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앤 3】
크롬웰은 헨리한테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라고 제안한 사람들 중 가장 중심인물로 의회에 상고금지법과 국왕지상법
(국왕수장령)등 몇 가지 조례를 제출한다.
1530년 헨리8세의 혼인 무효 요청 편지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던 토마스 모어는 국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이라는 국왕지상법의 서약을 강요당하자, 1532년 대법관자리를 사임하고 크롬웰은 수석장관이 되었다.
토마스 모어의 대법관직 사임은 크롬웰과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파들의 승리를 의미한다
1534년 모어는 의회에서 제정된 왕위계승법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명령을 받아 앤을 영국의 합법적인 왕비로 인정하라는 의회의 요구는 받아들인다.
그러나 교황권을 부정하는 국왕지상법의 서약을 거부하여 반역죄로 1535년 사형을 당한다.
1532년 헨리와 앤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고 앤은 곧바로 임신한다.
왕실 관습에 따라 이들은 1533년 1월 25일 다시 한 번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그 후 얼마 안있어 의회는 상소금지법(또는 상고금지법)을 공표하여 교황과 영국의 관계는 결정적인 단계를 맞는다.
이 법은 유언,결혼,이혼소송 등이 국왕사법관할권 내에서 처리될 것을 명령하고 교황좌나 외국법정의 소환 또는 그에 대한 상소를 금지하며 국왕 이혼문제를 왕국 내에서 처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이 법에는 국왕에 의한 성속의 일원적 지배,국가통일이 명시되었으며 영국이 주권국가라는 것을 선언해서 외국주권자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헨리는1533년 4월 9일 캐서린은 왕비라는 칭호를 박탈하였으며 캔터베리의 새 추기경 크랜머는 아서와 캐서린은
첫 날밤을 치뤘으므로 헨리에 대한 캐서린의 결혼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왕비의 타이틀을 공식적으로 박탈하며, 1533년 5월 23일,헨리와 앤의 결혼은 정당하다고 선언한다
그 해 6월 1일에 앤은 영국의 왕비로 책봉된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8세와 크렌머 대주교를 파문에 처함과 동시에 대주교의 혼인 무효 판결은 타당하지 않을 뿐더러 앤과의 결혼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무효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교황대사를 잉글랜드에서 철수 시킴에 따라 로마와 잉글랜드의 외교관계는 단절된다.
1533년 앤은 출산을 준비하면서 왕자일 것으로 예상하고 에드워드나 헨리라는 남자 이름까지 준비해 놓았으나, 9월 7일 앤은 예상보다 일찍 여아를 출산한다.
앤은 헨리8세의 모후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후일 영국의 황금기를 여는 엘리자베스1세가 된다.
의회는 1533년 계승법을 제정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의 합법적인 왕비는
앤 불린이라고 확정하였는데 그에 따라 캐서린의 딸 메리는 서출로 신분이 격하되어 왕위 계승 순서에서 엘리자베스 다음이 되었다.
메리가 서자로 취급되자 로마교황 및 국내외 메리의 지지자들로부터 격렬한 적의와 반감을 사게 된다.
특히 이 법안에는 헨리와 앤의 결혼을 무효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역죄로 다스려 사형으로 처벌받을 수 있게 되었다.
크롬웰은 1534년 국왕에 의해 지명된 사람만이 주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 성직임명법과 국왕지상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고, 위 법 조항을 거부하는 자는 1534년 반역법에 따라 왕에 대한 대역죄로 처벌하도록 의회가 승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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