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 바지
나는 두메산골 집배원이다. 한여름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던 아침,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쏟아졌다. 방송에선 집중 호우가 우려되니 철저히 대비하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거센 장대비는 집배실 창문을 두드리며 끝없이 내렸다. 나는 이륜차 적재함에 가득 실은 우편물이 젖지 않도록 야무지게 비닐을 덮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는 집배실로 들어갔다. 뇌리를 스치는 기발한 발상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역시 나는 영리하다고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았다.
집배원이 비 오는 날 실실 웃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바지를 홀랑 벗고 팬티 위에 우의 바지를 입었다. 이만하면 전쟁터에 나가도 끄떡없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무겁게 입고 다니던 옷을 벗었다는 해방감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빗속을 헤집고 본업에 들어간 나는 고객의 소중한 우편물이 비에 젖지 않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귀밑까지 달려드는 비의 악다구니를 들으며 얄팍한 감상에 젖어 시상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 했던가. 변화무쌍한 여름 하늘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철석같이 믿은 일기 예보가 빗나가고 예상 밖의 일이 생기고 만 것이다.
태양이 갑자기 구름 밖으로 튀어나와 혓바닥을 배배 꼬며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비 맞는 불편은 차라리 행복한 고민이었다. 찌는 듯한 폭염에 바람이 전혀 안 통하는 고무 바지를 입고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녀야 했다. 온몸에 수천 마리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고 발등엔 땀이 흥건히 고였다. 차라리 팬티만 걸친 채 배달할까 생각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할 수 없었다.
푹푹 찌는 무더위와 사투를 벌이며 3시간 넘게 지옥 순회를 했다. 양지마을 노인 회관 앞에서 김 씨 할아버지를 만났다.
“엄 군, 비옷 바지 덥지 않은가?”
“아, 이건 사우나 바지예요.”
어떻게 그런 말이 쉽게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날 나는 잘난 사우나 바지 덕분에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월 감기에 걸려 무려 한 달 동안 고생했다.
엄환섭 님| 집배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