경험한다.
복도는 전시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시실에서 마주한 조각상. 마치 인물에서 날개가 솟아나는듯하다
그리운 나무 책상과 의자
그리운 그때 그시절
미술관 앞에는 이곳이 원래 초등학교 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넓직한 운동장이 있다. 사실 넓은 운동장은 아니다. 하지만 어릴적에는 왜 그렇게 운동장이 커보였을까.
운동장 한켠에는 파란색 페인트를 칠한 산뜻한 카페도 있지만 그외 공간은 거의 옛날 그대로 모습인듯하다. 운동장 앞에는 교장선생님이 매주 조회 때마다 훈화말씀을 하던 조회대까지 남아있다.
단체주의가 중요했던 그때는 매주 한번씩 전 학생 조회가 있었다. 지금은 교실마다 설치된 TV로 시청각 조회를 한다는데, 그때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 학생이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에 모여야 했다.
그때마다 교장선생님은 장황한 훈화말씀을 했고(어떻게 그렇게 매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우리는 일렬로 줄을 서서 열심히 말씀을 들었다. 장시간 서있다 보니 간혹 쓰러지는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초등학교 졸업 할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던 국민학교 시절 의식이었던 셈이다.
'아, 너무 감상에 젖었나'
하지만 미술관을 벗어나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돌아오지 않을 그리운 나의 국민학교 시절이여!
초등학교 운동장이 그대로 까페와 야외전시장이 됐다
운동장 한켠에 있는 멋진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