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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송구영신 예배의 뵈니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인사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예배드려본 적이 없어서 이 시간 예배는 항상 이렇게 가라앉아요.
저도 목소리도 가라앉고 여러분의 표정도 가라앉고
성도들 중에 특히 청년들이 제 얼굴이 무섭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지난주 한 형제가 저를 계속 이렇게 쳐다보는 거예요. 그 왜 자꾸 이렇게 쳐다보냐 그랬더니 목사님 얼굴이 안 무서운데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제 얼굴이 이렇게 실제로 무서울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라서 그래요.
목사님 뭐 맨날 고민이 많으세요?
걱정거리가 많으세요?
왜 이렇게 인상을 쓰고 다녀요?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자주 듣는 이야기는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좀 저한테 억울한 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저희가 5남매인데 5남매 얼굴이 다 심각해요. 이 말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심각하게 태어났어요. 저는 어렸을 때도 얼굴에 이마에 주름이 있었고 항상 인상을 신는 듯한 얼굴로 사진에 찍혔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아내도 항상 제 얼굴을 지적해요. 제가 좀 완벽한 남편이라서 딴 거는 잘 지적을 안 받는데 얼굴을 좀 지적을 많이 받아요.
제발 좀 인상 쓰지 마라고 당신이 가만히 있을 때 들으면 막 화난 사람 같다고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생각했어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데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저희 집에는 뭐 크게 기쁜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얼굴이 펼 일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그냥 그렇게 여기고 살았어요. 이제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가 이제 다가오잖아요. 제 마음에 다른 생각이 드는 거예요.
혹 이것도 내 인생의 과제는 아닐까 그러니까 제가 해결해야 될 과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예전에는 당연한 얼굴이니까 나는 항상 인상을 썼고 그리고 이상하게 좀 인상 쓰는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둠에 있는 분들이 저를 되게 좋아했어요. 잘 놀고 저는 이렇게 술담배를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다 끊었기 때문에 절대 그러한 적도 없어요. 신학교 다닐 때도 열심히 친구들 때문에 그런 데를 다니긴 가기는 가도 묻고 이렇게 피우고 한 적은 전혀 없어요.
근데 어떻든 제 인생 때문에 그런지 그런 분들이 저랑 잘 어울리고 또 잘 놀고 그래요. 그래서 저는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난주에 그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또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것도 내가 과제가 아닐까 아니 나처럼 태어난 대로 살면 다 사람들이 엉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환경이 주어진 대로 살면 다 엉망이지 않을까요? 이것도 그냥 내가 쉽게 묻어버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인생의 한 과제일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좀 짧게 말하면 숙제를 하는 것과도 같아요. 그러니까 나이가 든다는 것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성장 과정에 요구되는 숙제를 잘 마쳤다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러니까 숙제를 잘 마쳐야 좋은 어른이 돼요.
여러분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숙제를 안 해 가면 선생님이 우리를 혼내거나 또 회초리로 때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거는 학생으로서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인 거죠. 학생은 숙제를 잘 하는 게 학생의 태도인 거죠. 근데 학생이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선생님에게 혼을 나거나 또 회초리를 맞아야 될 일이었던 거죠.
그 옛날에 지금은 그러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어른이 됐다는 것은 인생의 과제를 숙제를 잘 마쳤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엄마 아빠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으면 자라서 대인관계에 또 이렇게 자존감에 엄청난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부모와의 애착 관계라는 성장 과정의 숙제를 잘 마쳐야 그러니까 좋고 건강한 어른이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애착관계는 주로 1 2세 때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애착 관계예요. 이때 애착 관계가 잘 형성돼야 안정감이나 신뢰감이나 자존감이나 이런 좋은 성장 과정에 반드시 우리가 이루어야 될 과제들을 잘 이렇게 하게 되는 거죠.
근데 우리가 이렇듯 1세 2세 때 또 7세 이하 때 또 아니면 13세 이하 때 사춘기 때 청년 때 우리가 잘 갖춰야 될 해야 될 숙제들을 잘 마치지 못하면 좋은 어른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그러니까 숙제를 한다는 느낌으로 살아야 되는 거죠. 우리 숙제 되게 싫어하잖아요. 근데 수시를 싫어해도 사람들이 해요. 왜냐하면 그렇게 인식이 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숙제하듯이 좀 살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잘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어서 숙제라고 하면 사람들이 하려고 의식적으로 하거든요.
무의식적으로 그래서 좋은 어른이 되고 또 좋은 성도가 되고 또 좋은 부모가 되려면 하루하루를 숙제하듯이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루의 숙제를 끝내지 못하고 한 달의 숙제를 끝내지 못하고 한 해의 숙제를 끝내지 못하면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이 우리 인생에 자꾸 쌓이게 돼요. 그러니까 해결할 과제가 많은 인생이 결국 문제 많은 인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해결할 과제를 다 해결한 인생은 문제가 없는 인생이 되는 거고 해결할 과제를 다 마치지 못한 인생은 문제가 많은 인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러분이 제가 앞으로 인생을 사는 한 태도 중에 하나가 숙제하듯이 좀 살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우리가 좋은 목사가 되기도 하고 좋은 성도가 되고 좋은 부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해결해야 될 문제가 많이 쌓이게 되면 인생은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성장과 성숙의 많은 방해를 받아요. 여러분 곡식이 자라는데 풀이 많으면 성장에 엄청난 방해를 받아요. 그러니까 풀을 적당한 때에 잘 뽑아줘야 곡식이 잘 자라듯 인생도 인생에 주어진 각 시기에 맞는 과제들을 잘 해결해야 인생이 건강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착각 중에 하나가 어떤 직위가 어떤 직책이 성숙을 의미한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어떤 거냐 하면 예를 든다면 사람들은 목사라는 호칭을 성숙의 지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더 좀 더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목사가 되면 인격적으로 다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근데 아니에요. 호칭은 성숙의 지표가 아니에요. 그냥 직위에 따른 명칭일 뿐인 거지 성숙의 지표가 아닌 거죠. 목사도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자기 인생의 숙제를 잘 마쳐야 좋은 목사가 되는 거죠.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호칭도 성숙의 지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엄마 아빠라는 이 호칭을 성숙의 지표라 생각해요. 그래서 엄마면 아빠면 좋은 사람들 과제를 잘 마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없잖아 있어요.
그런데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과제를 잘 마쳐야 돼요. 부모로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과제를 잘 마쳐야 좋은 부모가 되는데 그냥 아버지와 어머니란 호칭을 달았다고 해서 좋은 어머니와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다른 호칭도 마찬가지예요. 교사 사장 회장 보통 사람들은 이런 단어를 들으면 훌륭한 사람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냥 직위인 거죠. 직위 제가 가끔 아무래도 여러분도 그렇지만 저도 직위가 높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잖아요.
군에 있을 때도 제가 이제 군목이었으니까 또 제가 모셨던 분들이 대부분 지휘관들이 별들이었고 또 부목사일 때도 이제 큰 교회에 있었으니까 어떻든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목사님을 또 모셨고 또 성도들 중에도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분들이 큰 회사 사장도 있으니까 만날 기회가 있어요.
그런데 만나보면 정말 깰 때가 있어요. 요즘 말로 사장이 저 정도밖에 이렇게 생각들 때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호칭은 성숙의 지표가 아닌 거죠. 좋은 사장 사장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좋은 사장은 좋은 사장이 되기 위한 숙제를 잘 마친 사람이 좋은 사장이 되는 거죠.
여러분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장로나 집사나 권사라는 호칭도 코칭뿐이지 성숙의 지표는 아니에요. 그럼 좋은 장로나 권사나 안수 집사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앙의 과제를 잘 마쳐야죠. 신앙의 숙제를 잘 마친 사람이 좋은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또 집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는 원래는 교회에서 목사든 안수집사든 뭐 집사든 이 호칭들이 성숙의 지표가 돼야 정상이에요.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집사를 뽑을 때 또 장로들을 뽑을 때 이렇게 기준들이 있잖아요. 그 기준을 보면 원래 이런 호칭들은 성숙의 지표가 맞았어요.
그럼 왜 지금은 이 오칭들이 성숙의 지표가 아닐까요? 그거는 우리가 성도로서 신앙인으로서 과제를 잘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인 거죠.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자기 삶에 주어지는 믿음의 과제들을 잘 통과했어야 되는데 숙제를 못한 거예요. 좋은 장로님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자기 인생에 주는 과제들을 잘 마쳐야 되는데 숙제를 안 한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성숙의 지표가 못 되고 그냥 단지 호칭으로 끝나게 된 겁니다. 여러분과 저는 여전히 숙제가 많은 인생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로서 좋은 목사나 성도가 되기 위해서 가져야 될 숙제들을 잘 해야 되고 또 가정적으로 좋은 부모나 또 좋은 자녀가 되기 위해서도 숙제를 해야 돼요.
여러분 가정은 부모만 숙제를 잘한다고 해서 좋은 가정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자녀들도 숙제를 잘해야 돼요. 좋은 가정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좋은 자녀가 되기 위해서도 숙제를 잘 마쳐야 좋은 자녀가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인생이나 또 신앙생활을 살면서 자기 앞에 있는 이 문제들을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냥 가볍게 여기는 거죠. 어겨도 별 마음에 부담감도 안 갖고 성경이 말하는 어떤 영적인 목표들에 대해서도 별로 이렇게 욕심도 없이 그냥 지나가요. 이게 내 인생 내 신앙생활의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용서라는 큰 과제를 못 마친 사람들이 많아요. 용서도 우리 인생이 마쳐야 될 과제 중에 해결해야 될 과제 중에 숙제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경우는 내가 용서해야 하는 일을 제공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타인이나 제3자가 용서를 해야 하는 일에 제공자일 수도 있어요.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 상처가 만들어졌든 간에 용서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상처 없이 상처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어요. 누구나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근데 이 상처를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상처 입은 채로 버려두는 거죠. 나도 버려두고 상대방도 버려두고 과제를 다 수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는 거죠.
교회도 충돌이 일어나고 성도들의 삶에도 충돌이 일어나고 그러니까 용서라는 과제를 잘 한 사람들, 숙제를 잘한 사람들이 좋은 부모 또 좋은 어른, 좋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일방적으로 받지만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지 상처 줬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여러분 그 어떤 종류의 상처든 일방적인 것은 없습니다. 다 주고받으며 살아요. 상처가 만드는 과제를 해결해야 우리가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 부모가 나에게 준 상처를 를 해결해야 이 과제를 잘 풀어내야 내가 건강한 어른이 될 수 있고, 내가 세상으로 받은 상처도 내가 이 과제를 잘 해결해야 좋은 사회인이 되는 거예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묻어둬 버리는 거죠. 상처는 묻어지지 않습니다. 마치 어떤 거냐 하면 뾰족뾰족 난 가시와 같아요.
이 가시는 묻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묻고 탁탁탁 두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져요? 손에 다 박혀요. 상처는 묻는다고 해서 상처가 안 되는 게 아니에요. 묻어도 이렇게 두드리면 내 손에 가시가 박히는 것처럼 상처가 돼요.
상처를 해결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되나요? 여러분과 제가 상처라는 과제를 잘 풀어야 하는 거죠. 신앙적인 과제와 숙제도 있어요. 어떤 성도들은 술과 담배라는 과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이게 평생의 과제가 된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한 가지 숙제가 평생의 숙제가 되면 이게 인생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우리가 학창시절 생각해 보십시다. 야 구구단 2단을 외워와 그랬는데 우리가 이단을 못 외웠어요. 3학년 때도 2단을 외워 4학년 때도 2단을 외워 5학년 때도 2단을 외워 고등학생이 되어도 2단을 외워 대학생이 돼도 이단을 외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심각해지죠. 그렇듯이 인생은 신앙적인 과제도 우리가 숙제를 잘 해결해야 되는 거예요.
지난주 한 성도분이 제발 남편분 술 좀 마시지 말게 해달라고 제 앞에도 그러고 주변의 성도들이 다 듣는데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저는 오늘 그분이 오면 이 예화를 안 들고 안 오면 들려고 이렇게 해놨는데 안 오셔서 하여튼 이 야를 제가 편하게 설교하고 있어요.
여러분 술 담배가 평생의 과제면 이게 얼마나 슬퍼요 그 구단 2단 평생 못 외운 거랑 똑같은 거예요. 이게 신앙적으로는 따지면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운전면허 여러분 따로 가셔가지고 평생 통과하지 못하고 평생 시험만 보면 이게 미칠 지경이 아닌가요?
신앙적인 과제도 해결하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거죠. 문제는 신앙적인 과제는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가 그 과제에 구속을 당한다는 거예요. 종 노릇하게 되는 거죠. 처음에는 내가 술과 담배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엔 술과 담배가 나를 지배하게 돼요.
우리가 해결해야 될 신앙적인 과제는 더 많이 있어요. 도박도 그렇고요. 습관에 대한 과제들이죠. 게임 폭력, 성중독 이러면 심각한 해결될 인생의 과제들 신앙의 과제들이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사소한 과제들도 해결해야 되고 심각한 과제도 해결해야 그래서 우리가 성숙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2025년도를 살 때 어떻게 살까 과제를 해결하듯이 사십시오. 우리 가정에 어떤 과제가 있어요? 그러면 그 과제를 우리 가정이 원래 어떻게 풀어낼까 이걸 고민하면서 한 해 좀만 해보세요.
우리 가정이 함께 예배하는 게 잘 안 돼요. 원래는 우리가 이 과제를 반드시 통과한다. 이렇게 한번 원래의 숙제 과제물을 한번 잡아보세요. 그러면 그 한 해 동안 그 과제를 우리가 달성하고 그다음에 또 숙제를 달성하고 그다음에 또 가정을 위한 숙제를 달성하면 이게 몇 년만 지나면 우리 가정은 정말 좋은 가정이 되는 거예요.
신앙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실은 교회도 그렇습니다. 십일조라는 과제와 숙제도 있습니다. 평생 이 숙제가 해결되지 않는 성도들도 있어요. 매년 과제로 남아 있는 거죠. 이건 이미 벌써 해결이 될 문제인데 이 과제가 평생 동안 남아 있어요. 다음 해로 넘겨지고 다음 해로 넘겨지고 또 다음 해로 넘겨지고 신앙의 숙제 인생의 숙제를 하지 못하고 남겨둘 경우에 인생도 혼란스럽고 신앙도 결국 혼란스럽게 돼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내가 인생의 과제나 신앙의 과제를 못 풀었다. 그러면 여러분 앞에 꼬인 실타래가 하나 이렇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돼요. 꼬인 실타래가 하나일 땐 그냥 뭐 좀 꼬였네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근데 이 꼬인 실테레가 둘이 되고 나중에 10개가 되고 쑥 쌓이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 다 꼬인 인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든 또 교회든 숙제를 해결해야 돼요. 그래야 꼬인 실타래가 내 인생 앞에 놓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4절에 등장하는 길이라는 단어, 또 사명이라는 단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라는 단어는 실은 같은 의미죠. 같은 의미예요.
바울은 자신의 인생의 과제, 신앙의 과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 신앙의 과제를 잘 마치기 위해서 끝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지금 다짐하고 있는 거죠. 나의 생명조차도 죽음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 그러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 준 과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 과제를 잘 마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는 태도로 태도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숙제 인생의 숙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자기 앞에 있는 많은 고난들을 이겨야 한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 앞에 있는 많은 고난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했던 거예요. 왜냐하면 이 자잘한 과제들이 해결되어야 자기 인생의 메인 이벤트 이방인의 사도라는 이 직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매일 숙제를 하듯이 문제를 풀듯이 하루하루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교회도 성숙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을 잘 이렇게 풀어야 돼요.
숙제를 잘해야 돼요. 올해는 감사하게 그래도 우리 교회가 나름 숙제를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너무 원래가 감사해요. 왜냐하면 코로나 때 엄청나게 예배가 이렇게 무너졌잖아요. 100% 확실한 숫자는 아니지만 이제 오후 예배만 조금만 회복이 되면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숫자로 거의 다 회복되는 것 같아요. 송구영신 예배가 조금 오늘 제 예상보다 예전보다 더 많이 오셨지만 좀 적어서 그런 한두 가지 외에는 한 해를 이렇게 돌아보면 그래도 좀 과제를 잘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좀 드는 그런 한 해였어요. 그러면 우리가 내년에는 내년에 과제가 우리 교회에 주어질 거 아니에요 좋은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가 매해 주어지는 영적인 과제를 잘 해결한다는 의미와 같은 거죠.
가정이 좋은 가정 되기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가정에 주어지는 매해의 이 숙제를 과제물을 잘 해야 좋은 가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다음 세대 관련 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어요. 지금 사역자들을 못 구해요. 한 300명대 200에서 300 우리 교회 정도 사이즈는 제 주변의 교회들은 보통 저희가 교역자가 한 4명 정도 필요하거든요. 이 정도 사이즈가 셋 넷 어떤 지역에는 한 명도 못 구했어요. 그래서 권사님 한 분이 간사로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교육자가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교육자를 구할 수 없는 교회들이 많아요.
이제 우리 교회는 그나마 정말 감사하게 어찌어찌 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지금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교육자 수급이 잘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제가 그걸 해결하려고 이 총회에서 교회 교육사 제도도 만들고 지금 익산하고 경산에서 그런 교회들의 교사들을 모집해서 가르쳐서 이분들을 교육 지도자로 라이센스를 주고 또 그들이 교회에서 사역자들을 대신해서 설교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꼈던 것 중에 하나는 많은 목회자들이나 교회가 자기 교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너무 놀랐어요. 교육자가 없는데 교육자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그 교회는 많은 교회들은 자기 앞에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자기 교회가 좋은 교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아니면 너무 힘들어서 여력이 없거나 어쨌든 그런 상황인 것처럼 보여요.
여러분 교회도 좋은 교회가 되려면 그 때에 맞는 과제를 숙제를 잘 마쳐야 돼요. 그래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어느 한 해에는 새벽 기도라는 과제를 교회에 주면 그 한 해 새벽 기도라는 과제를 잘 마치고 또 한 해는 하나님이 화합이라는 화해라는 과제를 주면 숙제를 주면 그 안에 화해라는 숙제를 잘 마치고 어떤 이 주어진 숙제들을 잘 해나가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고 또 좋은 숙제를 잘하는 가정이 좋은 가정이 되고 숙제를 잘하는 성도가 좋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목회도 인생도 숙제를 잘 해야 됩니다. 해결돼야 될 문제는 반드시 해결돼야 됩니다. 뛰어넘어서 해결하든지 풀어서 해결하든지 해결돼야 돼요. 문제가 남아 있고 풀지 못한 채 남아 있으면 문제로부터 고통당하는 순간이 오게 돼요. 왜 우리 인생이 고통을 당할까요? 풀어야 될 문제를 안 풀어서 고통당하는 거죠.
교회가 왜 어려울까요? 풀어야 될 문제를 안 풀어서 교회가 힘든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이 매해 주시는 교회의 과제물들을 잘 풀었으면 교회가 그리 힘들 일이 없을 거예요.
가정도 마찬가지죠. 우리 가정이 힘들어요. 왜 힘들까요? 매일 하나님이 그 가정에 주는 과제를 못 풀어낸 거죠.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열심히 자기 인생의 과제를 풀어내지 않고 엄마는 엄마로서 자기 인생의 문제를 과제를 열심히 풀지 않고 자녀는 자녀로서 자기 인생의 과제를 열심히 풀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교회가 가정이 혼란스러운 거죠.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2024년도 숙제를 잘 하셨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2024년도에 숙제를 주셨어요 여러분에게요. 지금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을 거예요. 맞아 2024년도 과제가 우리 가정의 과제가 이거였는데라고 생각나는 게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 숙제를 잘 하셨습니까? 만약에 못했다 할지라도 실망하지 마시고 2025년의 과제를 삼아서 2025년도에 해결하십시오.
저는 약간 미루는 습관이 있어요. 제가 이렇게 왜 이렇게 미루는 습관이 있을까 이렇게 봤더니 그러니까 참모를 너무 오래 한 거예요. 참모를 대장을 오래 했으면 제가 결정을 안 미루고 빨리 했을 텐데 저는 그러니까 참모를 되게 기르게 한 거죠. 군에서도 군목은 군종 참모예요. 직책이 군종 참모 그래서 계급은 낮지만 회의에 다 들어가야 돼요.
또 전역하고도 부목사로서 그냥 교구만 맡은 게 아니라 행정을 해서 따져보면 담임 목사님들 밑에서 오랫동안 이제 행정을 했죠. 그러다 보니까 항상 누군가가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이게 저는 그래서 누가 보면 되게 결정을 미루는 듯한 느낌이 있어요.
제가 왜 그럴까 싶었더니 맞아 내가 너무 긴 시간 참모를 했구나. 그래서 내가 모셨던 분들이 결정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까 나는 계속 유예시키는 거죠. 제가 목장 교회를 섬길 때도 외부를 섬길 때도 이렇게 보니까 그런 습관이 있어요.
그래서 그래서 최근에 이 습관에 대한 답을 얻었어요. 새해에는 일단 미루지 않으려고 좀 노력하려고 하고요. 미룬다고 할지라도 의사를 좀 표시하려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제가 미룹니다라고 의사를 표시할 마음을 다졌습니다. 새해는 교회나 가정의 숙제를 혼자 해결하지 않고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2024년 여름이 지나면서부터 사역적으로 조금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성도들이 이렇게 하려고 하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오늘 나는 성경 구절도 이거 성도들이 다 한 거예요. 저는 뭐 그냥 제 아이디어도 아니고 저는 그냥 성경 구절만 줬어요. 쓰는 것도 성도들이 하고 포장도 안에 디테일하게 데커레이션을 하는 것도 다 성도들이 했어요. 오늘 밤에 다 해도 조그마한 이벤트가 하나 있는데 그것도 어떻든 성도들의 아이디어로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성도들과 함께 해결하려고 하니까 일이 쉽게 풀리고 잘 되는 거죠.
여러분 인생의 과제도 2025년도에는 혼자 풀지 마세요. 풀다가 어려우면 저에게 요청하세요.
목사님 제 인생 이런 과제가 참 잘 안 풀려요. 목사님 조금만 도와주세요.
그럼 제가 한번 열심히 풀어보겠습니다. 제가 그러려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여러분이 가정에 인생 과제가 있어요. 가정에 근데 지금까지 해결이 안 됐어요. 그럼 저에게
목사님 우리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는데 그러니까 이 숙제를 못 풀었어요. 목사님 새해에는 좀 도와주세요. 함께 풀면 풀릴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좀 껄끄러울 수도 있잖아요.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그러면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 부탁하세요.
집사님 우리 집에 우리 목사님 송구영신 예배 때 하신 말씀처럼 우리 집에 숙제가 있어요. 이 숙제 푸는데 집사님이 2025년도에 좀 도와주세요.
그럼 함께 풀어보세요. 그러면 숙제를 잘 풀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숙제든 교회의 숙제든 가정의 숙제든 함께 풀어야 돼요.
혹이 저처럼 숙제를 미루는 습관이 있어요. 그냥 오랫동안 그냥 참모를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갖게 되는 습관이 생겼고 그래서 자꾸 미루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기다려주는 것 같아서 되게 좋은 목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다리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저는 그게 습관이 돼서 그냥 어떤 강력한 인사이트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냥 먼저 미리 말을 했어야 되는데 말하고 가만히 있고 가끔 뒤부딪칠 때도 있어요.
새해에는 이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혹시 그런 일이 있으면 제가 광고 시간에 미리 말씀드리고 그렇게 한번 해보려고 해요. 그러니까 인생의 과제도 우리는 성도잖아요. 함께 풀고 교회의 과제도 좀 함께 풀고 그리고 가정의 과제도 좀 함께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옆 사람과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함께 숙제해 주실래요?
시작
함께 숙제
러분 숙제를 부탁한 적이 없어서 너무 부끄럽죠 한 번 더 하겠습니다.
함께 숙제해 주시겠습니까? 시작
함께 새해는 우리 함께 숙제합시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렇게 너무 다운됐어요. 함께 숙제하실 거죠? 할렐루야 함께 풀면 숙제를 잘할 수 있어요. 우리 교회가 2025년도 숙제를 잘 푸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