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속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전쟁을 하려는 오우치. 하지만 여기서 채권을 더 발행할 경우 또 빚내서 빚갚는 과거의 악몽을 되풀이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부패도가 올라가는 것을 감수하고 금 함유량을 낮춘 화폐를 발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카츠라 모리미와 정부 고관들은 천지신명께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독립을 위해 좋은 장군이 떨어지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자신을 히로나카 요시나가라고 소개한 사람이 꿈에 오우치 가문의 영령들의 명을 받고 찾아왔다면서 자신의 등에 새겨진 문양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오우치 가문의 문장이었고, 다이묘 카츠라 모리미는 이 자가 조상들의 명을 받고 자신들에게 찾아온게 아닌가 여겨 그를 즉석에서 장군으로 채용했다.
1549년.
드디어 오우치 국은 종주국인 일본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일본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조상이 저 비열한 아시카가 놈들에게 할복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저들의 이익만을 위한 전쟁에 끌려다녀야 했다! 이제 이런 일들을 모두 갚아야만 한다! 모두 깃발을 들어라! 칼을 뽑아들어라! 위선자로 가득 찬 아시카가 놈들을 열도에서 수장시키는 것이다!"
신이 내린 재능을 가진 장군 히로나카 요시나가가 이끄는 최정예병이 세츠에서 정부의 부대를 전멸시켰다.
이요와 세츠를 정벌하고 교토를 포위할 즈음, 유럽에서 인쇄술 시대관이 나왔다. 물론 내전중인 일본에게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미노에서 또 막부군과 오우치군이 싸웠다. 이번에도 승자는 오우치 쪽이었다. 이 싸움으로 막부는 주력 부대를 전부 상실했다.
거듭된 패배로 다급해진 일본이 평화 협정을 내밀었지만, 종속관계를 유지하는데다 겨우 세츠 지역만 내놓겠다는 등의 현실성 없는 내용에 다이묘는 그 국서를 친히 베어버렸고 사신을 쫓아냈다.
한편 탐험 이념을 전부 개방시킨 오우치는 무역 조정에서 이득을 얻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는 것을 기념하는 듯이, 카츠라 모리미는 자신을 왕으로 자청하고 왕국에 걸맞는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수년간의 전쟁 끝에 일본은 오우치를 독립시키고 이요, 단고, 세츠, 야마토, 이세지역을 양도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오우치의 위대한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점령지의 개발도가 워낙 높은 관계로 교토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우치는 바로 일본을 경쟁국으로 지정하였다. 이제 두 나라는 서로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관계에 놓였다.
한편 의회에서는 새로운 총리를 임명하기로 했다. 그는 외교적 평판을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청렴하여 남들보다 절반의 월급만 받고도 성실하게 일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1554년, 카츠라 모리미는 "내가 곧 국가다!"로 시작되는 연설과 함께 관할하는 직할령 내의 주를 늘리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는 한편, 다이묘는 병력 5천을 새로이 징병해서 대만으로 보냈다. 이제 오우치도 독립국으로서 섰고, 또한 옛 백제의 부활을 표방했으니 그들처럼 해외 영토 확보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일만도 했다.
군대가 도착하자 일단 대만 북쪽의 켈랑 일대를 개척하기로 하였다. 이는 지금은 안되어도 먼 미래에는 명나라를 향한 이중전선이 될 것이다.
한편 각고의 훈련 끝에 카츠라 모리미의 사격 능력이 향상되었다.
카츠라 모리미. 그는 오우치국을 독립시키고 대만 개척에 앞장선 위대한 군주였지만 자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을 양자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독립에 큰 공헌을 한 신장이 죽고 말았다. 그는 애통하면서도 다음을 대비하기로 했다.
한편 의회에서는 새로운 안건으로 육군 유지비와 소모를 줄이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몇년에 걸친 긴축재정끝에 오우치는 그토록 자신들을 괴롭히던 채권에서 해방되었다. 그 날 카츠라 모리미는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1563년. 일세를 풍미한 명군 카츠라 모리미가 죽었다. 그의 양자는 나이가 어려 그의 양어머니가 섭정을 진행해야만 했다.
새로이 미다그 지역을 개척하던 도중 본국에서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이쪽으로 집단 이주하는 추세가 늘어났다. 섭정 태후는 돈을 들여서라도 빠른 확장을 추구했다.
한편 이 시기 명나라에서는 황금기가 발동되었다.
그리고 1565년.
섭정 태후는 일본을 상대로 2차 전쟁에 돌입했다. 목표는 쿄토와 미노지방 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엣추 지역에서 일본의 주력 병력이 오우치군에게 완전히 토멸당했다.
비록 해전에서는 오우치군이 대패를 당했지만, 이와는 별도로 육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일본과의 전쟁은 별도로 대만 남부에 새로운 개척을 지시하기도 했다.
리쿠젠 전역은 일본의 기세를 결정적으로 꺾어놓는 대전이 되었다. 1만이 넘는 일본군은 전멸당했다.
그리고 평화 협정에서 오우치는 쿄토와 미노, 카이, 스루가, 사가미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제 오우치는 확실한 열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몇년에 걸쳐 이들 지방을 잘 다스리기 위해 행정관료들을 파견하여 새로이 체계를 다잡기로 했다. 특히 교토같은 경우 기존의 공가들을 어떻게 달래느냐가 문제였다.
오랜 기간동안 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한 후쿠하라 노리유키가 세상을 떠났다.
수송선이 없는 상황에서 주력군이 도호쿠 지역에 포위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 탐험, 발견했지만 오랫동안 모종의 이유로 손을 놓고 있었던 동쪽의 동토에 사람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탐험가를 위시한 탐험대는 동쪽 땅을 정확히 탐사할 것이다.
그리고 별도로 탐험선들을 꾸려 태평양 일대를 탐사하게 했다.
1573년, 치바 타마 태후는 1년 뒤 카츠라 노리유키에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인수인계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몇년 후, 정식으로 취임한 다이묘 카츠라 노리유키는 벚꽃축제를 즐긴 뒤, 감히 자신에게 반항하는 왕위 요구자를 토벌하기로 했다.
한편 무역망이 넓어지면서 남쪽과 서쪽에서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과 조우하는 일이 많아졌다. 정부는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주려고 했다.
첫댓글 이제 일본 통일이 눈앞...
근데 통일하고도 문제는 산적해있으니... 당장 vs조선도 있고 말입니다.
결국 콘솔을 쓰셨쿤요..
아시카가 일본 참칭+할복 강요로 빡쳐서 썼고 맛들이니 계속 쓰게 되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