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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에이지의 개념
무신론과 물질주의가 만연하는 20C 말엽에 종교적 인간(Homo Religious)의 새로운 깨어남에 부딪히게 된다.
즉 사람들은 영적 공허를 느끼고 이것을 탈피하기 위해 새 세대(New Age)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운동은 인간의 영성적 변형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종교 분야 뿐 아니라 사회전반, 즉 정치․문화․예술․과학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뉴 에이지 운동은 치료적인 면, 종교적인 면, 사회․정치적인 여러 면에서 작은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 수가 없다.
또한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뉴 에이지 운동은 종교적 독트린이나 믿음의 조직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눈에 보이는 직관적 통찰력적 경험에 중점을 둔 운동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뉴 에이지 운동을 마치 “찬부페”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뉴 에이지 대회나 잡지를 보면 본능적으로 여러 다양한 색채로 다양한 종류의 뷔페 앞에 와 있는 인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신분석, 동양적 묵상, 선, 요가, 인간심리의 경배, 전인건강 대치요법, 윤회설, 무당, 황홀경에 정신통일, 마녀, 마법, 구루(Guru), 강신술, 점성술 등이며 여기서는 깊은 의미를 가진 전통 종교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뉴 에이지 운동은 동양의 종교, 철학적 요소와 서양의 정신분석, 심리학 등의 과학과 유대교, 그리스도교 계시들을 분석하여 영지주의와 밀교를 합친 혼합주의(Sincretism)이다. 그리고, 진화론적, 생태학적, 천년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점성학에 기반을 둔 이 뉴 에이지 운동에 의하면 이 시대는 새 세대(New Age)로서 물병 좌(Aquarius)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뉴 에이지를 물병좌 시대라고도 한다.
점성학에서는 태양과 여러 행성에서 일어나는 회전순환운동이 한 궤도를 완전히 마치려면 적어도 약 2,600년의 시간이 걸리며 이 궤도를 “황도”라고 하며 이것은 다시 12좌로 나누어지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양의 별자리인 황소, 물고기, 처녀, 사수, 쌍둥이 등등이다. 이 한 좌에서 다른 좌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2,100년이 걸리는데 이것을 한 세대(Age)나 천도(황도)라고 한다.
현대는 물고기 좌에서 물병 좌로 옮겨가는 과정이며, 황도의 11번째 좌로서 한 남자가 그의 오른손에 물주전자를 가지고 운반하는 것이다. Aquarius는 물병(라틴어의 Aqua '물‘에서 유래)을 의미한다.
뉴 에이지 추종자들에 의하면 태양이 차례로 이 황도(별자리)를 통과 할 때마다 12별자리의 하나 하나에서 나오는 주요 광선의 에너지는 우리 문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6,000년 전의 ’Taurus' 황소자리는 미드라쉬 종교, 즉 황소 춤을 추는 자들이 성행했고, 양자리는 유대교와 양의 뿔을 부는 것에서 볼 수 있고, 모세의 이야기에서는 금송아지(미드라쉬 신앙)에서 하느님의 시대 양자리로 바뀜을 보여준다.
그리고 물고기 좌는 로마제국이 일어날 때와 일치하며 이 때는 로마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 시대는 또한 성 프란치스꼬와 같은 헌신적 인물이 나타나는가 하면 또 종교재판과 같은 광신적 마음을 지닌 사람들도 태어난다고 한다.
뉴 에이지 추종자들에 의하면 이제 물고기 좌가 끝나고 물병 좌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물병좌 시대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정신적 갈등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물병으로 상징, 인간 영혼의 참 자유를 단면적으로 표현해 준다.
또 이들은 점성학에 의해 양자리는 성부의 좌(구약), 물고기는 성자의 좌(신약) 그리고 이제 물병 좌는 성령의 좌로서 뉴 에이지는 새로운 영적 변형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성령의 영적 광선이 다양한 혼합으로 이 세상을 비추어 인간의 ‘철저한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 근본적 변화를 통해서만 새로운 세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뉴 에이지 추종자들은 주장한다.
이때까지 역사 속에서 나타난 많은 종교적 스승으로 표현되는 내적 스승(Maestro Interiore)의 도움으로 영성적으로 자유로움과 새로움의 깨우침이 이루어지는 개인적 영성 시대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가 아니라 예언자나 인간의 영적 스승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뉴 에이지 운동에서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개발시켜 인간의 신비적 차원 즉 인간의 영적 변형에 있다. 그래서 이 운동은 여러 종교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요소와 과학, 기술, 심리, 정신분석 등등을 혼합시킨다. 이렇기 때문에 영성적 면에서도 한군데에 집중되지 않는 ‘방랑자’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2. 뉴 에이지 운동의 기원
뉴 에이지 학자들은 뉴 에이지 운동이 러시아 출신의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가 1975년 뉴욕에서 창설한 신지학협회(The Eheosophical Society, 神智學協會)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뉴 에이지 운동이 세기말적인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산업사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60년대에 나타난 현상을 가리키는 경우가 지배적임을 볼 때 실질적인 시작 시기는 1960년대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러나 신지학협회가 1960년대에 발생한 이러한 조류들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에 뉴 에이지 운동의 출발점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서구의 1960년대는 학생운동, 반문화(反文化)운동의 시대였다. 전세계적인 반전운동과 학생운동, 기존 산업문명과 그리스도교 문명에 대한 반발이 절정에 이른 시대였다.
이 운동에 가담한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은 구체적인 반발의 표시로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것이 히피운동이다. 이때 서구문명과 함께 그리스도교도 이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반그리스도교적이고 반문화적인 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 급속하게 진행된 세속화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틈을 타서 나타났다.
이때 히피운동과 같은 시도에 참여한 청년들 가운데는 인간 의식을 확장하여 신비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하여 여러 종교와 사상체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요소들과 과학․심리․기술․정신분석 등을 혼합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동양종교와 동양사상이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때부터 인도 출신의 수행자들과 서구에서 교육받은 인도인 등 아시아인들의 활약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이전에 이미 동양사상과 동양종교, 세계 각 지역의 신비사상과 비의 종교들이 서구사회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만큼 서양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사상들이 주목을 받았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인도에서 요가를 수행하는 아쉬람(ashram)과 같이 구루(Guru)들을 중심으로 여러 제자들이 모여 수행비법을 전수 받는 형태들이 나타났고,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내려오던 비교적이고 마술적인 방법들도 등장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와 서구문명에 대한 염증을 이러한 사상과 서구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비밀스런 방법들, 심지어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방법들에 매달리면서까지 해결하려고 하였다. 또한 산업문명과 결부된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공해로 인한 환경파괴인데, 이들은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산업문명의 폐해에 도전하고자 하였다. 뉴 에이지 운동은 바로 이런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3. 뉴 에이지 운동의 주요사상
이 항목에서 소개하는 사상들은 뉴 에이지 운동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경향과 이 운동의 일각에서만 주장하는 경향들 가운데 비교적 영향력이 있는 것들이다.
신지학(神智學, Theosophy)
뉴 에이지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조류 가운데 하나이다. 신지학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발생하였다. 어원을 따져 올라가면 신지학이란 ‘하느님의 지혜’란 뜻이다.
16세기까지 신지학자들이란, 대부분의 철학자와 신학자들과 같이 신적인 것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사실 전통적인 신지학과 신지학협회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블라바츠키는 ‘신지학’이라 불리는 밀법전수적(密法傳受的)인 비교(秘敎)협회를 1875년 미국 뉴욕에서 신지학협회라는 이름으로 창설하였다.
이어 3대 회장 앨리스 베일리가 뉴 에이지 운동의 실질적인 기초를 놓았고, 4대 회장인 스리랑카 출신 즈나라 자사를 비롯한 역대 지도자들이 강연과 저서를 통하여 뉴 에이지 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 협회는 각 나라에 ‘신지학협회 로지(Lodge)'라는 지부를 두고 지속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매년 대회를 개최해 자신들의 사상 전파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의 첫째 목표는 영적․육체적으로 같은 기원을 가진 인간이 기존의 모든 비인간적 구조를 타파하고 인류가 하나되는 인류애 적인 평등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인간 스스로 자신 안에 잠재된 영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 특히 인간 안에 잠재된 심리적․영적인 여러 힘을 연구하는 것이다.
생태학(Ecology)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종교를 조직화된 체계 논리나 이성으로 보지 않고 항상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 두려움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생활환경을 구성하는 것이 생태계인데,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이 가운데서 자연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
그들은 땅의 모성적인 면을 강조하여 그리스의 땅의 여신 ‘가이아’에 관심을 보이는가 하면, 땅의 신성성을 부각시켜 자연보호, 환경보호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연의 관리를 위임하였으나 인간이 관리와 지배를 혼동하여 자연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그 탓을 그리스도교에 돌리며,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상적인 세계는 자연과 우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생태학적 세계관을 따르는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것으로,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과거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자연중심의 세계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들 가운데는 모든 존재 안에 신성이 내재해 있다고 믿는 범신론자들도 많다. 이런 생태학적 세계관은 환경문제가 전 지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면서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경향을 타고 서구 문명이 전파되기 이전에 존재하던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이나 지혜를 다시 복원하고, 이런 문화로 다시 복귀하려는 흐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생태계 전반이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이러한 세계관이 가진 잠재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전체주의(Holism)
전체주의는 범신론적인 성격이 강하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므로 한 인간의 영혼이 우주의 핵심이며 반대로 우주의 핵심은 인간의 영혼이 된다는 생각이다. 이 전체주의 개념에서 인간 개체는 특별한 의미나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전체, 즉 우주 만유의 근본원리는 오직 ‘하나’라는 것, 또한 인간과 우주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인간 생활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다른 실재에도 해당된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응축된 힘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뉴 에이지 운동은 이 전체주의, 즉 대우주와 소우주의 합일을 육적․영적 세계의 전인적 건강에 적용한다. 이들에게 건강은 질병 치료뿐 아니라 육체와 정신과 영을 치료하여 인간을 그 일체, 전체와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건강도 한 인간을 형성하는 모든 요소와 세력들의 역동적이고 조화 있는 균형이라고 본다.
환생(還生, Reincarnation)
환생은 인간이 생전에 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다음 생에서 여섯 가지 형태 중 하나로 다시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불교의 개념이다.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 보면 힌두교가 원조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활동과 사유로 인하여 일어나는 말과 행동을 업(業, karma)이라고 한다.
업을 지으면 이에 상응하는 결과가 반드시 있다고 하는데, 선을 닦으면 다음 생에서 복을 지은 만큼 상승하고, 악을 지으면 지은 죄의 결과에 따라 낮은 지위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이 업의 결과에 따라 다음 생에 태어날 때 상승하거나 하락하면서 이런 과정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을 윤회(輪回, samsara)라고 한다. 업보에 따른 이 윤회설은 현세의 신도들을 윤리적으로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뉴 에이지 운동가들이 생각하는 환생은 다른 의미이다. 그들은 영혼이 여러 번의 환생을 통하여 성숙하고 정화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불교나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환생과는 다르게 인간이 행한 행동의 결과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여러 번 태어나는 것이 진화하는 것이고, 이 진화의 결과로 인간은 우주의 궁긍적 실재와 합일되는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또한 환생설을 과거와 연결시켜 전생을 읽는 방법들도 발전시켰다. 환생이 생의 형태를 바꿔가면서 계속 생을 거듭하는 것이므로 현재의 인간은 무수한 과거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특수한 방법을 이용하면 이 전생을 알 수 있고, 전생에서 원인이 된 것들을 찾아 치유하면 현재 경험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무당들이 점을 보러 온 사람들의 과거를 알아맞히거나 불교에서 깨달은 이들이 과거를 읽을 줄 아는 능력을 갖는 것, 최면을 통하여 전생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등, 환생도 뉴 에이지에서 자주 이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심령술(心靈術, Spiritism)
심령술은 영적인 힘으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어 과거의 일을 묻거나 감추어진 비밀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심령술에는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어 그것이 가진 신비한 힘을 이용하는 샤머니즘의 방식과 인간의 영적 진화를 드러내는 영들(souls)과 교류하면서 인간의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시키려는 뉴 에이지 방식이 있다.
뉴 에이지의 심령술은 1848년 북부 뉴욕주에 살고 있던 마거릿과 케이트 폭스 자매가 하이즈빌에서 영혼이 교신하는 소리를 들었다는데서 시작한다. 심령술은 인간이나 다른 물질을 통하여, 죽은 자의 영, 혹은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청정한 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과 교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인 존재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중개역할을 하는 영매(靈媒, channeler)가 필요하다. 영매는 물질세계와 영혼세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 또는 물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굿을 할 때 무당이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혼을 부르는 것을 심령술이라 하며, 죽은 자의 영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무당을 영매라고 한다. 이처럼 심령술은 영매를 통하여 죽은 사람들의 영과 통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이 심령술을 환각제나 심령치료요법으로 많이 이용한다. 그들은 이 방법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로 여행하게 되고, 무아경에 빠져 자신의 초자아와 만나게 된다고 한다.
영지주의(Gnosticism)
뉴 에이지 운동은 서양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와 대결하였던 사상들의 영향도 많이 받고 있다. 영지주의가 이 가운데 하나이다. 영지(靈智)라는 말은 그노시스라는 그리스말에서 나왔다. 그노시스는 지식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지혜를 가리킨다. 영지주의에서는 이 지식을 전수 받은 사람은 우주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악한 물질세계로부터 구원받게 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물질세계가 악하므로 그리스도는 실제로 육체를 입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출현이 거짓된 것, 또는 그림자로서 인간 예수 안에 일시적으로 깃들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는 매우 긴 역사를 지닌 사상적 흐름으로서, 피타고라스 학파, 신플라톤 철학과 다양한 신비주의 학파에까지 이어진다. 현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지주의는 중세시대의 마법이나 마술로 알고 있었던 장미 십자단이나 성전 기사단, 이슬람의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유럽의 수피즘(Sufism)이 원조이다.
세계관(世界觀)
뉴 에이지 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리는 인간이 영적 각성을 통해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 사상은 우주는 본래부터 하나이며 각 인간은 모든 작은 우주이며 그러한 인간들의 모임이 바로 우주 하는 범신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우주는 본래 하나의 존재이며, 그 우주적 존재가 곧 ‘우주적 영’이라고 하면서 존재하는 것은 이 ‘보편적 우주’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들의 생각에 따르면 우주와 우주적 영 속에 있는 만물은 그 기원이나 영원성에서 신 그리고 절대적 통일체와 하나이다. 여기서 우주는 주기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 주관상태에서 객관상태로, 여기서 다시 주관상태로 변화하는 주기적 순환을 반복한다 이것을 신지학에서는 생명의 주기라고 하는데, 이 생각에 따르면 객관적이고 물질적 우주인 현재 세계의 반영은 일시적 환영(幻影)에 불과하다.
한편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지구가 칠중(七重)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하나가 아니라 일곱 개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구조는 우리의 육체적 지각으로 미치지 못하는 물질적 존재계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있는 지구와는 전혀 다르다. 이곳은 일상적인 인간의 지성이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오로지 단계적인 인간의 의식상태의 진화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의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4. 뉴 에이지 운동의 관계양식 : 네트워크
네트워크는 뉴 에이지 운동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고유한 관계방식이다. 네트워크는 의사소통이 가장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상태를 나타내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간관계를 말하기도 한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이 관계 형태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협력하는 마음을 고양시키고, 상호간에 승화를 고무하며, 인간적인 배려와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회원간의 독특한 유대관념과 관계의 틀은 전통 종교와 사뭇 다른 것이다. 종교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제도화된 종교 곧 교회 유형은 수직적이고 고정적인 신자들의 모임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는 데 비하여, 뉴 에이지 운동은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회원제이다.
이렇게 고정된 중심이 없기 때문에 조직을 확산시키기 쉽고, 규모가 작아서 구성원들끼리 유동적이고 긴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들은 이러한 조직 방식을 기반으로 식이요법에 필요한 섭생용 식품점을 운영하기도 하고, 황홀경에 이르기 위해 약과 뉴 에이지 운동서적, 각 방식에 필요한 도구들을 파는 상점을 운영하기도 한다.
이들은 대부분 작은 집단을 이루면서 특정한 조직 형태는 갖추지 않고 책․잡지․신문․텔레비전․점성학 책들과 같은 대중매체와 회의․전화 통화․유령 조직․강연․연수회․테이프․정치적 제휴를 통해 세력을 확산시킨다. 과학적인 면에서는 물리학․생물학․정보학․심리학․건강생활을 위한 약품․예술․우주 종교․영지주의․밀교․신비적 기술학․새로운 세계 질서․육체치료법․영적치료법 등을 사용한다. 또한 영화․주문으로 영을 불러내기․텔레파시․염동력 이용․물체 움직이기․마술사․마녀․마법의 칼․부적 등을 사용한다.
또한 클래식과 팝뮤직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뉴 에이지 음악은 심리치료, 스트레스 해소, 명상 음악 등 여러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 내용에 허무주의나 회의주의일 경우에 있어서는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뉴 에이지의 책은 인간의 의식, 무한한 가능성을 확장 개발함으로서 신격화로 비신앙적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예: 배꼽, 히말라야 성자들 등)
5. 가톨릭 신앙과 뉴 에이지 운동
뉴 에이지 운동과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어떤 교리적 차이가 있을까? 뉴 에이지 운동과 그리스도교가 사상적인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이는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신론(新論)
뉴 에이지 운동의 기본 노선은 ‘모든 것은 하나’로 보는 일원론(monoism)이다. 일원론은 만물이 하나고 모든 것은 상호 관련되어 있으며 상호 침투성을 갖는다는 사상이다. 뉴 에이지 추종자들은 이 일원론에서 범신론을 이끌어낸다. 신은 만물 안에 존재하고 만물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동양의 종교 특히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을 찾는 문제를 다룰 때 인간 내부의 신비적 경험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에게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 내부에 깊이 들어갈 때 만나는 존재이다. 인간의 신비와 신적인 것을 동등하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히 하느님을 인간의 자기경험, 그리고 우주적 의식의 총체적 경험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스도론
뉴 에이지 운동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우주 에너지가 육화한 밀교적 그리스도이다. 이들은 우주의 물체적 에너지인 기(氣)가 인류 역사상 중요한 시기마다 위대한 인물로 육화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붓다․예수․공자․마호메트․차라투스트라 등과 같은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이러한 기 또는 에너지가 육화한 존재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그가 ‘그리스도적 의식’으로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우주와 완전히 결합하여 그 안에서 소우주와 대우주 간 상호 에너지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그리스도를 태양의 로고스, 땅의 로고스, 우주적 의식, 우주적 그리스도나 빛 에너지로 표현한다.
물론 이때의 ‘우주적 그리스도’는 성서에 나타나는 ‘역사적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태양의 로고스로서 충만한 빛 에너지가 육화한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그들이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창조와 구원의 의미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는 데서 비롯된다. 야훼 하느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기본 진리를 부정하는 데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인 것이다.
뉴 에이지 추종자들은 이런 그리스도론을 전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낮추어 보고, 그분의 사명을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절하하며, 그분의 구속적 희생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관(人間觀)
뉴 에이지 운동의 인간관은 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뉴 에이지 운동의 세계관은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오직 ‘보편적 우주’이고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보편적 우주의 개체적 존재이자 동시에 우주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 에이지 운동에서 인간은 내면에 보편적 우주와 본질적으로 같은 신성의 불꽃을 갖고 있으며, 인간의 영적 자아는 실제로 전지한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잠재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물질이라는 방해물 때문에 그 지식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아트만의 전지전능함을 가리고 본질의 각성을 방해하는 육체를 벗어나는 해탈을 이루면 영적 존재, 곧 신이 될 수 있다 믿는다.
이러한 생각은 영육 이원론으로 자연스럽게 육의 영역인 세속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뉴 에이지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에서도 강조되는 것이지만 인간은 영적인 존재, 곧 무지하여 아직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한 신이다. 인간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주었으나 인간이 일방적인 범죄로 인하여 타락해 구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고 가르친다.
우주론(宇宙論)
뉴 에이지 사상은 신을 세계와 동일시하는 범신론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는다. 또한 뉴 에이지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비인격적이고, 비도덕적인 존재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영(靈) 또는 의식으로 보는 일원론의 성격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곧 우주는 창조주의 피조물이 아니라 우연히 생성된 것이라고 보는 데서 온다.
인간의 존재를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 곧 우주의 기원이 필연인가 우연인가에 따라 양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존재의 기원론에서 보면 필연론이고, 뉴 에이지는 우연론이다.
인식론(認識論)
뉴 에이지 사상은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간을 소우주로, 자연계의 우주를 대우주로 보고 이 둘이 하나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소우주인 인간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곧 신이고, 구원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였다. 소우주와 대우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여기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요소가 이들에겐 육체라는 거추장스런 감옥이다. 세계의 대 종교들이 신과의 합일을 위하여 엄격한 수행을 요구하거나 은총을 기대하는 등 인간의 겸손과 엄격한 수행을 강조하는 것에 비하면 뉴 에이지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마약과 같은 용이한 수단을 찾는 것이 특징이다.
윤리관(倫理觀)
뉴 에이지는 자율적이고 상대적인 상황윤리를 따른다. 심지어 사탄숭배를 하는 사람들처럼 무고한 살인도 정당화하는 등 윤리의식이 부재한 경우도 있다. 물론 사탄숭배는 극단적인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뉴 에이지는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육의 요소, 그리고 이것이 연장된 세속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도 간과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뉴 에이지는 하느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고, 죄의 실재도 부정한다.
역사상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종교들의 특징이 인간 존엄성과 인간 사이의 정의로운 관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과 비교하면 커다란 차이가 아닐 수 없다. 뉴 에이지 사상은 이러한 의식이 아예 없거나 약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반사회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계시에 기초한 엄격한 절대윤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을 중심으로 하면서 하느님-인간, 인간-인간, 인간-자연 간의 윤리를 중시한다.
구원(救援)의 방법(方法)
뉴 에이지 사상에서는 무지로 인하여 드러나지 않는 잠재능력과 본질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구원자도 인간들을 이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스승이라고 본다. 다 같지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우주적인 리듬에 따라 신적인 스승, 곧 구원자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고 믿고 있다.
이는 곧 각 종교의 창시자들은 우주적 기가 주기적으로 나타난 존재라고 보는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또한 이러한 법칙에 따라 등장한 존재이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앞서 인간론에서 보았듯이 인간이 스스로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애초에 완전한 상태가 있었고, 어떤 계기로 인하여 이 본질을 잊게 되었다가 자력 또는 타력의 계기로 이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가르침의 구조는 비슷하지만 구원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유일하신 참 하느님이자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 구원자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내세관(來世觀)
뉴 에이지는 사실상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없으니 내세도 없는 것이다. 내세라는 말 자체가 지상의 생활이 육신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끝나면서 이어지는 죽음 이후의 삶을 가리키는 까닭이다. 이들이 죽음을 다음 생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 위한 시작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 가운데 하나가 환생설인데 뉴 에이지에서 비교적 많이 선택하는 입장이다. 환생설은 힌두교와 불교의 존재론을 뼈대로 자신들의 생각을 담아 전혀 다른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본래 환생은 윤회전생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인간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윤회를 거듭하면서 생을 바꾸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것은 철저하게 이 지상에서 살아온 삶의 결과에 따른다. 이 지상의 업적에 따라 인간 이하로도 인간 이상으로도 태어날 수 있다. 본래의 의미는 이것이었는데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환생을 생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성숙의 단계가 높아지는 것으로 바꾸어 해석한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도 다르고, 애초에 그들이 빌려온 불교나 힌두교의 본래 의미와도 상당히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교도권(敎導權)과 제도(制度)
뉴 에이지 운동은 교회의 교도권과 제도적인 형태를 부정한다. 네트워크가 그들의 관계방식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고정된 중심이나 지배적인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곧 그들이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의 제도와 가르침을 거부하는 태도를 갖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르치는 권위의 중심이 없는 것은 한편으로 개인의 자유와 뉴 에이지에 따르면 개별 조류의 사상적 자유로움을 보장하는 것이다.
반면 가르침의 지속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낳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정신이 강한 상태에서 이러한 정신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제도화로 이행하고, 이러한 과정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온 종교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들이 권위의 중심과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는 그들의 운동을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가르치는 권위와 이를 존속시키는 구조인 제도는 그들이 비판하는 낡은 시대의 패러다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 없이 그리고 권위의 중심이 없이 지속될 수 있는 종교운동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 운동이 안고 있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성서(聖書)와 전통(傳統)
뉴 에이지 운동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사건의 의미를 상대화시킨다. 전통 속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교 신비가의 저술도 그릇되게 이용하거나, 본래의 내용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그래서 신비가들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들의 스승으로 둔갑한다.
이와 같이 뉴 에이지 운동 추종자들은 성서나 전통에서 유래되는 언어․사건․인물의 본래 의미를 변형시켜 자신들의 생각을 지지하는 새로운 의미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들의 교리체계 안에서 성서의 사건들이나 신학적인 용어, 전통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단어들은 본래의 맥락이나 의미와 전혀 다르게 사용된다.
부활(復活)
뉴 에이지 운동은 환생교리를 믿기 때문에 유일하고 반복 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부정한다. 인간이 구원자가 되는 교리에서 초월적인 하느님의 개입은 당연히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또한 생을 거듭할수록 성숙의 단계가 높아진다는 환생교리를 따르면 죽음 이후의 삶도, 부활도 설자리를 잃게 된다. 결국 뉴 에이지 운동에서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 된다. 반면 부활은 창조주 하느님, 그분의 육화를 통한 구원사건,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 구원론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덕(修德)
뉴 에이지는 그리스도교에서 하는 기도와 같은 신앙실천을 강조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비그리스도교 계통의 수행방법이나 접근양식을 택하기 때문에 기도의 신비적․수덕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들은 기존의 큰 종교전통들이 역사적으로 검증해 온 수행방식을 매우 피상적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의 엄격한 수행, 또는 신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하여 나름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은 뉴 에이지 운동가들에겐 찾아보기 힘든 생각이다. 그래서 이들은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효과를 터득하는 방법, 곧 ‘깨달음의 영원한 길로 들어서기 위한 길’로서 마약 복용을 선택하기도 한다. 환각제 사용과 같이 인위적이고 수동적인 방법의 채용이 정신작용을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6. 평가(評價)
뉴 에이지 운동은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교와는 함께 하기 어려운 사상이다. 그러나 이들이 갖는 특징은 뉴 에이지 운동이 자칫 미래의 종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비관적인 예측은 우리 시대에 영적인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보다 이를 방치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과 영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욕구를 기성 종교에서 충족시키고자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또한 뉴 에이지 운동은 현대인들이 소비하기 쉬운 인스턴트 종교상품이다. 인스턴트의 특징은 결과물을 빨리 보여주는 점이다. 이런 효과를 내기 위해 지구상에서 좋다는 것은 모두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 뉴 에이지 운동의 강점이다.
소비자의 취향에 철저하게 따라주는 이들의 교리적 적응 능력, 상황 정의를 도출 해 내는 능력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빠르게 최적의 답을 얻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인터넷과 같은 정보매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현재의 뉴 에이지 운동을 포함하여 미래에 발생하게 될 종교운동들에도 해당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내적 쇄신에 주력하면 많은 부분 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뉴 에이지 운동이 태동하게 된 것이 교회 내부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뉴 에이지에 대해 그리스도 교회는 본체론적 삼위일체, 우주적 그리스도론, 성령론, 신론, 종교 신학적 측면에서의 계시론 등 깊은 신학적 통찰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교회는 세상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뉴에이지를 알고 이해해야 하며 또한 그들의 긍정적인 면 - 예를 들면 영성적 감수성이나 친밀한 내적 자아를 발견하여 이성과 직관을 조화시키며 이론보다 실천으로서 인간의식을 계발시키고 또한 자연과의 조화를 재인식함으로서 환경보호뿐 아니라 인간의 생태계 즉 함께 사는 인간의 이상적 삶 구현)은 받아들여 그리스도 신앙 안에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특히 뉴 에이지를 구성하는 동양적인 요소 중에 우리 문화 안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스며들어 있는 깊은 내면성에 기인되는 종교심과 신비에 대한 직관, 그리고 육체를 중요시하는 명상과 기도법 등을 그리스도교의 참된 이성의 능력과 사랑에 조화를 시켜야 한다. 이는 현대의 영적 위기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이에 맞는 답을 제시할 때 가톨릭 교회는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구원의 성사로서 모든 사람을 지고의 가치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