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嫡子(적자)인 琉璃(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召西弩(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己卯年(기묘년) 3월에 浿帶(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辰(진), 番(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帶水(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於瑕羅(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沸流(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馬黎(마여)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 등이 듣기로는 마한이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彌鄒忽(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만에 漢山(한산)에 이르러서 負兒嶽(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馬黎(마여), 烏干(오간)등
열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河南(하남)의 땅 북쪽이 漢水(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地利(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으로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더 다른 곳을 찾자 마시옵소서."
온조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마침내
하남의 慰支城(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百濟(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 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1. 진, 번 : 진번일 것이다. 요녕~하북의 해안가의 땅이다.
2. 대수 : <수서>지리지에는 대방과 대방산이 나온다.
대수도 그 대방 땅, 즉 산해관 남쪽을 흐르는 물일 것이다.
이를 황해도나 혹은 김해에서 경기만으로 흐르는 물이라고 해석,
비정함은 한마디로 망발이다.
<이십오사>의 대방, 대방산을 무시할 권위있는 학자나 학설은
현재로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13년 임인 : 여기 13년을 다물 13년이라 하면
다물 원년은 B.C.31년(경인)이요
그 13년은 B.C. 19년 임인이 된다.
말하자면 주몽성제는 건국 등국과 함께 개원하여
연호를 쓴 것이 아니라 9년 후에서부터
다물이라는 연호를 쓴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4. 부아악 : 북악산을 <동국여지승람>은 부아악이라 했다.
5. 하남의 위지성 : 하남 尉禮城(위례성)을 맗할 것이다.
지금의 광주라는 설, 직산이라는 설, 익산이라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 땅에 남아 있는 비류백제의 세력을 주목해야 한다.
곧 하북성 창려 일대의 비류는 현지에 남아 있지 않은가?
뒷날 이 대륙의 백제가 중원대륙의 식민활동을 전개하니,
과시 태풍의 눈 같은 존재이자.
대륙백제의 실체를 이런 각도에서 봐야 합리적인 것이다.
6.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 그의 땅이란 오늘의 하북성 북쪽.
이 대목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대륙백제의 세력이 온조백제, 곧 반도백제와의 관계를
맺게 되는 길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즉 하북성 북쪽의 비류백제의 땅이
온조백제의 주권 밑으로 들어 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땅을 가지고[...]"라는 말은
망명 집단의 단순한 망명 구실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말만 "그의 땅을 가지고[...]"이지 땅을 들고 갔을 턱이 없고,
어떤 통치권을 가지고 갔을 리도 없다.
다만 말을 하자니 "그 딴을 가지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