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뒤틀린 인생>
파도와의 성 안토니오의 생애는 어쩌면 뒤틀린 인생입니다.
뒤틀린 인생이란 자기 생각과는 다르게 된 인생을 말하지요.
그렇다면 성 안토니오는 어떻게 인생이 뒤틀렸다는 것일까요?
그의 생애는 참으로 짧습니다.
36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으니 짧은 인생이라 할 수 있지요.
이 36년의 인생에서 자기 생각대로 또는 뜻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자기 생각대로 된 것은 한 가지 있습니다.
아오스딩 수도회 수도자에서 작은 형제회 수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형제회 수도자가 된 것이
이슬람에서 순교한 작은 형제들처럼 순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순교하기로 간 모로코에서 중병에 걸려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고향을 포르투갈을 향했지만 그러나 태풍을 만나 안토니오는 뜻하지 않게 이태리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작고 낮은 자로서 조용히 살고자 하였지만
이번에도 뜻하지 않게 사제 서품식 강론을 하게 되어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설교가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그는 또 뜻하지 않게 작은 형제회 안에서 신학자와 관구장이 됩니다.
30 대에 관구장이 되었으니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신학자가 되어 형제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란치스코가 허락한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 줄 알고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겠다고 하자
프란치스코는 이런 편지를 씁니다.
“나의 주교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편지를 씁니다.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사실 안토니오는 아오스딩 수도회에 있을 때 신학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그가 살고자 했던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남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신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드러나자
그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에 따라 신학을 가르치지요.
지혜서의 “나는 기도를 올려서 지혜를 받았고, 하느님께 간청하여 지혜의 정신을 얻었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지식은 하나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지식욕, 지적인 욕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세에서 돈과 명예를 얻으려는 욕심 때문에 지식을 쌓으려 할 수도 있지만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듯이 하느님처럼 모든 것을 알고픈 욕심 때문에 지식을 쌓으려고 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지혜는 다릅니다.
욕구가 아니고 깨달음이며,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는 무엇보다도 인격적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무신론자이고 그러하다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지요.
이것을 프란치스코의 표현으로 바꾸면
육의 영(정신)을 가진 사람은 지식을 얻으려고 하고
기도와 헌신의 영(정신)을 가진 사람은 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안토니오의 일생은 뒤틀린 인생입니다.
자기 뜻대로 된 것이 거의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뜻대로 된 것인데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뒤틀린 안토니오 인생이 그렇다면 불행한 인생이겠습니까?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살아있는 믿음>
어린 시절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왜소하게 보이지만 초등학교 때에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키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마라톤도 하고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합을 앞두고는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연습 후에는 찐빵과 만두가 준비되어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합에 ‘이겨라’ 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합 날 입고 간 팬티에는 어김없이 헝겊 한 조각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갓난아기 때 입었던 ‘저고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겨라’고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꼭 이길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었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소위 미신행위였다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기념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후
그 지상 삶의 여정과 죽음에까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그분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신 어머니의 마음,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일생을 봉헌하시고
아들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어머니의 위대함은
삶의 여정에 예기치 못한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살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날마다 순간마다 믿음이 살아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부모는 길 잃은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카2,48-50).
사실 요셉이 아버지인데 또 아버지가 따로 있다니 정말 뚱딴지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그 신비로운 진실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를 기다리며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순종의 생활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지금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찾아 헤맨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또한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어머니의 큰 품에서 아들은 커갔습니다.
루가복음 사가는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 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의 총애를 받았고
그분은 자라면서 사회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잡아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에 의해 어머니의 마음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일상 안에서도 마음속에 간직하여 되새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상충될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함에도 내 일의 성공과 업적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음속에 간직하여 되새기는' 시간을 꼭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 기쁨>
'성모 성심'은 '성모님의 사랑'을 뜻하는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모두 가리킵니다.
1)
성모님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실제로는 종이 아닌데도 종처럼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자신도 원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요구 조건도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뿐입니다.
성모님의 사랑과 정반대쪽에 이기적인 기복신앙이 있습니다.
현세적인 복을 빌기만 하는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은데, 기복신앙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어떤 복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에 섬깁니다.
청하는 것은 많은데 감사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뜻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이웃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습니다.
2)
성모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크면 고통도 비례해서 커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함께 가신(요한 19,25) 성모님의 고통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보다 더 컸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짐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어머니의 고통은 직접 겪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정말로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라는 예수님 말씀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따라야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나를 따르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당연히 따르게 되고, 함께 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말로만' 하지 말고, 성모님을 본받아서 '삶으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성모님 외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론 예수님을 사랑해서 따라간 사람들이지만,
성모님을 사랑해서, 또 성모님을 본받고 따르기 위해서, 성모님과 함께 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3)
성모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우리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루카 13,3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실 때 하신 말씀인데,
'어머니의 사랑'을 잘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사랑은 하나입니다.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랑.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었다가 찾았을 때 하신 말씀이지만,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대로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을 받는 일보다는 속세의 인생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성모님의 마음(사랑)은 '애타는 마음', 또는 '안타까움'입니다.
살 길을 외면하고 죽을 길로만 가는 자녀들을 보면서 어머니로서 애가 타는 마음이(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바로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때서야 자신의 불효를 후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후회'는 너무 늦은 뉘우침입니다.
효도를 하려고 해도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한 효도는, 즉 신앙생활을 제대로 충실하게 하는 것은
죽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 하면 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후회'는 지옥에 간 사람들이나 하는 일입니다(루카 13,28).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는데(마태 27,3),
그 다음에 자살했기 때문에 그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살하기 전부터 이미 지옥에 가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후회만 하고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은, 또는 회개하기를 거부한 뒤에 후회만 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안타까움(애타는 마음)'의 반대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을 때,
그 제자들은 일을 마친 뒤에 기뻐하면서 돌아왔고(루카 10,17),
그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셨습니다(루카 10,21).
바로 그런 '기쁨'입니다.
신앙인의 기쁨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이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요한 3,29).
"지금 나의 '삶'은 예수님과 성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인가?"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성모 성심(聖心) 예찬>
어제 예수 성심 예찬에 이어 오늘은 성모 성심 예찬입니다.
역시 아름답고 사랑스런 신심입니다.
정말 배워 닮고 싶은 성모 성심의 사랑이자 믿음입니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신심입니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요즘 가뭄이 심합니다.
곳곳에 뿌리가 얕은 풀들은 서서히 누렇게 시들어 죽어갑니다.
반면 뿌리가 깊고 넓게 퍼진 나무들은 독야청청합니다.
아, 믿음의 뿌리도 이러할 것입니다.
세상 온갖 시련과 풍파에도 뿌리 깊은 믿음의 사람들을 대하는 듯합니다.
아마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의 믿음도 이처럼 하느님 중심에 깊고 넓게 뿌리내렸을 것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보고 배웁니다.
머리로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삶을 통해 배웁니다.
얼마 전 호스피스센타에 책임자로 일하는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1년에 무려 암환자가 180명 죽어나간다는, 늘 죽음과 함께 사는 수녀입니다.
과연 준비된 죽음으로 아름다운 선종을 맞이하는 이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습니다.
"어쩌다 간혹입니다.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을 당합니다.
믿는 이들이 좀 나은 편입니다.
죽음에 대해선 아무도 자신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 역시 보고 배웁니다.
예전 시골 어른들은 죽음을 그렇게 낯설어 하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는 어른들만 해도 죽음을 대비해 수의를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했고, 자신의 묘자리도 점검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려서부터 늘 마을에서 죽음을 보고 배웠기에 옛 시골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며 유언도 남겼습니다.
이런 아름답고 준비된 죽음도 보고 배우는 것인데
이런 죽음의 체험과 단절되어 보고 배우지 못하니
지극히 낯설고 두렵고 무서운 죽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우리들은 교회 성인들을 통해 삶과 죽음을 배웁니다.
모전자전(母傳子傳)이라 아마 예수님 역시 마리아 성모님으로부터 고스란히 삶을, 믿음과 사랑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미치는 삶의 영향은 절대적입니다.
믿음과 사랑 역시 그대로 부모의 삶을 통해 배우며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아무나 지닐 수 있는 믿음이나 사랑이 아니요,
어려서부터 보고 배워야 하는 믿음이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직을 맡은 어느 분은 국회에서 열린 혁신위원회 첫 회의에서
'새정치연합에게 필요한 건 자멸적 안주가 아니라 창조적 파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대로 우리의 영적 삶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자멸적 안주가 아닌 창조적 파괴를 통한 영적 전투의 승리로 매일매일 새롭게 시작함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이런 믿음과 사랑으로 평생, 매일 새롭게 사셨던 성모성심을 기립니다.
첫째, 성모님은 '믿음과 인내'의 어머니였습니다.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에 순례했으니 이런 영적 습관 역시 항구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순례 중 예수 아드님을 잃어 버렸다 찾았을 때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복음 마지막 묘사처럼 성모님은 침묵중에 마음 깊이 담아 두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술도 때가 되어야 어둠속에서 발효되어 익듯이,
인내로 기다려야 때가 될 때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됩니다.
이래야 부패(腐敗) 인생이 아닌 아름답고 향기로운 발효(醱酵) 인생, 믿음의 인생입니다.
그러니 우선 필요한 게 인내요 기다림입니다.
어느 자매가 영적지도 중에 받았다는 조언도 생각납니다.
'순명하고 침묵하며 기도하라.'
순명, 침묵, 기도 역시 믿음의 삶에 필수적 요소임을 깨닫습니다.
마음 깊이 담아두고 때가 될 때까지 견뎌내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기다려 때가 되면 해결이 아닌 저절로 해소(解消)되는 문제는 얼마나 많은지요.
성모님은 과연 인내와 기다림으로 표현되는 믿음의 대가임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성모님은 '찬미와 감사'의 어머니였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터져나온, 수도자들이 매일 저녁기도 말미에 바치는 그 유명한 성모찬가 마니피캇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느님 향한 사랑은 이렇듯 찬미와 감사로 표현되기 마련이며, 이와 더불어 증진되는 사랑과 믿음의 내적 힘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고백은 그대로 하느님을 찬미할 때의 성모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말 그대로 성모님은 찬미와 감사, '알렐루야'와 '아멘'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니 누구든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때의 복된 체험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참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입니다.
이런 구절은 통째로 외워두는 게 좋습니다.
하느님 찬미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즐거움의 선물입니다.
마치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세상에 찬미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없습니다.
이런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가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성모님의 경우도 우리와 똑같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모성심을 예찬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
성자의 어머니를 기리는 저희가 주님의 충만한 은총에 감사하며,
끊임없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예수 성심과 마찬가지로 성모 성심, 곧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은 그분의 인격을 지칭하며,
성모님의 인격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으로 표현되는데,
오늘 복음에서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요시야 임금 시절부터 열세 살 이상의 모든 유다인은
민족의 고유 명절인 파스카 축제, 초막절, 오순절 등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해야 했는데,
순례를 하는 동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소년 예수가 남자 쪽에서, 요셉은 그가 여자 쪽에서 돌아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나자렛에 가까이 다다랐을 때에 부모는 소년 예수가 자기들과 함께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찾아다니다가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다시 상봉하였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일성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였습니다.
이에 대해 소년 예수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퉁명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전합니다.
이에 앞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에도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그 아기에 대하여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는데,
이때 다른 이들은 목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놀라워하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19)라고 루카 복음은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 줍니다.
마리아는 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을까요?
버릇이 나쁜 아들을 교육시키려고 기회를 보면서 마음에 고이 간직했을까요?
분명 아니지요!
조용히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자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사실 성모님은 일생 동안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조용한 삶, 숨겨진 삶을 사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 안에서 성모님께서 하신 역할은 이 사실을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 잔치에서 모두들 자기 일에 몰두하다 보니 잔치의 전체 흐름을 볼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술이 떨어진 사실도 모르고 있었지만,
성모님은 전체를 보고 계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들 예수님께 알려 주십니다.
성모님처럼 전체를 보려면 묵상과 관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앞만 바라보면서 내달리려는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고 되새기기 위하여
잠시 멈추어 서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여유와 관상의 시간이 절실한 요즈음입니다.
아울러 성모님에 대한 믿음과 신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상하도록 이끄는 요람이라는 사실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