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루니통신 19/190731]오수 사람, 오수 이야기
아버지가 물려준 고향집을 대폭 수리중이다. 이른바, 리모델링. 한기와집이라 요즘 추세인 ‘노출 써가래’가 관건(關鍵)이다. 큰방과 마루의 벽을 터서 거실(居室)로 만들 계획이다.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지만, 옆지기와 여동생들의 의견을 모아 밀어붙이기로 한 것이다. 집을 짓는 것만큼이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 봉천2길 44, 이곳이 나의 노후를 보낼 곳이다. 막상 헛간을 철거하니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너진 담장도 쌓아야 하고, 화단 정리, 마당 넓히기, 잔디 가꾸기, 텃밭 마련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튼, 여유를 갖고 차근차근 할 작정이다.
뫼루니통신 마지막 편을 보니 7월 19일,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마음이 부산하지 이래저래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안될 일이다. 그런데, 오는 8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나의 고향 인근(2km) 오수면 국평마을(동기동창 형관우 형의 고향)에서 연례행사인 천렵(川獵)을 하기로 했다하여 단톡방이 뜨겁다. 잘 하면 그때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 우리집 구경을 할 수도 있겠다싶어 마음이 바쁘다. 1차 완공(2차 완공은 사랑채 리모델링이 끝나는 시점)이라도 보여주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 7월 19일 저녁, 오수면 출신 몇몇이 모임을 가졌다. 천렵에 오는 친구를 비롯하여 우리 친구들에게 ‘오수(獒樹)’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의미에서라도 ‘오수 사람, 오수 이야기’를 통신(通信)으로 내보낸다. 참고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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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보름 전쯤 ‘오수사람’ 몇몇이 서울 한복판에서 향우회를 가졌다. 오수가 어디냐고? 오수는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의 소재지이다. 1992년 이전까지는 둔남면으로 불리다 ‘의견(義犬)의 고향’을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 오수면으로 개칭했다. 한자로 쓰면 더욱 모를 사람도 있겠으나, 의견 하면 한번쯤 들어봤을 듯하다. ‘큰개 오(獒)’자에 ‘나무 수(樹)’자. 구전설화로만 알았던, 주인을 구한 의로운 개 이야기. 왕년에 초등학교 교과서와 방학책에도 실렸다. 이야기는 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지명인 지사면 영천리에 사는 김개인(金蓋仁)이라는 분이 술 취해 둑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불이 났겠다. 늘 데리고 다니던 개가 긴급상황에 놀라 냇가에 몸을 수없이 던져 털에 묻은 물로 불을 꺼 주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 조선시대에는 제법 전북지역의 교통의 요지여서 찰방(察訪)까지 두었던 곳이다. 오수면 출신 7명이 모였으니 향우회(鄕友會)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얼굴 잊어버릴만하면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면면을 보자.
- 진보언론의 논설위원. 오수면 군평리 출신이다. 그는 한문에도 제법 조예가 깊어 최근에 <문집탐독>이라는 역저(力著)를 펴냈다. <대산문화>라는 계간지에 쭈욱 연재한 글로, 최치원의 <계원필경집>을 필두로 정인보의 <담원문록>에 이르기까지 역대 문장가 29명의 문집을 개괄한 후 내용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 책이다.
-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너는> 등의 시집을 펴낸 중견시인. 아버지 고향이 오수면 주천리이니 원적(原籍)이 오수이다. 굳이 태생을 밝히자면 전주. 우리 근대시의 북방의식에 대해 천착하여 문학박사가 된 그의 시 편편에 ‘북방’에 대한 공감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 어느 해 서촌마을 ‘체부동잔치집’에서 막걸리 몇 잔을 마시고 읊은 <오수 사람> 시를 감상해 보자.
경복궁 서쪽 한옥마을 초입 체부동잔치집 한켠에서
중년의 사내 셋, 초로의 사내 둘이 술추렴을 한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서 왔다는 사람들
나는 전주 사람이고 오수는 아버지 고향이라고 해도
다들 괜찮다고 탁배기 잔 가득 막걸리를 채워준다
잔은 돌고 말도 끝없이 돌며 이어지고 흘러간다
의견(義犬)이 났다는 오수, 봉천리 군평리 오암리에서
나고 자랐다는 머리에 하얀 서리가 앉은
인생의 반은 벌써 지났고 전성기도 지났을
초면의 쑥수그레한 사람들이 이내 편안해지는 것은
그들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고향말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 더 반가운 것은
흉내낼 수 없는 그러나 그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말씨와 억양과 소리의 고저장단 때문일 것이다
내 몸속 깊이 숨어 있던 유전자가 울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이 건너던
철다리는 사라지로
마을의 절반 이상이 빈집이 된 지 오래일지라도
밤 솔찬히 깊어도 도란도란 이어지는 수 사람들의 술자리
오래 전 돌아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이
사라진 마을의 풍경과 인심이 내내 함께 있었을 게다
나의 기원이 오롯이 들어 있었을 게다
그 분위기를 제대로 그려낸 그는 천상 시인이었다. 그는 최근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달진은 한때 내가 좋아했던 시인이지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또 한 친구. 언론 유관단체(언론중재위원회)의 직원으로 생업을 하고 있으나 취미이자 특기는 ‘국악 평론’이다. 그중에서도 일제 강점기 권번(券番․기생)들의 가곡에 대한 조예가 깊다. 최근 동아일보에 ‘김문성의 반(盤)세기’를 연재하고 있다. 대학 때부터 우리 음악에 필이 꽂혀 미쳐 살았다한다. 그 취미가 특기가 되어 독보적인 국악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 금암리가 고향. 훗날 고향마을에 ‘소리박물관’을 세우는 게 꿈이라 한다. 전라고 20회. 우리보다 14년 후배.
또 한 친구는 고향 중학교를 졸업한 후 명문 전주고를 졸업, 곧바로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수재이다. 졸업 후 부동산 관련 벤처기업을 창업, 한때 재미도 톡톡히 본 것같다. 지금은 후배들에게 업체를 넘겼는지, 이런저런 동호회 활동이 많은 듯하다. 학교때부터 민주화운동에 관심이 지대했던 듯, 진보적인 의식이 강한 듯하고 모임의 성격이나 참가한 면면이 오피니언 리더그룹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여 마음에 든다. 3년 선배인 나와는 왕년 시골동네 서당을 같이 다니기도 했다.
그날 모임에 새 얼굴이 두 명 선보였는데, 한 명은 한국통신 공공고객본부의 차장인데, 개성공단에서 거의 4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남북회담이 열리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팀이 바로 자기팀이라 했다. 또 한 친구는 KBS 자연다큐멘터리 PD인데, 알고보니 고향동네의 앞동네 15년 후배이어서 당연히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들은 연부역강한 친구들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튼 필자까지 7명이 두어 시간 고향이야기를 나누는데, 의외로 제 고향인 오수에 대해 모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왕년 여름방학책에 고정적으로 실렸던 게 ‘오수 의견’의 사연이었다. 문헌적으로는 고려 중기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나온다는데, 1960년대 오수번영회장이 이런 사실을 알고 당시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가람 이병기선생으로부터 자문을 받은 후, 교육부(당시 문교부)에 교과서에 실을 것을 강력히 요구,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당시 개주인이 개무덤에 꽂아놓았다는 지팡이가 큰 느티나무로 자랐다는 동산은 의견을 기리는 ‘원동산’이 되어 보존되고 있는데, 불과 4년 전인 2015년 당시 오수번영회장의 덕을 칭송하는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얼마 전 비문을 꼼꼼히 읽어본 결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의견공원 근처에 전국으로 소문난 보신탕집인 ‘신포집’이 있어 알만한 사람들의 빈축을 사곤 했는데, 몇 년 전 문을 닫았다. 그런가하면 13개 리(里)중의 하나인 주천리의 뒷산 이름이 노산인데, 계유정난때 조카를 밀어내고 끝내 죽인 세조(수양대군)의 무도함에 의분을 느낀 15가문의 사람이 노산군(단종)을 기리며 은둔한 고장이라는 사실이 임실군에 근무하는 한 학예사의 노력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수에서는 해마다 ‘오수의견문화제’를 개최하여 경견(競犬)대회까지 열면서 의견의 고장임을 널리 홍보하고 있다. 그런 고장인만큼 ‘의리(義理)’하면 ‘으-리-으-리’ 하다고 자랑할 만하지 않는가싶다.
필자는 이 졸문에서 밝히는 바이지만, 이제 42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끝내 청산하고 내 고향 오수로 낙향할 계획이다. 새벽이면 우리 동네 앞뒤 좌우로 병풍처럼 빙 둘러선 사방 팔방의 산 위로 올라가는 새벽 안개를 바라보며 산책을 일상화할 것이다. 한국전쟁때 남부군이 임실 성수산으로 들어가려 걸어갔다는 동네 뒤 신작로를 걸으며, 영양가가 있든없든 끝없는 사색과 더불어 노후를 즐기려 한다. 하루 속히 고향집을 수리하여 가장 갖추고 싶은 것은 나만의 서재(書齋)이다. 졸문이지만,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생활글’을 쓰고 싶은 소망이다. 기회와 능력이 된다면 오수의 고고샅샅 비하인드 스토리도 발굴, 세상에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93세 된 아버지의 백수(白壽)를 빌면서 몇 년이라도 모실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이 글로 한 달만에 판교(너더리+뫼루니) 우거에 올라와 전하는 통신에 가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