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362) / 스페인
카세레스 옛 시가지(Old Town of Caceres; 1986)
에스트레마두라 자치 지방[Autonomous Community of Extremadura], 카세레스 주[Province of Caceres]에 속하는 카세레스에는 이슬람교도인 무어 인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전투 역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도시의 건축물에는 로마, 이슬람, 북부 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슬람 왕조 때 건설한 30여 개의 탑 가운데 부하코(Bujaco) 탑이 가장 유명하다.
카세레스는 14~16세기까지 강력한 경쟁 관계와 파벌에 의해 지배된 도시의 모습을 굉장히 잘 보여 주고 있다. 요새처럼 지은 저택, 그리고 탑과 궁전들은 도시 공간 구성의 특징이다.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 지방에 있는 이 도시는 이슬람 미술과 북부 고딕, 이탈리아 르네상스, 신대륙의 예술 등과 같이 아주 다양하고 대조적인 영향력이 미친 흔적을 보여 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시가지는 알모하드(Almohad) 왕조가 스페인에 세운 요새 도시의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카세레스에 있는 데스모차다(Desmochada) 탑은 탑과 성벽 유적의 일부로서 이 문명을 대표하며,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 기원전 29년에 건설된 ‘노르베누스 카이사르의 식민 도시[Colonia Norbensis Caesarina; 카이사르의 신식민 도시]’의 몇 가지 흔적이 도시 경관 속에 남아 있다. 곳곳에서 로마 시대 남북 방향의 가로인 카르도(cardo)와 동서 방향의 가로인 데쿠마누스(decumanus)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로마 성벽은 몇몇 구획과 초석 정도로, 이 또한 아랍 인들에 의해 상당히 재건된 것이다. 6세기에 카에사리나(Caesarina)라는 지명이었던 카세레스는 서고트 왕국[Visigothic Kingdom] 시대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랍 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요새화했을 당시, 카세레스는 거의 명성을 잃고 카스리(Qasri)라고 불렸다. 12세기에 지리학의 거장인 알 이드리시(Al-Idrisi)는 이곳을 기독교에 대항하는 중요한 교두보로 여겼다. 12세기에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알모하드 왕조는 패전과 탈환을 반복하며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를 재건했는데 이것은 로마 성벽의 외관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측면 탑은 성곽에서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벽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부하코 탑을 포함해 직사각형 형태의 탑 5기가 여전히 서쪽에 남아 있다. 남쪽에는 2개의 다변형 탑인 레돈다(Redonda) 탑과 데스모차다 탑이 있고, 동쪽에 보이는 포소스(Pozos) 탑은 성벽 위쪽 통로보다 30m나 높으며, 군사적인 성격을 강화한 일련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성벽 안쪽에는 무슬림이 지배하던 시대의 기념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는 16세기에 벨레타스(Veletas) 저택에 병합된 3개의 만(灣)을 가진 5랑(廊)의 저수조를 꼽을 수 있다. 비록 대부분의 기념물들이 분실되었지만[알카사르 유적은 1473년에 분할됨] 대로에서 이어진 좁은 거리가 구불구불 뻗어 있어 조그마한 광장으로 나오는가 하면, 어느 새 좁다란 골목길로 접어드는 거리의 패턴은 알모하드 왕조가 지배하던 무렵의 특징이 도시 계획에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파티오(patio)와 내부 정원의 수 또한 카세레스가 카스리로 불리던 시절에 이슬람 문화가 끼친 영향력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소 9세(Alfonso IX)는 무어 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도시를 1229년에 탈환했다. 14세기에 들어 알폰소 9세의 재이주 정책에 따라 많은 귀족들이 차츰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카세레스는 또 한 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1312년 이후 라이벌 귀족 가문 간의 권력 투쟁과 분열 등 일련의 사건들이 카세레스를 무대로 펼쳐지면서 몇 십 년 동안 도처에 산재한 요새화된 집들의 경관은 봉건 도시의 완벽한 예를 빚어냈다. 가장 오래된 영주의 요새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들로는 헤네랄라(Generala) 궁전, 시게냐스(Ciguenas) 부근의 집과 탑, 오반도-페레로(Ovando-Perero) 저택, 에스파데로스(Espaderos) 탑, ‘원숭이의 집’이라고도 하는 에스파데로-피사로(Espadero-Pizarro) 저택이 있다. 15세기와 16세기에 귀족의 자존심은 풍성하게 장식된 가문의 문장, 탑의 높이, 돌출 총안과 총안 설비로 표현되었다. 가톨릭 국왕들은 대부분 이를 허물었지만 소수 엄선된 영주의 바람을 존중하며 일부는 남겨 두었다[예를 들면 골피네스 데 아리바(Golfines de Arriba) 궁전, 시게냐스 궁전]. 좀 더 수수하고 낮은 방어 체계만이 도시의 정교한 돌집들을 궁전과 구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알다나(Aldana) 저택, 솔(Sol) 저택, 아길라(Aguila) 저택, 우요아(Ulloa) 저택, 카르바할(Carvajal) 저택 등]. 한편 ‘아메리카로 탐험을 떠났던 귀족과 상인’들이 돌아오자 새로운 궁전들이 건설되었다. 신흥 부자들이 세운 고도이(Godoy) 궁전, 코르테스(Cortes)가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이를 맞이했던 아즈텍(Aztec) 족의 손자를 위해 16세기 후반에 건설한 톨레도-목테수마(Toledo-Moctezuma) 등이다. 도시의 당대 구조물, 궁전, 교회, 수녀원과 기타 건축물에는 아주 다양한 스타일이 반영되어 있다. 이후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San Francisco Javier]의 예수회에 추가된 구조물(1755)들은 공통적인 패턴에 따라 개조된 도시 구성의 조화를 방해하지 않는다. |
첫댓글 유럽 전역이 몇 백년간 (800년) 이스람과 기독교의 전장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