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의 서시
이삭빛
지지 않는 꽃이 있다 하여
나는 여름의 심장 앞에 선다
백일, 붉게 타오르는 나무
그 속에는 몇 번의 인내와
몇 겹의 기다림이 겹쳐 있다
아무 말 없이
햇살을 견디는 잎 하나에도
세상의 바람은 다녀간다.
너는 말없이 오래 피고
나는 말없이 오래 서 있다
그리하여 오늘도,
붉은 시간을 배웅한다.
저물녘, 너의 그림자가
내 마음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앉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끝을 알면서도 피어나는 용기이며,
침묵 속에서 피워낸
가장 깊은 말이라는 것을
'배롱나무의 서시' 시작 노트 ㅡ윤정시인
이삭빛 시인의 '배롱나무의 서시'는 여름의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피어나는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게 하는 시이다.
시인은 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가 붉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그 속에 담긴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헤아린다 세상의 온갖 바람을 견디며 침묵 속에 피어나는 배롱나무의 모습에서 화자는 끝을 알면서도 피어나는 용기'이자 '침묵 속에서 피워낸 가장 깊은 말'인 아름다움의 본질을 깨닫는다.
이 시는 덧없이 피고 지는 것들 속에서 영원성을 찾아내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염원을 담고 있다. 또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존재를 꽃피우는 강인한 생명력을 예찬하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화려함이 아니라 끈기와 인내에서 비롯됨을 역설한다.
특히 '너는 말없이 오래 피고 / 나는 말없이 오래 서 있다'는 구절은 배롱나무와 화자의 교감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삶의 본질 앞에서 마주하는 순간을 형상화한다
이는 마치 군자의 곧은 절개를 비유하는 '오래도록 변치 않는 굳건한 의지'를 뜻하는 세한송백(歲寒松柏)처럼, 붉은 꽃을 피워내는 배롱나무의 끈질긴 생명력과 묵묵히 그 곁을 지키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깊은 울림을 준다.
알베르 카뮈는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배롱나무의 서시'는 이 명언처럼, 배롱나무의 아름다움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묵묵히 피어나는 용기를 통해 우리 또한 침묵 속에서 가장 깊은 말을 피워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