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PruxaRWnlmQ
요 1:14, 18,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We have seen God' glory, his dwelling among us)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을 봤다고 선언합니다. “내가 봤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새해 표어는 “예수님을 24시간 바라보자”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2종류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과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더 광범위하게는 천국을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사람들의 말이 “천국을 가 봤냐?”고 묻습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지옥에 가도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눈이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눈이 열러 천국을 볼 수 있다면, 그런 말을 절대로 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나타납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목사님,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강림하신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고,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1절에,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이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2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이 말씀이 곧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되셨습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미국 오마바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으로 계시다가, 우리 죄의 문제를 담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이 때가 차매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 보냄을 받아 육신이 되셨습니다. ➊육신을 가진 인간처럼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아! 얼마나 큰 수치와 부끄러움입니까? ➋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만들어 놓은 율법 아래에 태어나셨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처럼 아기로 태어났고, 인간처럼 율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셨습니까? ➌율법 아래 있는 죄인들을 속량(희생제물을 바쳐서 죄를 면하게 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➍육신을 가진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그리하셨습니다. ➎“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속량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을 계획을 아주 오래 전에 하셨고, 그 때가 찼다는 말입니다. 사실 ➏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여 벌거벗고 있을 때에, “어린 양을 잡아 그 털로 옷을 지어 주었습니다”(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것이 ‘원시복음’(최초의 복음)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모든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고, 죄의 종노릇하도록 하는 마귀, 곧 뱀의 후손을 멸할 것이라는 계획입니다. 그 계획한 때가 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간을 구원하려, 인간의 죄를 속량하려 인간과 똑같은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임마누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육신이 되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거하시매’라는 말은 “자신의 천막을 치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시대를 살 때에 하나님은 ‘회막’에 항상 머물고 계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회막을 치셨습니다.
대상 17:5,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예수님은 집에 거하지 않으시고, 우리 육신의 장막 안에 항상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우리가 그의 영광을 봅니다(14).
14, “...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러분이 전도를 하거나 봉사를 할 때에 그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의 충만함을 보고, 그 충만한 은혜로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진리(영원한 실체=영생)가 충만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일은 율법으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의 종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충만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로써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십니다. ‘독생자’란 무슨 뜻입니까? ‘독특한/특별한’ = ‘사랑하는’, 이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특하신=사랑하시는 아들, 곧 하나님을 육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봅니다.
사람이 되셨지만,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시고, 목이 마르시고 피곤하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려 내시고, 파도와 풍랑을 꾸짖어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➊모세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➋세례 요한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세나 세례 요한은, 그리고 ➌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했습니다. ➍아브라함도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다가 죽었습니다.
요 1:7~8,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을 봐야 합니다. 비록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육신이 되셨지만, 하나님이십니다. 동방 박사들은 별을 보고 와서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예물을 드렸습니다. 목자들은 천사의 좋은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께서 구유에 뉘신 것을 보고 경배했습니다.
➎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영광을 봤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본 것은 이전 선지자들이 율법으로 본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곧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하신 자의 영광이 가득 찬 것을 봤습니다. ‘영광’(헬, ‘독사’)는 성전 안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하나님께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만 가지도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봤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머물고 계신 성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켜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지으리라”.
요 2:19~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 ➊스스로가 성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영광이면서도 ➋육신을 입으시고, 육신을 가진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허물어 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➌구원하시려고 삼일 만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바로 ➍우리 안에 거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이 되셨던 예수님은 이제 거룩한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3. 이렇게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셨습니다(18).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
➊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모세조차도 시내산 안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에, 모세가 하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것도 허락하셨습니다.
출 33: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대신에 ➋모세는 하나님이 지나가시기까지 바위 뒤에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하나님의 등만 봤습니다.
출 33:22~23,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그런데 ➌이제 우리가 독생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부활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빌립이 아버지[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➍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1서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