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4년 파리 올림픽 400미터 경주에서 우승 테이프를 끊는 에릭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올림픽 금메달을 포기했던 청년. 이 이야기는 주일성수 예화로 많이 등장하지만 진작 그의 이름과 그의 생애에 대해선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은 에릭 리들( Eric Liddell) 그는 중국 선교사의 자녀로 1902년 중국 텬진에서 태어나 중국 선교사의 삶을 살다 4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불의 전차”로(1981) 영화화 되었던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당시 경기 중 꽃인 100m 달리기에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 출신 에릭 리들이 금메달을 안겨줄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그의 100m 기록은 9.7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기록은 1958년까지 무려 35년 동안 깨지지 않은 기록임)
그런데 공교롭게 100m 예선전이 주일에 잡혀 있었고 에릭의 “주일엔 뛰지 않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영국인들에겐 폭탄 선언과 같았다. 그의 자세가 조금도 변화될 기미가 없자 그에 대한 맹렬한 비난의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국을 저버린 배신자. 신앙을 핑계한 위선자. 편협한 신앙인 등등
상상 못한 비난이었지만 그는 이것에 요동할 자가 아니었다. 그의 결정은 오랜 고심 끝에, 혹 단순한 신앙의 감정으로 결정한 것이 아닌 그의 자연스런 믿음의 삶의 한 부분이요 그의 신앙관 이었기 대문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바로 이 일 후 일어났다.
100m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그가 400m 경기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400m 경기는 100m경기와 달리 또 다른 연습이 필요했다. 물론 에릭은 400m를 뛰어보긴 했지만 많이 연습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미 예선전에서 스위스의 임바흐는 48초로 세계 신기록을 깨뜨렸고 다음날 미국의 피치가 47.8로 또 다시 신기록을 뒤엎는 경이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예선전 기록이 불과 48.2에 불과 했던 에릭은 하나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출발 총소리와 함께 에릭은 무서운 속도로 선두로 질주했다. 아는 사람들은 생각했다. 400m를 뛸 줄 모르는 자라고, 그리고 피치가 서서히 접근해가자 곧바로 순위가 바꿔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에릭은 피치가 접근해 오자 더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그렇게 200미터 트랙을 돌았지만 그 때까지도 에릭이 우승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곧 선두가 바뀌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선두는 바뀌지 않았다. 50미터를 남겨놓고 피치가 피치를 올리며 에릭을 바짝 따라 붙었다. 그러자 에릭은 다시금 초인의 힘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에릭이 곧 심장이 터져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진작 쓰러진 사람은 에릭이 아니고 에릭을 좇던 임바흐였다.
47.6! 드디어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에릭이 우승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올림픽 400m 경기 중 가장 감동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에릭은 경기가 끝난 후 어떻게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무서운 속도로 질주 했냐 기자가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 200m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뛰었습니다.”
조국의 배신자는 순식간에 조국의 영웅으로 바뀌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바쁘고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수 없는 기념 행사와 초청에 그의 인기는 가는 곳마다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그에게 쏟아지는 명예와 인기를 실로 감당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에릭은 1년 후 고별 경기장에 섰다. 그가 중국 선교사로서의 길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별 자선 경기엔 무려 12000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표가 없어 돌아간 자도 부지기수였다. 에릭은 이에 보답이나 하듯 100m, 200m, 400m 모든 경기를 석권했다. 경기가 끝난 후 그의 고별사가 있었다.
“제 인생에 신조는 한가지 입니다.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은 또 잘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삶에 하나님이 원하셨던 할만한 가치 있는 일들에 대해 저는 잘 해야 할 가치를 두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육상에 대해선 저의 일은 여기까지 입니다.”
중국 선교사로 떠나는 그의 집 앞에는 마치 신혼 부부 결혼식처럼 온통 꽃으로 장식된 마차 한대가 서 있었다. 온통 희고 푸른 색종이와 꽃들로 뒤덮인 마차는 스코틀랜드인들의 그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애정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가 지나는 길은 수백명의 군중이 있었고 그가 떠나는 역은 환송나온 관중으로 꽉 차 있었다. 지금까지 현재까지 어느 선교사도 이같이 열광적이고 감동적인 환송을 받지 못했다. 이 특별한 환송 또한 에릭이 남긴 하나의 진기록이었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내전으로 선교 활동이 매우 위태롭고 긴박한 상황이었다.그러나 이것이 에릭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못했다. 영화 배우 부럽지 않은 인기와 보장된 부와 명예가 텬진을 향한 자신의 꿈과 소망에 비교할 수 없었다.
1929년 아버지 제임스가 정년으로 고국으로 돌아간 후 에릭은 의료 선교사로 활동중인 형과 함께 중국 선교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첫 안식년이 되어 고국에 왔을 때 그에 대한 스코틀랜드인들의 사랑과 인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미 7년 전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를 맞이하는 군중들이 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파리 올림픽의 영웅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1930년 내전 속에서 중국 선교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선교사 수가 줄었고 특히 농촌 지역은 거의 선교사들이 떠났다. 이 때 선교 본부에서 에릭이 샤오창이란 농촌 지역으로 가주길 요청했다.이곳은 전쟁과 가뭄으로 황폐해진 지역이었다. 그는 자신은 교사가 더 적성에 맞고 아직 언어가 부족해 선교 일선에서 뛰기를 망설였지만 그의 순종은 그를 놀랍게 변신시켰다. 샤오창으로 간 에릭은 중국인 신도 집에서 먹고 자며 끼니가 없으면 굶고 밤에는 거적만 덮고 자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면서 그는 신도들을 온 종일 찾아다니며 격려하고 성경 공부를 시켜주었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체력과 성령 충만함으로 북중국 대평원에 흩어진 그리스도인을 위해 봉사했다. 텬진에서 교사 생활 하던 모습에선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두번째 안식년을 맞아 고국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중년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있어 그는 언제나 자랑스런 그들의 아들이었다.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에게 있어 에릭은 영원한 올림픽 영웅이었다.
1940년 2차 대전이 본격화 되면서 중국의 선교 상황은 급박해졌다. 에릭을 사랑하는 동료들과 친구들은 스코틀랜드에 남아 전도 사업과 목회 활동 할 것을 강력히 권면했다. 그러나 에릭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텬진으로 돌아왔을 때 보이는 치열한 전쟁만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전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1년 샤오창 선교본부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 활동 정지를 당하고 선교사들은 쫒기다시피 선교지를 떠났다. 에릭도 텬진으로 철수했지만 역시 그곳은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에릭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당시 세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아내와 두 어린 딸을 먼저 카나다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자신은 남아서 상황을 더 보고자 하였다. 남아있는 선교사들을 뒤로 하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월, 늘 그랬던 것처럼 당분간의 이별로 생각했던 가족과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전세는 급박히 돌아갔다. 42년 초 상황은 완전히 돌변해 전 선교사들은 웨이신이란 곳에 수용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에릭은 그곳에서도 항상 유머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했고 사랑으로 어린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온갖 병균들로 노출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극심한 과로와 영양실조로 그의 머리엔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결국 45년 2월 24일 아무런 조치도 없는 상태에서 에릭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완전한 순종”이었다.
그의 죽음은 조국은 물론 전 세계로 알려졌다. 전 세계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애도했다. 영국에선 후원회가 즉각 모집돼 그의 자녀 교육과 매년 최우수 선수에게 지급되는 장학회가 세워졌다. 그의 일대기는 그 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고, 기념 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1981년 제작된 그의 영화는 흥행이 어려운 종교 영화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 세적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영국에서 청소년들은 두세번 관람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과 포클랜드 전쟁을 하던 아르헨티나에서 조차 수입하였고 흥행했다.
이는 그가 올림픽 영웅이었다는, 단지 주일에 뛰지 않았다는 것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남긴 아름다운 삶의 감동의 결실이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영광을 버린 채 주님 앞에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다 간 에릭.
에릭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들이 만난 사람 중 가장 그리스도께 가까운 사람이었다 고백한다. 심지어 그는 성인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에릭의 사랑과 관용 그리고 자기 절제 그의 새벽기도와 성경 읽기. 그에 삶에 철저했던 두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성경 읽기와 새벽 기도였다. 그는 이 두 원칙으로 자신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고 기적을 경험했다. 그는 새벽 기도 시간 매번 주님께 마음에 “진심으로 순종하겠습니다” 고백이 나오기 전 결코 눈을 뜨지 않았다.
“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은 또 잘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