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종교개혁이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것에 꽂히는 이유가 뭘까요? 종교 개혁은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위한 '교회 내부 운동'이었다는 뜻입니다.
웬열? 기독교가 구교와 신교로 통칭 되는 것조차 불만이었던 필자에게 리포메이션은 새삼스러운 것입니다. 광릉수목원 길 국도가 막히는 것이 만추의 끝자락이락도 잡고 싶은 수컷들의 행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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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만에 찾은 '여울목'은 첫사랑처럼 나를 반겨 주었고 작정을 하고 적토마를 깊숙이 매어 두었어요. K 푸드가 오늘날 몸값이 높아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맛 하나는 세계 최강'이라고 봅니다. 간장게장 25,000원이나 등심 30,000원은 맛 대비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닙니다. 삼원 가든 88.000(160g) 마저 서비스 대비 고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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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당시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정치와 서방교회의 '면죄부 판매', '연옥에 대한 교황권' 주장, 그리고 '공로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하여 다섯 솔라로 요약되는 교리를 주장합니다. 부패한 교황 제도 중심의 교회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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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부착 이전에도 이미 서방교회 내부에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윌리엄 틴들, 사보나롤라, 웨셀 간스포트와 같은 선구자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가들의 신학운동이 있었습니다. 교회 개혁은 중세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의 영향을 받았어요. 인문주의자들의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원문으로 해석하고 오직 성경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의 기록, 성경의 권위를 16세기 서방교회의 모든 제도인 교황과 교회 직제, 교회 전통보다 더 높은 권위에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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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 개혁의 요인
16세기 서방교회의 '종교개혁'은 서방교회의 누적된 문제들인 10세기부터 서방교회 내 창부 정치, 정치세력의 꼭두각시 교황, 메디치 가문과 타 가문 정치의 장이 된 교회, 권력자로서 교황과 일부 성직자들의 도덕적 해이 만연, 라틴계 민족과 게르만계 민족 차별, 차별적 세금 부과, 이탈리아 통일의 정치적 활용, 로마의 대형 성당 건설을 위한 면죄부 판매 등까지 교회 내 권력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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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동은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개혁자들의 복음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양심과 지성에 뿌리를 둔 서방교회 개혁 운동이었어요. 서방교회 개혁 반대파인 교황 중심주의자들과 대립한 마르틴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옳지 못한 것을 보고 분노를 느끼는 단순한 정의감이 아닌, '교황 중심주의'적 서방교회의 초야권을 행사한 영주에게 발부하는 면죄부까지도 포함하는 문제점들을 성경적으로 반박하며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기에 이르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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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6세기의 신앙 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런 조짐을 보였습니다. 수도원 운동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자 시도하고, 방탕한 생활을 지탄하며 금욕적 생활을 추구했어요. 잘못된 서방교회의 제도인 교황권에 대한 개혁을 위해 위클리프, 롤라드, 얀 후스, 틴데일과 같은 많은 선구자들의 순교가 있었어요. 종교개혁의 여러 배경들은 3가지로 설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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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덕적 요인
서방교회가 베드로 대성당 건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파는 장사가 루터의 반발을 가져왔습니다. 성직 매매뿐 아니라 일부 성직자들 가운데 12세기 라테란 공의회 이후 신부의 독신 의무를 올바르게 지키지 않고 연인을 두는 도덕적 해이가 나타났어요. 서방교회 개혁의 바람이 불던 16세기 교황들은 공공연하게 제도를 비웃으며 군림하였고, 16세기 교황들인 율리오 2세는 밀회와 동성애를, 그레고리오 13세는 사생아를, 바오로 3세는 연인 관계를, 레오 10세와 율리오 3세는 동성애를, 그 밑의 주교와 사제들의 일부 가운데에도 도덕적으로 온전한 생활을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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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어요.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몽골 제국의 서진과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 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 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등장한 신학자 오컴의 윌리엄의 사상과 같은 다양한 사상의 등장은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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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로마 제국에 오스만제국의 침략으로 당시 교회의 전통을 보전하던 동방교회 지역에서 기독교 신학과 헬라 철학을 기록한 다양한 헬라어 사본을 그나마 안전한 기독교 지역이었던 서방교회로 학자들이 이주하며 옮겼습니다. 이외에도 비잔틴 지역의 혼란을 틈타 서적 사업가들이 수백 권의 헬라어 필사본들을 서유럽 지역으로 가지고 와서 판매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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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헬라 사상과 초기 기독교 헬라어 문헌들의 대규모 등장은 헬라 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서유럽인들은 인문주의와 새로운 유럽 문화를 조망하였습니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 열연 헬라어로 작성된 바울 등의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인 쏙 사도들의 기록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교의를 세워 교회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교부들의 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줍니다. 중세의 지식사회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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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회적 요인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겼어요.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의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했어요. 로마교회의 레오 10세의 지나친 사치와 유지를 위해 교황청이 부과한 조공의 상승은 라틴족과 게르만족에게 부담을 주었으며, 특히 게르만족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교황청의 권위의 남용을 루터가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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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개혁가들의 신학 사상은 다섯 솔라(Five Solas)
(1)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경에 있다는 뜻, 다시 말해, 성경만이 그리스도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서 밖에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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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에서 억조창생의 죗값을 다 받고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덧입는 것뿐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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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써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총을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행위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교리는 인간의 신앙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이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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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솔라 피대(Sola Fide, 오직 믿음)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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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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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사제의 독신 제도가 후계자로 인한 부패의 개연성을 제도적으로 막으려는데 있었다는 걸 가만 하면, 오늘 날 개신교 대형교회들의 후계 되물림은 어떤 식으로든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2024.11.10.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