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9일(주일) 사랑부 예배
말씀 : 마태복음 7:1~5
제목 : 네 눈의 들보를 빼라!
도입 : 비판하지 말라.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비판을 잘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보면 판단을 하고 정죄를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허물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형제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형제는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동포요 민족입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를 형제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같이 지내는 분들 중에서 다른 사람을 비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이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셨냐면 ‘네가 비판을 하면 너 역시 같은 제목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라’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정죄하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
또한 사람은 큰 허물이 다 있는데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 받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다른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1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뒤에서 욕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고 재미있어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비판하다는 말은 헬라어 성경원어로 ‘크리노’입니다. 이 말은 ‘정죄하다, 심판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재판관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면 2절에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면 너희가 똑같은 제목으로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약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민승이가 자전거를 잘 탑니다. 요즘에는 대현이가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을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민승이가 볼 때 대현이가 자전거 타는 것은 너무 시시해보입니다. 그럴 때 민승이가 ‘자전거를 그 정도 밖에 못 타느냐?’고 비판을 하면 물론 대현이도 언짢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자전거에 프로 같은 사람이 민승이보고 시시하게 자전거를 그 정도 밖에 못 타느냐고 핀잔을 주고 비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허물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격려하고 잘 되게 도와주고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3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눈 속에 티가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고 빼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 속에 티는 볼 줄 아는데 자신의 눈 속에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들보는 집을 지을 때 기둥 위에 기둥과 기둥 사이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지붕을 설치하여 집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 들보는 크기가 기둥 만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 들보가 사람의 눈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만큼 큰 허물과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인간은 누구나 큰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르고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은 ‘너의 눈에 들보를 깨닫고 그 것이나 빼고 다른 형제의 티를 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허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이 그렇게 큰 죄악이 아닌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게 됩니다.
둘째, 네 눈의 들보를 먼저 깨닫고 빼도록 하라!
4절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는 눈의 들보같은 허물이 있으면서 그것은 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가 있다고 그것을 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저 자신에게 있는 들보같은 허물을 제하고 그리고 가서 형제에게 형제의 눈의 티를 빼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과 용서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죄도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에덴동산에 살 때에는 인간은 죄도 없고 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꾀임을 받아 선악과를 먹고 나서 인간들에게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죄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죄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죄악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가 있어서 그렇게 죽어야 되는데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대신 그렇게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가시고 또한 우리를 죄에서 용서해주십니다. 아멘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용서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천국을 선물로 받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갈 뿐 아니라 이 땅에 살 때에 천국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렇게 됩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렇게 크고 무한한 우리의 죄를 주님이 다 지고 가시고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눈의 들보같은 죄를 다 끄집어내어 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가 만일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보았을 때 그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하면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5절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아멘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자여’라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연극을 하는 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연기를 하는 사람은 그 연극 대본에 있는 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본인의 직접 삶과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연극대본에 아주 착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많은 사람들에 존경받으며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연극배우가 평소에 그렇게 위대한 인물인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외식하는 사람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마치 가면을 쓴 사람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좋은 사람이나 그 속에는 검은 것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외식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이 외식하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시 바리새인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고귀하고 훌륭해 보이는 사회 지도자이나 속은 죄가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른 죄인들을 정죄하고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속에 있는 죄와 허물을 먼저 걷어내고 다른 사람의 죄를 걷어내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이 우리의 들보같은 죄를 다 지고 가셨습니다. 그것은 내 선행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주님이 은혜로 십자가를 통해서 다 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보고 용서를 못 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면 우리의 그 큰 죄를 용서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너의 죄도 용셔하지 않으리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눈 속에 들보같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가 있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어느 정도 되는가?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래서 6천 데나리온은 6천 일 동안 일한 것이니 6억 정도 됩니다. 오늘날 노동자 하루 품삯을 10만원으로 보았을 때입니다. 사실은 더 합니다. 15만원 정도합니다. 그리고 1만 달란트라고 했으니 여기서 1만을 곱하면 6조 정도 됩니다. 실제로 10조 정도 되겠죠. 그 많은 빚을 갚겠으니 용서해 달라고 하니 임금이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그 신하가 길을 가다가 다른 동료 신하를 만났습니다. 그 다른 사람은 이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백 데나리온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 천만 원 정도 됩니다. 갚으려 하니 꼭 갚을테니 참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하가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1천만원 안 갚는다고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다른 여러 신하들이 이 일을 알고 임금에게 알렸습니다. 임금이 이 신하를 불렀습니다. ‘나는 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해주었는데 너는 백 데나리온 안 갚는다고 감옥에 가두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하를 당장 감옥에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그 많은 죄를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해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같은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도저히 우리가 스스로 갚을 수 없는 것을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아멘
결론) 남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을 성찰하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죄를 용서받았고 영원히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비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주고 이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먼저 나의 허물을 깨닫고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성도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