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대신이 다이묘 카츠라 모리미에게 시바 가문의 첩자가 들어왔다면서 그를 잡아들였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용의자를 은밀하게 묻어버렸다.
카츠라 모리미는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지 내부에서 신망있고 똑똑한 자들을 선발하여 의회를 만들기로 했다. 이는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내부에서 충격적인 변혁으로 다가왔다. 이를 계기로 무사 계급이 혈통만을 내세워 중앙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무사들은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오우치식 의회에 진출해 버렸지만.
의회의 첫 안건은 방계인 카츠라 가문의 약점인 정통성을 메우기 위한 조처였다. 다행히 의원들은 이를 재깍재깍 승낙해줬다.
한편 영주는 명나라와 조선의 대포를 어찌어찌 본따 일본식 대포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나라를 부술만한 위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오우치국은 공격적 이념을 차근차근 발전시켜 나갔다. 육상 전투로 인한 위신의 상승. 이는 전투 한번에 다이묘의 위상을 크게 상승시켜줄 것이다. 가뜩이나 위신이 낮아 동네 아이들에게도 돌을 맞는 다이묘에게는 상황 반전의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오우치국을 야인여진과의 전쟁에 패키지로 끼워넣었다. 그런데 출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도 전역에 혜성이 출몰했다. 이는 모두를 떨게 만들었다. 야인여진과 일본과의 싸움이 안좋게 흘러가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흘러넘쳤다.
카츠라 가문은 그러거나 말거나 내정에나 치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막부는 일전에 점령했던 연해주 북부를 기반으로 실컷 만주 벌판을 누비고 있었다. 일본에 기병이 많지 않을텐데 신통했다.
결국 혜성출몰의 불길함을 딛고 승리를 이루어낸 일본이었다. 물론 오우치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순간이기도 했지만.
1529년.
카츠라 모리미는 일본이 막 원정을 끝낸 점을 역이용하여 시바 가문을 정벌하기로 했다.
전쟁은 너무나도 쉬웠다. 사타케 가문이 합세해봐야 오우치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 슬금슬금 영토를 넓혀가는 오우치. 하지만 막부는 그런 오우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아이누 원정에 끌어들였다. 물론 오우치 쪽에서는 "점령지의 치안이 위태로워서-"로 시작되는 온갖 변명으로 군 파병을 면했다.
점령이 끝난 뒤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에치젠과 우젠에 직할 행정체계를 심는, 행정과의 전쟁이었다.
아이누 점령은 핑계고 조선과 싸우는 일본군. 하지만 양군 모두 정면에서 붙지는 않고 서로를 슬금슬금 피해다니는 눈치였다. 하기사,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다이묘 카츠라 모리미는 자신의 아내인 아야의 친구가 병사들에게 뛰어난 규율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두말할 것 없이 그를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원정대가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접함에 따라 각국의 지도를 접할 수 있었다. 다이묘는 일단 일본 열도만 아시카가 놈들에게서 뺏어오면... 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편 아이누와의 전쟁에서 일본군이 살짝 밀리는 눈치가 보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아이누를 병합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로 인해 한동안 오우치가 영토 확장을 못했다는 것. 그들은 일본 정부에 대한 반감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1537년.
실익없는 전쟁에 또 끌려가기 전에 이번에는 도쿠가와 가문과의 전쟁에 돌입하기로 했다.
전쟁은 너무나도 싱거웠다. 미카와는 물론, 동맹국인 다테 가문의 영지인 리쿠젠 지역까지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일본 열도의 거의 50%에 달하는 지역이 오우치의 손에 들어왔다.
이 시점에 들어와서 일본과 오우치는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는 형세였다. 일본은 오우치를 말 더럽게 안 듣고 남의 영토를 불법으로 점거하려고 하는 불한당으로, 오우치는 일본을 자신들의 직계를 끊어버리고 실익없는 전쟁을 핑계로 통일을 못하게 만드는 원흉들로.
그런데도 일본이 또 야인여진과의 전쟁에 자신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뭐하는 짓거리인지 오우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전쟁이 어케 지속되는 눈치였고 오우치는 그냥 팔짱끼고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정토진종을 믿는 일본 사람들이 늘어났다. 다이묘는 이와미 지역의 자치도가 급증하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반란이 터지기 시작하면 안되므로 일단 정토진종을 후원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 모리미가 죽고 아들 모리미가 즉위했다. 아들은 행정능력이 부족했지만 뛰어난 외교적, 군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장래가 기대되었다.
호르친과 야인여진과의 싸움에서는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다. 카츠라 모리미는 일본 정부가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했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을 너무 과신해서 그런걸까? 그들은 부라티야에게도 전쟁을 걸어버렸다. 그로 인해 그들의 상국인 명나라까지 참전하였다. 명군은 오우치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자신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병력동원력, 보급능력, 해상장악능력 등을 본 카츠라 가문은 명나라에 대한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숨겨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저들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리라.
한편 도호쿠 인들은 오우치국을 지지하였다.
전쟁은 나날이 갈수록 일본에게 불리해져만 갔다.
육군 동원능력에 비해 해군이 빈약한 오우치로서는 해군 개혁이 절실하였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해군 개혁을 통해 수상에서의 우위를 확립하기로 했다.
결국 부라티야-일본 전쟁은 일본의 완패로 막을 내렸다. 종속국인 야인여진은 영토 대부분은 부라티야와 해서여진에게 양도해야만 하였다. 일본 정부로서는 대망신을 당한 셈이다.
남의 위기는 자신의 기회인 터. 카츠라 모리미는 당장 시모츠케로 출전하기로 했다.
그 사이 일본은 아이누를 합병시켰다. 이로써 일본은 사할린까지 진출, 일전의 패배를 어느정도 만회했다.
일본군이 개입하면 골치아파오기 때문에 오우치로서는 우츠노미야 군을 빨리 전멸시킬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저들이 규큐 남부를 분탕질한다면 더더욱.
그렇게 정리를 한 끝에, 오우치는 시모츠케와 무츠 지역까지 영토를 늘렸다.
거기에 때맞춰 잇코잇기 소동이 막을 내렸다. 그들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주는 대가로 그들을 귀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일본정부는 지바 가문을 흡수합병하였다. 이제 일본과 오우치간에 완충지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남은 것은 둘간의 실력다툼 뿐이었다. 열도 내에서 두 세력이 동시에 존재하기에는 곤란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첫댓글 과연 승자는...
당연히 우리가 되었으면 하겠는데...
의회제도라니..차라리 그냥 귀족계층이 있는게 훨 나은데 말이지요(사무라이 없는 일본이라니..)
나중에 부패도 10받고 갈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