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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을 넘기기 힘들겠습니다. 준비 하십시요."
대수럽잖게 배가 아프고 설사가 난다며 병원을 가야겠다던 아내는
그 길로 입원조치 되어 5일간의 치료를 받았으나 완쾌는 커녕
거의 죽은상태 로 부산 대학병원 중환자 실로 이송 되었다.
몇가지 검사와 상태를 살핀 의사는 내게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하였다. 준비하라고,,,
하루, 이틀 아내는 의식이 돌어오지 않고
하루 4번 있는 면회를 제외하곤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간혹 다른환자의 경우 간호사 가
"ㅇㅇ씨 보호자 분 계세요?" 하고 부르면
그 환자는 죽었다고 봐야한다.
초조하게 기다려지는 면회시간
아내의 몸을 닦아 줄려고 수건을 가지고 병실엘 가면
차마 눈뜨고 못볼 광경이 펼쳐진다.
양손과 발을 침대에 단단히 묶어 두었는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몸부림을 첬길래 묶인곳이 피로 엉켜 붙어있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큰처남 이 내게 할 얘기가 있단다.
죽고나면 장례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말이였다.
나는 평소, 인간이 한 세상을 살다 갈때는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꼬실라뿔것 같으면 메고가서 우리 집 뒷산에다 묻을것이여!" 처남들의 반대였다.
"그래,,, 다음에 내가 죽고나면 그때 ,,,,, "
간혹 면회시간에 들어가면 바쁜 간호사들이
환자의 용변 뒤처리를 하지못한 경우가 있다.
가지고 간 물수건으로 그 뒷처리를 하곤 할때도
내 아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정오 면회시간 병실로 들어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수 밖에 없었다.
입에 물려놓은 재갈을 얼마나 깨물었는지
앞니가 빠져 덜렁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그러고도 여전히 의식은 없고,,,,
나는 울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제발 이 고생 그만하고 이젠 편안한 곳으로 가라"고...
1998년 9월 13일 병원에 입원한지 한달이다.
아침 첫 면회 시간에 병실에 들어가니 아내가 눈을 뜨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워서 애 엄마를 부르니 이미 아내는 정상인이 아니였다.
의식은 깨어 났으나 실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또 긴 의식불명 상태로 빠지곤 했다.
간호사들 말에 의하면 간혹 깨어날 때면 내가 혹시 도움이 될까하고
침대 머리맡에 붙여 둔 가족사진을 보고 누구냐고 물으면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곤 자기는 처녀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회사는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 주었다.
보호자는 짧은 면회시간이 끝나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다.
근처에서 식사를 하며 다음 면회 시간을 기다리는 것 외엔,,,,
오후 4시 면회를 하고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갈 곳도 없고 또 7시 면회시간을 생각하면 어디 멀리 갈수 도 없다.
무작정 우산도 없이 병원을 나왔다.
아무 생각없이 걸어 내려간 나는 문득
남포동에 있는 대 ㅇ사 란 절(寺) 이 생각났다.
지금까지도 난 절을 할줄 모른다.
법당에 들어간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무작정 따라했다.
그리곤 아내를 낫게 해 달라고 빌었다.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그 잘난 사업합네 하고 아내를 들볶고 했던 일들이 떠올라
눈물을 참을수 없었다.
보호자는 오전 7시 에 있는 첫 면회 시간은 설랜다.
혹시 간밤에 무슨일(?)은 없었는지 ..하기사 있었다면 당연히 내게 연락이 왔을테지.
병상에 오래 누워있는 환자는 욕창으로 고생 하므로 몸을 자주 닦아주어야 한다.
두장의 물수건을 챙겨들고 중환자 실에 들어간 나는
아내의 정확한 초점의 눈길이 마주쳤다.
"정현엄마, 내가 누군지 알겠나?" 라는 물음에 재갈때문에 말을 할순 없었지만
대신 고개를 끄떡이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정현엄마, 이젠 살았다. 이젠 살았어." 아내를 끌어안고 울었다.
며칠뒤 중환자 실에서 일반병실 로 옮기는날 아내는 간호사 들에게
수고하시라는 인사를 했는데 정작 간호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들이였다.
나는 자주 문병 오시는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술을 조금 사오시라고....난 그날저녁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셨다.
아마 병원이 생긴이후 병원 뜰에서
나 처럼 많은 술을 마신 사람은 없을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걸까?
병원 뜰과 복도에서 휠체어를 탄 환자를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내도 빨리 휠체어를 탈 수 있어야 할텐데,,,
그때는 퇴원을 하더라도
평생 휠체어 신세를 못 면할 것이란 각오는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못 탄다는 아내를 억지로 휠체어에 앉히고 병원 뜰을 산책하고
뒤이어 목발을 짚고 혼자 걷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는 이미 만성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두번의 혈액투석을 하여야 했다.
괴 바이러스 감염, 대장염, 폐혈증, 그리고
의식불명 에 빠졌던 아내의 병은 만성 신부전증으로 끝이 났다.
그런데 퇴원날짜가 잡힌 상황 에서 검사를 자주 하였다.
그러고는 혈액투석 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담당 교수님 의 말씀이 있었다.
퇴원 일이 다가오자 아내는 말이 없어지고 심각한 고민을 하는것 같았다.
입원부터 지금 껏 곁에서 간병을 해오던 나는 불안했다.
그런데 아내는 스치는 말로 "가정주부 로 돌아가기 싫다."는 것이였다.
충격 이였다.
19세 의 어린나이 에 거친성격 의 나에게 시집와
처음으로 받아 본 나의 보살핌이 그토록 좋았을까?
예전의 그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몽같은 74일을 뒤로 하고 퇴원 해야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내는 피골이 상접했던 몸에 살이 오르고
예전의 모습을 되찼았다
나는 아내에게 "앞으론 당신 마음대로 하고 살아라." 고 불간섭을 천명했다.
흥이 많은 아내는 노래방으로 나이트를 하루가 멀다하고 다녔지만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좋은사람 있으면 앞으로 연애 도 해라."고 해 버렸다.
철없던 젊은시절 나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 적이 있었고
아내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하였다.
처음 나를 만날 때처럼 멋있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아내도 나처럼 고민 할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것은 한인간이
죽음 앞에서 사투를 벌이는 생생한 광경을 목격한 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경이로움을 어설프게나마 배웠고
배우자라고하여 속박하고 관리(?)한다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지금 우리 부부는 그 어느 때보다 신뢰한다.
그리고 서로가 "왜 이렇게 늦었냐? " 고 묻긴 하지만
그 질문의 순수성 엔 변함이 없다.
또 한가지 가 있다.
최소한 생을 마칠 때까지 부부싸움은 하지않을 것이다.
-마치면서-
이젠 모든 것이 끝이구나 했을 때 서울에 계시면서
부산대 병원을 주선 해주신 나의 큰 형님께 감사한 마음 엎드려 전하며
아내의 목숨을 살려준 의료진께 고맙다는 인사 올립니다.
무수히 절을 하며 아내를 살려만 준다면 꼭 데리고 와서 인사 올리겠다는 그약속은
그동안 바쁜(?) 나머지 2004년 구정에 아내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제가 즐겨하는 배드민턴 을 아내와 함께 같은 클럽에서 하고 있습니다.
회원님들 건강하세요.
■ 제가 가입하고 있는 카페에서 어느 회원님이 올리신 글이랍니다.
첫댓글 보름달 님. 잠시 님의 글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감명깊은 글이었구요. 그보다 먼저 요즘 보름달 님의 건강은 어떠시온지 묻고싶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카페에 들르시어 좋은글 많이많이 올려주시길... 그리고 꼭 건강 되찾으시길 두손모아 빌어 드립니다.
몸건강이 제일입니다,, 모든분들 건강챙기세요,,,
저의 건강도 많이 좋아 졌답니다 예전처럼 걷지는 못해도 저 혼자 자유로이 출입 할수있고 사지 멀정히니 그저 여러님들께 감사 드릴뿐이지요
건강하시다니...다행이내요..일요일날 뵐 수 있길 기다렸는데... 집안 일 땜에.. 여성 회원님들과 맛난거 드시고 힘내세요 ...맛난거 드시면 제가 찬조 쫌만 할께요 ^^::
고생 하셨읍니다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앞으론 좋은일만 생기실겁니다 보름달님 화이팅!!
게임의법칙님 부대찌개 잘 먹었습니다 건강히 돈 마니 버세요 감사 합니다
보름달 님. 언제 한번뵙고 싶습니다. 이다음 여성님들과 만날때는 꼭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