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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전쟁들
삿 1:27-36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삿 1:27-36 / [몰아내지 못한 사람들]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벧스안과 거기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 다아낙과 거기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 돌과 거기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이블르암과 거기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 므깃도와 거기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하여 가나안 사람들은 그 일대에서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 28)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힘이 점점 세어지자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다. 그렇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하였다. 29)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게셀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게셀에서도 가나안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파와 함께 살게 되었다. 30) 스불론 지파 사람들은 기드론과 나할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스불론 지파 사람들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 31) 아셀 지파 사람들은 악고와 시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또한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몰아내지 못하였다. 32) 아셀 지파 사람들은 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몰아내지 못한 까닭에 그들과 어울려 살았다. 33) 납달리 지파의 사람들은 벧세메스 사람들과 벧아낫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지역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벧세메스와 벧아낫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다. 34) 아모리 사람들은 단 지파를 산악지대로 밀어 붙여 평원지대로는 내려올 생각조차 못하게 하였다. 35) 그래서 아모리 사람은 헤레스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서 계속해서 살았지만 요셉 집안 사람들의 기세에 눌려 강제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36) 아모리 사람이 살던 지역은 아그랍빔 비탈부터 셀라를 거쳐 그 위쪽이었다.
믿음이 부족해서 정복하지 못한 성읍들이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27-33) 큰 성읍 벧엘을 정복한 요셉 가문이 그보다 작은 성읍들은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 족속이 결심하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가나안 일곱 민족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족속들이 이스라엘보다 많고 힘이 센 족속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신 7:1-2). 그러면서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온 애굽에서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신 7:17-18).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가나안 족속에게는 가나안 정복 전쟁이 일종의 제2의 홍수의 심판인 것입니다. 이 일에 이스라엘이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의 군대나 그 숫자와 무장을 보고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을 붙잡고 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 앞에 있는 이방 민족의 숫자와 그들의 무장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진멸은커녕 쫓아내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믿음 없음으로 인한 불순종은 결국 훗날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강할 때에는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노역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약해지면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34-36) 지금까지의 다른 지파들은 자신들이 분배 받은 땅에서 이방 민족을 다 쫓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땅에서 우월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지파는 오히려 아모리 족속으로 인하여 산지로 몰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분배 받은 땅이 아닌 가나안 땅 최북단의 라이스나 유다의 영역으로 이주해야만 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나가 싸우기만 하면 되는 전쟁에서 믿음이 없어서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땅은 훗날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해진 후에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적용: 성도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해지면 성도는 세상에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적 사탄을 물리치는데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이 무기는 우리에게 조금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공격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에게 명령을 해야만 합니다. 사탄의 한정된 공격을 저지하는 특효가 있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이 구절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성경구절을 반드시 믿고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것입니다.
< 설 교 >
축복 받을 그릇
사사기 1장 27-33절 / 정필도목사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구약성경의 열왕기하 4장을 보면, 한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된 여인이 남편이 죽고 난 후에 남겨진 많은 빚으로 인해 사랑하는 자녀를 종으로 채주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이 여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자기 집에 있는 것이라고는 기름 한 병밖에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에 엘리사 선지자가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다만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되도록 많이 빌려오라. 그리고 나서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 방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 차는 대로 옮겨놓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집에 돌아가자 마자 이웃에 나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빈 그릇을 모두 빌렸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 자신의 집에 남아있던 기름병을 들고 빈 그릇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빈그릇을 기름병 밑에 놓을 때마다 계속 기름병에서 기름이 흘러나왔습니다. 드디어 그릇마다 기름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아들 아이에게, 더 이상 남은 그릇이 없는지 빈 그릇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재촉했습니다. 이에 아들들이 이제 빈 그릇이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말이 떨어지자 마자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졸졸 흘러내리던 기름이 기름병에서 뚝 그쳐졌습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나아가 자신의 집에서 되어진 일들을 모두 말했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이 여인에게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두 아들과 생활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 사르밧 과부에게 행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크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작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권세와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모릅니다.
준비된 그릇만큼 채워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주고 싶어도 우리 자신이 그릇을 준비하지 못하면 더 이상 주실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릇이 준비되었다할지라도 너무 적은 것을 준비했다면 조금밖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그릇을 준비했는지 믿음의 그릇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가나안 땅을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허락하신 가나안 땅은?
1. 가나안 땅은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창세기 13:14-15절을 보면 좬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좭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창세기 26;2-3절에서 이삭에게 좬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좭고 말씀하셨으며, 창세기 28: 13-14절에서 야곱에게 좬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좭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실 축복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언제나 좬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좭을 믿으십시오.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를 위해 천지만물을 준비해주셨으며, 아브라함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살수 있도록 아브라함 때부터 가나안 땅을 미리 예비해주셨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40년을 머문 땅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양을 키울 수도 없는 메마른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기 위해 하늘양식인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를 준비해주셨습니다. 다만 하루하루 필요한 만나를 매일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내일 것까지 미리 준비했다가 벌레가 나고 썩어서 만나를 버려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람들은 오늘 먹을 양식으로 족하지 않고 한달 두 달 심지어 몇 년치씩 쌓아놓고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이 쌓아두면 마음이 든든한 것처럼 느껴지고,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조바심을 내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도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앞날에 대한 걱정이 없을 수 없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학생시절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빚만 잔득있었을 뿐 우리를 도와줄 일가친척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었던 저는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성전에 엎드려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우리 하나님께서 중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필요한 장학금을 모두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어떤 때는 택시회사 사장님이 저를 양아들로 삼겠다고하시며 학용품 일체와 장학금은 물론 중국집에 데려가 평소에는 먹어보지도 못한 비싼 음식을 대접받게 하셨습니다. 저는 항상 내일을 걱정하며 살았지만 언제나 모자람이 없이 채워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당장 내 손에 가진 것이 없다보니 늘 걱정하며 살았던 그 시절이 너무나 억울하고 후회됩니다.
여러분! 오늘 세끼 밥을 잘 드셨습니까?
몸이 건강하십니까? 그러시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외에 걱정할 문제들이 많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내일은 내일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가나안 땅을 준비해 놓으셨듯이 우리의 필요를 따라 이미 준비해놓고 계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염려하고 걱정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언제나 “하나님은 다 준비해 놓으셨다. 모자람이 없이 주신다.” 이런 믿음의 말을 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허락하셨으나 자기 몫을 받지 못한 지파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해 놓으셨지만 자기 몫을 다 받아누리지 못한 지파가 있습니다. 열두 지파중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스불론과 아셀과 납달리 지파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 땅에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을 멸하거나 쫓아내지 못하여 자기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힘이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려고 해도 결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태국에 가보니, 먹는 물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물에 석회질이 많이 섞여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달리 그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지 사람들은 집집마다 비가 오면 빗물이 지붕의 한쪽으로 모여 흘러내려오도록 되어 있었고, 땅에는 그 빗물을 받아 모을 큰 물통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물통에 물이 고이면 그 물을 가라앉혔다가 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놓고 바로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럴 경우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한방울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릇이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아주 적은 그릇을 준비했다면 그 그릇의 양만큼 받을 뿐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축복의 그릇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축복 받을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받을 축복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축복이 자신의 것을 받아 누리게 되나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언제나 예!(Yes)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언제나 아멘으로,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8-20절을 보면 좬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좭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대로 주시는 언제나 예!(Yes)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을 보면 좬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좭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움직이는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는 그 말씀을 믿는 자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 내게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은 오직 나의 믿음입니다.
여호수아 14장을 보면 갈렙이라는 사람의 믿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80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에게 좬여호와께서 가데스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좭라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갈렙은 이후에 믿음으로 그 땅을 쟁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믿은 갈렙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함께 하여주시므로 능력을 주셔서 헤브론 산지를 차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 없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승리할 수도 없으며 성공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이 부족한 지파들은 주어진 땅을 정복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곳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과 함께 살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함께 살게 되면 결국은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고 눈에 가시가 되어 망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축복을 주셔도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그 축복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믿음 없이 하는 일은 무엇을 해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뿐더러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 헤롯왕은 성전을 지어바쳤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보시고 기뻐하셨을까요? 믿음 없이 성전을 지어 바친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후 예수님의 예언대로 헤롯 성전은 돌 하나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은 ?
쥱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내 자신에게 힘이 없고, 또 환경적으로 어려워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변함없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약속을 신뢰하고 나아가면 반드시 역사가 일어납니다.
쥲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 생각하면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이런 생각을 하지만 우리가 성공하고 실패하고, 축복받고 축복을 받지 못하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믿음을 가지는 것만이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들에 가도 복을 받고 성읍에 가도 복을 받으며,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쥳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면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십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축복받는 그릇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고자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꿈과 소원을 가지고 사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꿈과 소원과 계획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축복을 예비하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 믿음 가지고 사업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업에 축복하십니다. 우리 학생들이 그 믿음 가지고 공부하면 성공합니다. 그 믿음 가지고 일생의 계획을 세워보세요! 반드시 우리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쥶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이는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 믿음이 복받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이 오늘 주신 말씀을 깊이 간직하시고 믿음으로 사셔서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축복을 다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험을 이기기
삿01장 27~36절 / 채규현목사
여기 앉은 많은 분들이 하나님 은혜 안에서 그동안 거룩한 신앙생활로, 또 헌신된 교회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신 줄 압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복된 신앙생활, 모든 은혜와 복들이 여러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야 됩니다. 이러한 면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승리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땅 전체를 정복하고 다니고, 승리했고, 땅을 차지했고, 그리고 그 땅을 전부 나눠서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한 세대도 못되어서 그들은 넘어집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이러한 면에 대해서 오늘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10대 청소년들을 상대로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10명씩 짝을 지어 각 방에 넣고 그 10명을 대상으로 하여, 챠트에 여러 가지 모양의 긴 줄을 3개 그어놓고 어느 것이 가장 긴 줄이냐를 택하게 한 실험입니다. 그런데 그 10명 중의 9명은 미리 짜서 제일 긴 줄을 택하지 말고 두 번째로 긴 줄을 택하라고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실험 대상은 나머지 한 사람입니다. 드디어 한 방에서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챠트가 걸려있고 그 중의 9명의 학생들이 먼저 두 번째로 긴 줄이 제일 긴 줄이라고 선택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실험대상인 그 학생은 “아니, 이게 웬일인가? 제일 긴 줄이 있는데 왜 다들 두 번째로 긴 줄을 택할까?” 하며 아주 혼란스러워하는데, 자기 차례가 됐을 때는 자기도 두 번째로 긴 줄을 택하더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실험에서 그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두 번째로 긴 줄을 택했는데, 그 다음 두 번째 챠트가 나와서 제일 긴 줄을 택하라 했을 때 9명의 학생들은 또 제일 긴 줄이 아닌 두 번째로 긴 줄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험 대상 학생이 첫 번째 실험에서 이미 두 번째로 긴 줄을 택했으면, 그 다음에는 두 번째로 긴 줄을 택할 때에 주저함이 없이 더 빨리 택하게 됩니다. 세 번째 실험에서는 더 빨라집니다. 아주 당연하게 두 번째로 긴 줄을 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 학생이 전체 실험대상의 75%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관계없이 전부 그런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주변의 무언의 압력에 따라 진실을 버리고 쉽게 동화되는 면이 인간 모두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면이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더 많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면이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그 다음 세대를 맞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한 문제입니다. 먼저 그 사람들이 어떠한 환경 속에 살게 되는지 그 삶의 배경들을 한 번 봅시다. 우선 첫째로 그들에겐 지도자가 없어졌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모세도 없고 또 광야에서 함께 생활했던 모든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미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갔을 때입니다. 그럴 때에, 물론 하나님의 명령은 있지요. “그 땅을 정복하라. 정복해서 내가 주겠다고 한 그 땅을 전부 차지하라.” 이 하나님의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행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나옵니다. 이러한 환경이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여러분들 다음 세대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직장에 가고, 이 사회에 나아가게 될 때에 과연 그들이 만나게 되는 환경이 어떤 환경이겠습니까? 믿음의 환경보다 오히려 믿지 않는 환경이 더 많습니다. 그들의 앞날은 불확실합니다. 그들의 앞날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 앞길에 대해 뭔가 지침을 받기 원하고,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할 때, 그들은 많은 경우에 부모에게는 묻지 않습니다. 대개 부모는 이미 그들과는 삶의 방식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같은 시대에 살지 않느냐 할지 모르지만, 자녀의 세대가 살고 있는 젊은이의 생활과, 이미 그 부모가 살았던 젊은이의 세대와는 엄청난 차이가 난단 말입니다. 그 차이를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부모들이 “나는 옛날에 이랬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자녀들이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여러분의 경험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안 듣습니다. 분명한 차이가 나니까요. 요즘 자녀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부모가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모와 상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봅니다. 과연 내가 누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면에서 주변의 친구들이나 다른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런 외부의 전혀 다른 환경에 대처할 만한 식견도 아직 없는 것 같고, 거기에 대한 경험도 없습니다. 스스로 연약하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새로운 세대들이 있습니다. 그 세대들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나가고 살 것인가,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할 것인가, 어떻게 내가 신앙적으로 바르게 설 것인가 이런 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험에 계속해서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대학 생활, 새로운 직장 생활, 새로운 신앙 생활 등 여러 가지 면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대개 처음 부딪히는 문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을 보니까 대개는 믿는 사람들 보다 안 믿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그 주변의 가나안 족속들이 엄청 많이 있었습니다. 말이 가나안 족속이지 실은 가나안 족속 안에 여러 가지 족속들이 있습니다. 여부스 족속, 히위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등 수많은 다양한 종족들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이스라엘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새로운 세대들이 이 세상에 나가 뿌리를 내리고 살려고 직장에 가고, 사업장에 가고, 대학에 갈 때에 그 주변에는 안 믿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까의 실험에서 보았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어쩔 수 없이 무언의 압력으로 받아들여서 똑같이 그 행동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10명의 학생 중에 9명이 진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할 때에 어쩔 수 없이 한 학생이 따라가는 것처럼, 수없이 많은 믿지 않는 젊은이들이 있을 때 그들의 삶을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믿는 사람들에게도 생길 경향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들에게 다른 강력한 보완 수단, 보충 수단이 없이 내어 버려두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봅시다. 처음에는 그들이 힘으로 가나안 백성들을 물리칠 능력이 없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19절 말씀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쫓아내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28절을 봅시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자, 처음에는 능력이 없어서 쫓아내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강성한 뒤에도 쫓아내지 아니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는 것도 보십시오. 27절부터 30절까지 보면 공통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 중에 산다고 계속 나옵니다. 29절 후반부에 보니까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다.” 고 나오고, 30절에서는 스불론 사람들도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고 나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죠.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 중에 거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변하는데, 31절부터 33절에 보면 주객이 완전히 바뀝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제 누가 주인입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주인이고, 그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객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 33절 후반부에도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강력한 반대의 수단이 없으면 이방 사람들이 하는 방법대로 점점 되어져 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힘이 없어 못하다가도 강성해 진 뒤에도 마침내 그들은 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그들 중에 섞여 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부도덕한- 하나님을 떠난 풍습을 따르게 되고, 드디어 그들의 바알 신을 섬기게 되면서 이제 완전히 가나안 사람들과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긴다고 2장 10절부터 계속해서 나옵니다. 점점 세상에 먹혀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여호수와 이후의 세대들-이 사는 배경을 이야기했고, 그들에게 어떤 강력한 수단이 없으면 역시 그들은 점점 그 주변의 삶에 빨려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역사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상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모든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수없이 많은 교회에서 점점 자녀들이 믿음에서 떠나갑니다. 수없이 많은 가정에서, 정말 열심히 믿는 믿음의 가정에서 그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강력한 어떤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것이 되었을 때 그들이 비로소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그들의 시험을 능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강력한 어떤 수단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아서 그것을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신명기 6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6절부터 봅시다. “오늘날 내게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자녀 교육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하니까, 오늘날 정통파 유대인들은 실제로 이마에 네모난 가죽 상자를 붙여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 말씀을 넣어서 띠로 매고 다닙니다. 손에 가죽 줄로 꿰어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그것을 명령한 것이 아니고, 그만큼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와 내 자녀들이, 나와 내 후손들이 항상 하나님 말씀 속에 깊이 빠져 있어서, 언제든지 이 세상의 다른 문화-믿지 않는 문화를 만날 때마다 그 말씀이 생각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히 그 말씀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들으면 “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해야겠다, 열심히 우리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읽게 해야겠다, 성경 말씀대로 가르치겠다.”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이상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말도 안 듣는 아이들을 억지로 데려다가 가정예배 드리고 그래서 습관을 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열심히 말씀을 암송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 장 씩 외울 때마다 여러분이 선물 하나씩 해 주는 것도 굉장히 좋은 교육 수단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여러분이 그들에게 산 교육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신앙 생활의 경험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사실은,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여러 믿지 않는 친구들과 부딪혀 괴로울 때 과연 부모님은 자기 나이에 어떻게 그것을 이겼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훈계는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은 엿보기를 원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중학교․고등학교 다닐 때 어떻게 신앙 생활을 했는가, 여러분이 대학을 다닐 때, 또 여러분이 사회 생활하면서 수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켰는가, 남자들은 특히 군대에 가서 신앙 생활의 고초와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되는데 우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믿음 생활 하셨다는데 어떻게 거기서 신앙을 지켰는지 궁금해합니다. 그것을 나눠보십시오. 대학에서 M.T를 가서 많은 학생들이 주변에서 술이나 여러 가지 세상적인 일들을 권할 때 그것을 버텨내기가 참 힘듭니다. 우리 부모님 대에는 이러한 일들이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직장에서 수없이 많은 회식자리를 다니면서 비성경적인 행동을 강요당할 때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 부모님이나 믿음의 선배님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궁금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의 경험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 나눌 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회개해야 됩니다. 매일 거기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을 하고, 야합을 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면 여러분이 나눌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자녀들에게 여러분의 삶을, 특히 신앙 생활의 삶을 나눠 보십시오. 여러분이 실패했던 일도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실패했으니 너는 절대 그 길로, 내 방식대로 하지 말아라.” 이러한 것도 나누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나누면서 그들이 이 세상을 살 때 능히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고 북돋아 주는 면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저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의 원론적인 면을 자꾸 훈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자녀를 가르칠 때에도, 자녀에게 정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기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지혜가 필요한데 물론 잠언서에서 채찍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녀를 매우 치라, 안 죽는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부모는 자식을 미워한다.”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여러분이 사랑하는 그 자녀들이 잘못 되었을 때에 매를 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점점 아이들이 커가서 상황판단이 되는 때에는 지혜로 그들을 다스리는 면이 필요합니다.
오늘 주보에 보면 좋은 말이 있는데 《지혜의 샘》을 한 번 보십시오. 〈영적 회계 감사를 실시하라〉는 제목인데 그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나는 지혜의 사람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또한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힘에서 지혜로 옮겨가야만 한다. 너무 오래 힘을 소유하고 있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를 심어준다. 심지어 자녀를 힘으로 지배하려는 부모는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적절한 때에 힘을 포기하고 지혜로운 인물이 된다면 유익하고 존경받게 된다. 물론 힘을 가졌을 때에는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이 생기겠지만, 지혜를 가지게 되면 우리는 상담자가 된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문한다. 나는 힘의 사람으로부터 지혜의 사람이 되는 데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에는 힘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겠지만 점점 그 자녀들이 자라날 때(여러분은 나이가 들 것 아닙니까?) 이제는 점점 여러분의 지혜로 그들에게 상담자가 되어줄 수 있는 과정으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자녀 교육뿐만이 아닙니다. 이 신명기 6장의 말씀은 여러분의 자녀 교육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룩하게 사는 삶이, 또 옳게 지혜롭게 거룩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 생활하는 그 모든 삶이 그 다음 세대에 옳게 가르쳐지고, 전해지고, 함께 나누는 삶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일차적으로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야 되고, 그 다음 교회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한 세대의 지혜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야 됩니다. 한 세대의 하나님을 믿었던 거룩한 그 열심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넘깁니까? 넘기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나이가 듦에 따라서 지혜의 삶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필요합니다. 힘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모든 일을 맡고, 쥐고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그러한 일을 해 왔다면 우리 교회는 20년 동안 그대로 늙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수많은 믿음의 용사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너무나 본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거룩한 삶이, 여러분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열심을 내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 복된 삶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똑같은 생활을 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놀라운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러한 삶이 여러분 세대에 끝나면 되겠습니까? 그 다음 세대도 여러분과 똑같이 그러한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러려면 먼저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놓아야 합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놓아야 합니다. “놓고 나면 우리는 뭐하나?”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다음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의 삶입니다. 자녀들도 교육할 때 자꾸 해 보게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녀들 대신해서 걸어줄 수 있습니까? 자녀들 대신 운전해 줄 수 있습니까? 자녀들 대신 대학 시험 봐 줄 수 있습니까? 그들이 직접 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여러분의 위치는 지혜의 조언을 해주는 상담 역할입니다.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안에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것도 실제로 그 다음 세대 사람들이 운전대를 잡을 수 있도록 해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수십 년 간 여러분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면 그 다음 세대로 어떻게 넘어갑니까? 여러분이 받고 있는 축복을 그 다음 세대는 어떻게 받게 되는냐는 겁니다. 한 세대의 축복이 그 세대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 세대에도 여러분이 누렸던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말로 가르치는 것도 있지만, 그들에게 실제로 하나 둘 행함이 있게 하여서 그 실제로 하는 행동 속에서 그들이 배울 수 있는 면도 있고, 그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순간 순간에 여러분이 조언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있는 동안에, 여러분에게 힘이 있는 동안에 이루어져야지 여러분 세대가 지나고 나면 그들이 어떻게 배웁니까? 여러분만 일을 했기 때문에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여러분처럼 복된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다음 세대와 삶을 나누고 그들에게 힘으로 교육하던 데서 지혜로 교육하는 것으로 바뀌듯이, 교회도 여러분이 모든 일을 관장하고 주관하고 일을 하는 것에서 그것을 다음 세대에 주고, 그 다음 옆에서 지켜봐주고 기도해 주고 지혜의 상담자가 되어 주는 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점차적으로 되어질 때에 우리는 사사 시대의 사람들처럼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승리하던 삶이 사사 시대에 와서 완전히 단절되는 그러한 삶, 타산지석입니다.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 교회는 그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현재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번 스스로 답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혜의 사람이 되십시오.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서 그 여러분의 힘을 다시 이어받아서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 세대도 여러분이 받은 축복처럼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그 세대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더욱 하나님 은혜가 넘치는 교회로 계속 이어져 갈 줄 믿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교회 모든 가정마다, 우리 교회 모든 조직마다, 우리 교회 전체에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이 부은 사람
삿01장 27~36 / 채규현목사
지난 시간 우리는 유다와 에브라임(남쪽을 대표하는 유다, 북쪽을 대표하는 요셉), 이 두 지파들이 승리하는 장면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지파도 사실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갈리는데, 27절에 “므낫세와 에브라임…”하면서 족속이 나오고 다른 지파들도 나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안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하나님의 법 안에서 산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삶입니다. 거기에는 이중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의 경계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도 보면 경계가 나오죠.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가 실제 누리는 곳은 우리가 밟는 곳만 누린다고 하셨습니다. 발로 밟는다는 것은 열심히 전쟁을 해서 빼앗는다는 것이고, 그 속에서 빼앗은 만큼 우리가 누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그 땅에서 모든 땅을 제대로 차지한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순종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있는 그대로 다 누리게 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백성들은 점점 더 그렇지 못한 과정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처음 뜨거웠던 신앙, 처음 감격했던 신앙, 처음 하나님께 회개했던 그 대목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약해지고, 타협하고, 더 이상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도 같이 누리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가나안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러한 면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는 그 면을 한번 봅시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혼동해서 쓰는 말이 “쫓는다”는 말과 “좇는다”는 말이 있는데, “좇는다”는 말은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쫓는다”는 말은 발로 차서 쫓아낸다는 말입니다. 27절에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도시들을 자세히 보면-성지순례를 가보면 지금도 남아있는 그 도시들의 유적을 볼 수 있는데요, 여기가 대부분 요새들입니다. 중요한 교통로, 길목을 지키고 있는 요새들입니다. 벧스안이라는 곳도 그렇고, 므깃도도 그렇고 중요한 길목입니다. 그래서 그 곳은 아주 튼튼한 요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싸우기 힘들죠. 그 사람들을 쫓아내기는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처음에 쫓아내지 못한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습니다. 먼저 그 관련된 구절을 한번 보고 이야기합시다. 출애굽기 23장 33절에 보면,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이야기하신 이유는 무조건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시고 이방 족속은 사랑하지 않아서 “무조건 너희들은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고, 함께 섞여 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물들까 하노라” 하신 것입니다. 먹물을 갈다 보면 먹물이 튀게 되어 있고, 우리 말 중에도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하듯이, 이런 내용으로 이야기 할 수 있겠죠. 잘못하면 그들에게 물들어서 하나님을 경배하던 데에서 떠나서 그들의 신을 경배할까봐, 바로 이런 면에서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괜히 올무가 될까봐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쫓아내라고 하실 때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능력을 주시는데, 그 앞절 29절, 30절에 보면 그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는 것도 점진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바로 한번에 쫓아내지는 않고, 점진적으로 쫓아내겠다는 것입니다. 다 주시는 것 아닙니다. 천천히, 천천히 주시겠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도, 우리에게 있는 축복도 천천히, 천천히…. 그런데 “천천히”라고 해서 우리가 쉬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쫓아내려고 노력할 때에, 계속 밀어서 계속 전쟁하고 그들을 쫓아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서서히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들이 충분히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지 않아서 다 쫓아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죠? 처음에 우리가 변하려고 노력해도 단번에 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점차적으로 변하는데 처음에는 잘 안됩니다. 잘 안 되지만 계속해서 노력하면 나중에 점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또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성해 집니다. 그 뒤에 28절을 보니까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처음에는 능력이 없이 못 쫓아냈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쫓아내지 않았다고 의지의 부족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은 거예요. 강성한 이후에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그 결과 므깃도에 있는 사람들도 살아남고, 벧스안에 있는 사람들도 살아나고, 다아낙이나 돌이나 이블르암이나 이런 곳의 사람들이 다 살아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올무가 되어서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나중에 그들의 생활도 보면, 여기 의도적으로 배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어떻게 사는가 29절에서 봅시다.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자,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 중에 거하였다고 이야기하면 누가 다수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수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가나안 사람들이 거하였더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뒤에 30절에도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32절을 보십시오.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여기서부터는 주객이 바뀌죠? 이제 가나안 사람들이 주가 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수가 되기 시작합니다. 33절에도 보면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34절에 가서 보면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 틈바구니에 끼지도 못합니다.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단지파는 처음부터 자기가 심지 뽑아 얻은 땅에 들어가지도 못해요. 그리고 쫓겨납니다. 자, 의도적으로 이렇게 배치되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능력이 없어서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능력이 생겨도 안 합니다. 처음에는 차지했는데, 차지할 때 조금씩 살려두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다른 지파들은 점점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 속에 묻혀 살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만족하고 그냥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 만족을 합니까? 나름대로 스스로 합리화 시킵니다. “이 정도면 됐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땅을 가져봤습니까? 언제나 이동했지 땅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차지하는데, 어느 정도 자기들이 차지하고 나서 보니까 그 다음에는 계속해서 차지하려니까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저들의 저항 속에서 지치고 힘든 거예요. 그러니까 “아휴, 우리가 할 수 없나보다.” 주저앉기 시작하고 포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더 큰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에게 있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인 줄 모릅니다. 하나님 뜻에 어느 정도 거역하고 있는 것인지, 그 진정한 의미를, 그 죄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반역하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동인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이 “아이고, 내가 연약하여서….”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는 다는 것의 참된 의미, 그것의 더러움과 추악함의 깊이, 이것을 바로 느껴야만 합니다.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에요. 많은 분들이 처음에 예수님 믿고 변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한 뒤에는 변화하기를 스스로 멈춥니다. “이 정도면 됐겠지.”하면서요. 더 이상 안 변하는 부분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무리 흔들어도 변할 생각 안 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변하지 않겠다는 그 마음은 고래 힘줄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믿고 나서 처음에는 물론 변화하려고 했지만, 어느 정도 변한 뒤에는 안 변해도 10년, 20년 아무 일 없이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이 정도면 됐구나.”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모든 출발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옵니다. 긴박성이 없어져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마지막의 심판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의 더러움이나 죄를 볼 수 있는 능력조차 없어집니다. “내가 뭐 어떻다는 거야?”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그 깊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한번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봅시다. 에덴동산에서의 죄악이 뭡니까? 결국, 열매하나 따 먹은 거 아니에요? 사실, 혹시 너무 우문이 될까봐 괜히 웃을까봐 질문을 못하는데 마음속에 다 한번씩 이 질문을 했을 겁니다. “그거 열매하나 따 먹었다고 온 인류를 죽이나?” 저는 그런 생각 해봤어요. 요즘처럼 뭐 금가루를 뿌린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대단한 열매라고요. 그런데 그것은 아담이 한 행동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의 선악과, 절대로 따먹지 말았어야 할 부분, 그리고 따먹지 말아야 될 것을 따 먹었을 때의 아담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나,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해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전에 성경공부 할 때 바로 이런 문제가 나왔어요.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덴동산은 너무 멀어요. 에덴동산 안에 있었던 일들은 우리가 이해 못하는 면도 많고 우리의 실생활과 연결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생활과 연결이 되는 면을 찾아보았습니다. 그게 요셉의 경우에요.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려가죠? 그런데 거기서 마침 아주 권세 있는 경호실장 보디발 장군 집에 팔려가죠. 거기에도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숨은 손길이 있습니다. 거기서 은혜를 입어 온 집안의 집사가 됩니다. 호텔로 말하자면 일종의 총지배인이 된 거예요. 하여튼 보디발 장군이 모든 것을 다 맡겼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것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창세기 39장), 아내만 제외하고요. 보디발 장군의 아내는 건드리면 안 돼요. 그것을 제가 “요셉의 선악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와 보디발 장군과 요셉의 관계가 너무나 비슷해요. 에덴동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원래 누구 거예요? 하나님 것이죠. 하나님 것이지만 아담에게 모든 권한을 주십니다. 아담은 거기서 왕적 존재로 나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안에서 왕적 존재라니까요. 이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이것은 먹지 말라. 이것은 건들지 말라.” 그렇다면 건들지 않은 이것이야말로, 내가 모든 것을 다 통치하지만 내 위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시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요셉도 모든 것을 자기가 다 관장을 하지만 바로 보디발 장군의 아내는 건들지 않는 것, 이렇게 하는 한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 성경공부 때 제가 물어봤었어요. “당신이 만약 요셉이라면 그 장군의 부인을 건드리겠습니까?” 그랬더니 아무도 절대로 안 건드리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건들겠어요? 만약에 건들게 된다면 무슨 마음으로 건들까요? 더 이상 주인이 안중에 없을 때 건들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부인을 건든다는 것은 주인을 정면으로 대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됐을 때에 결국은 모든 특권도 잃어버리고,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온갖 고초를 겪게 되다가 심지어는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한 못 건드리는데, 건드리는 그 날은 완전한 반역의 마음이 있을 때에만 건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이, 그 마음이 아니면 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삶을 옥죄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명령들은 다시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형상이 다 어두워져 있는데, 그것을 다시 회복하고 원래 하나님이 주신 그 축복 가운데 살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나의 하나님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명령이 임할 때마다 답답해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이 나를 억누르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볼 때마다 왜 답답하게 느끼느냐면, 하나님에 대해서 “왜 이렇게 나를 구속할까?” 특히 구약말씀을 볼 때면 대개 그렇게 느낍니다. 사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안식을 위해서 주신 명령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고깝게 생각합니다. 무겁게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안 지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안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안 지키려고 하는 행위가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알아야 됩니다. 사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절대로 범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나 쉽게 죄를 짓습니다. 매일 매일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죄가 뭡니까? 한번 여러분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예수님 믿을 때는 내 죄, 여러 잘못들을 생각하면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회개합니다. 그런데 점점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면, 교회 사람들은 대충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하루해를 지나고 나서 하루를 돌이켜볼 때 죄가 생각나던가요? 보통 생각이 안 납니다. 죄가 생각이 안 나요. ‘내가 오늘 사람을 죽였나, 간음을 했나, 도둑질을 했나?’ 생각이 안 나요. 그러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다리 뻗고 자거든요. 그게 과연 옳은가, 그걸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한번 죄에 대해서 같이 봅시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5절까지 봅시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요즘에 소위 기독교 상담학이라는 이름으로 뭘 이야기하느냐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니까 먼저 자기사랑이 있어야 남도 사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고 해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자기 스스로 긍지를 갖는 것) 교만하며 훼방하며(꼭 끼어들어서 싸움을 만드는 사람들) 부모를 거역하며-부모를 거역하는 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감사치 아니하며-여러분,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도 수많은 성도들의 헌신과 노력을 통해서 제대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면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아직도 여러분 마음속에 “이놈~”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과연 있습니까?-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사나운 사람들, 회개하십시오-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또 이것 말고도 요한계시록에 가서 보면 정말 많이 걸릴 수 있는 말이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엄청난 죄들과 함께 껴 있는 죄목이 “거짓말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계속 나와요. 바로 이러한 면에서 여러분의 삶을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 걸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얘기한 이런 것 중에서 걸리는 것은 대부분 죄라고 생각 안 해요. “이정도야 뭐 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자긍하며 교만하며 돈을 사랑하며…, 세상에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 합리화를 시킵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하고 똑같다니까요. 합리화를 시킬 때 더 이상 변화하기를 거부하고 내 스스로 합리화가 나름대로 될 때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거역하고 배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그대로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냥 “내가 나약해서….” 이게 아닙니다. 정면으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죄의 원 헬라어 “하마르티아 (hamartia)”라는 말이 원래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말이라서, 하나님 뜻대로 명중하려 하다가 옆으로 조금 가는 것, 이게 죄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죄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고 거역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아까 읽었을 때 죄의 내용들이 뭐가 있었습니까?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들입니다. 그 안에 있는 내용대로 해도 감옥에 안 갑니다. 그 내용대로 할 때 감옥에 다 보낸다면, 전부 다 감옥 속에 들어가서 감옥 지킬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각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말세에 고통 받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 변해요. 여러분의 삶에,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 변화되지 않는 나의 잘못된 습성-거짓말하는 습성, 교만한 습성, 조급한 습성, 돈을 사랑하는 습성, 이런 습성들을 하나님 앞에 내놓으면서 회개하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에이, 그것은 누구나 있는 일이야.”해놓고 그 다음에 “살인했나? 안 했지, 간음했나? 안 했지, 도둑질했나? 안 했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산다니까요. 정말 우리가 현재 아직도 변하지 않는 죄들은 그냥 두고요. 바로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되고 그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내가 또 어쩌다 한번 거짓말을 했으면 입을 치기라도 해서 다시는 그렇게 안 하려고 자꾸 노력을 하고, 또 교만한 태도를 한번 보였으면 돌아서서 다시 한번 주님 앞에 회개하고 ‘내가 또 이랬구나.’생각하고 돌이키려는 노력을 하나님 앞에서 계속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애석하게도 그러한 노력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대개 언제 일어나느냐, 예수님 믿고 처음에 얼마 동안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그 이후에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시간만 가요. 마치 여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더 이상 가려고 안 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사람들을 이름 붙여서 “간이 부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간이 몸 밖으로 튀어 나온 사람들이요. 아까 말세에 되어지는 일들 읽었지 않습니까? 이게 하나님 앞에 분명히 심각한 죄 인데도 멀쩡하게 그냥 사니까 이게 얼마나 간이 부은 사람들입니까? 바로 이 면을 여러분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 양심의 카메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기록한다고 했는데, 거기서도 내 죄를 정확하게 알고 그 심각함을 알 때에 그 양심 카메라가 나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죄에 대한 심각함을 알지 못할 때에는 아무리 필름이 돌아가도 구분이 안 돼요. 내가 현재 어떠한 죄악 중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정말 겸손함이에요. 낮아짐이에요. 낮아질 때 비로소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는 이 행동이 저 사람에게 어떻게 비쳐지는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의 진정한 의미에 눈이 떠지는 겁니다. 이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면에서 한번 보십시오. 아까 읽은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5절까지 다시 보시고 내가 어디에 속했나 보시고,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죄악들을 한번 쭉 찾아보십시오. 내가 어느 면에서 문제가 있는가요. 많은 경우에 거기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대충 지나가서 좋을 일이 아닙니다. 요즘에 그런 말이 있더라구요. “그까이것 뭐 대충~” 이렇게 얘기하던데,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사는 것 같아요.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하면서도 대충 살아요. 끝까지 점점 더 하나님 은혜 앞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요. 바로 올해 1년 동안에 여러분이 제자훈련하고, 기초양육훈련하고, 이런 모든 훈련들을 통해서 죄를 죄로 알 수 있는 민감함, 죄에 대한 민감함이 여러분에게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간단히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합시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성해졌습니다. 강성해졌는데 그 가나안 백성들을 쫓아내지 않잖아요? 그냥 노예로만 부립니다. 쫓아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합니다. 사실, 자기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자기들이 대단한 성공을 하고 있습니다. 강성해졌으니까, 마음대로 가나안 사람들을 부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 대단한 성공을 한 가운데 스스로 만족하고 사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들은 앞으로 당할 죄악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일이 잘 될 때-돈도 많이 벌리고, 직장도 견고하고, 가정도 평안하고, 아이들도 말 잘 듣고, 이런 모든 일이 다 잘 될 때 여러분, 다시 한번 깨어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가보다.’ 그것만 생각하지, 내가 그 안에서 하나님 뜻대로 온전히 행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겸비하는 그것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잘 되고 있어요. 나는 성공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속의 죄악은 이미 뿌리를 내리고 점점 더 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악은 마치 암과 같아요. 암은 처음에 안 느껴집니다. 이미 느낄 때에는 많은 경우에 때는 늦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복으로 문제없이 산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끝까지 내 자신의 그 면을 보지 아니하면, 은근히 마음 깊이에서부터 죄악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납니다. 처음에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고 열매로 나옵니다. 그래서 암도 조기 발견해야 하듯이, 그래서 정기검진이 필요하잖아요? 우리 믿는 백성들에게는 이 시간이 정기검진 시간이에요. 다시 한번 내 속을 들여다보고, 내 삶 가운데, 내 생각 가운데, 내 마음 가운데 ‘괜찮겠지, 뭐.’ 이러면서 그냥 죄악 중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은혜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현재의 성공이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내가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 이것을 바로 볼 수 있는 복된 우리 성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종은 반쪽짜리가 없다
사사기1장 22-36절
남쪽을 기업으로 받은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에 이어 북쪽을 주목합니다.
요셉 족속의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그리고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 등입니다.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이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자라는 불명예를 얻습니다.
1. 요셉 족속의 정복 전쟁과 미진(未盡) (삿1:22-29절)
22.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약속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언제나 그 말씀대로 이루십니다. 요셉 가문도 그 약속을 따라 순종할 때 놀라운 승리를 보게 됩니다. 루스라고 불리던 벧엘을 순적(順適)하게 정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셉 가문의 정탐꾼들이 벧엘을 정탐하고자 합니다. 이때 정탐꾼들은 마침 벧엘에서 나오는 한 사람에게 붙잡아 성읍의 비밀통로를 알려주기를 청합니다. 그 사람이 성읍을 들어갈 비밀통로를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그 땅은 처음부터 요셉 가문을 위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입니다. 정탐꾼들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당연히 받을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이들은 마치 자신의 것인양 선심(善心)을 씁니다. 비밀통로를 가르쳐 준 사람들을 선대할 것을 약속하고 또 살려서 보냅니다. 이것은 정탐꾼들에게 주어진 권한의 범위를 벗어난 일입니다(22-25절).
-요셉 가문 사람들은 벧엘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순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모든’ 주권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의 고백은 끝까지 지키지 못합니다.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보다 인간적인 정(情)과 선심(善心)을 곁들입니다. 그래서 비밀통로를 가르쳐준 루스 사람과 그의 족속들을 살려서 내보냅니다. 우리 신자의 많은 실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웁니다.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끼리 좋으면 된다고 생각해보립니다. 누이좋고 매부 좋으면 다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기가 막히게 합리화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이런 절반짜리 순종의 결과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6절,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곳의 이름이 되니라.” 루스 사람들이 다시 그들의 성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의 경내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리고 거룩해야 할 이스라엘의 기업에서 그들의 우상을 섬김으로, 악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두고두고 화근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당한 반응은 ‘절대 순종’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말로 합리화시킨다 한들 하나님께서 속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기까지는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응답하셨으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절대적인 순종이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혹 내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한 일은 없는지? 혹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여 외식하는 것은 아닌지? 혹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사람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를 시시때때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충의 순종은 결코 순종이 아님을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같은 예로 요셉 족속의 두 지파 므낫세와 에브라임도 동일한 과정을 겪습니다.
이들은 얼마간 가나안 족속들의 땅을 쳐서 빼앗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가나안 족속들을 자신의 기업 안에 그대로 존치 시킵니다. 쫓아내고 진멸해야 할 대상을 쫓아내지도 진멸하지도 못한 채 함께 삽니다. 이것은 결코 수적인 열세나 군대의 약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임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27-29절).
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북쪽을 기업으로 받은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할 충분한 힘을 가졌을 때에도 그들을 진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서 진멸하기보다 오히려 자기를 위해 가까운 곁에 둡니다. 같이 살면서 그들의 도움을 얻는 것을 더 좋게 여깁니다. 성경은 이들에 대해 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불순종과 불신앙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30-36절).
적용과 결단 (삿1:22-36)
사람은 자기 필요를 우선으로 생각하면서 살 때 얻어 누리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린 채 그 즐거움 때문에 돌이켜야 할 때 돌이키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행복이 함께할 것을 항상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가 조만간 만나게 될 인생의 종착점에는 자신이 끝내 바라던 행복이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심판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되면 세상적인 즐거움은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따라 살 때, 날마다 경험하는 기적들 때문입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수없이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참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들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전율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 즐거움을 경험하고 아는 신자는 짧은 시간 누리는 쾌락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바라보고 사는 즐거움으로 삽니다. 그런 나와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 요셉 가문의 두 지파가 행한 실패의 원인을 묵상해봅시다. 온전하지 못한 순종, 즉 불순종인 상태에 있는 일들이 있으면 서로 말해봅시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함께 나누어 봅시다.
2. 북쪽 지파들의 정복 전쟁에 있어 나타난 실패는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그들이 불순종과 불신앙의 사람이라도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나는 어떤지 말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