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스님은 오늘부터 4일간 베트남 불교 중앙승가위원회 초청으로 호찌민을 방문하여 현지 스님과 재가자를 위해 법문을 합니다.
어젯밤 인천 공항에서 9시 25분 비행기를 타고 새벽 1시 30분에 베트남에 도착했습니다. 이른 새벽시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입국 센터에는 다양한 국가의 관광객들로 붐볐습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수하물을 찾은 후 밖으로 나오니 베트남 정토회원들이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왔어요?”
“스님, 어서 오세요. 멀리서 오셔서 피곤하시겠어요. 얼른 숙소로 가세요.”
스님은 회원들이 준비한 차량을 타고 바로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호찌민 모둠장 조숙연 님이 남편이 한국으로 출장 간 사이 자신의 집을 스님 일행의 숙소로 제공했습니다. 한 시간가량 이동해 숙소에 도착하자 회원들은 스님께 삼배로 인사했습니다.
“빈 집인 줄 알고 승낙한 건데, 남의 가정집인 줄 알았으면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웃음) 집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원들은 스님이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곧 자리를 피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곧 있을 일정들을 점검하고, 다음 일정까지 세 시간 정도 남아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곧 해가 떠올랐습니다.
스님과 일행은 새벽 6시에 공양을 마치고, 6시 30분에 법사양성대학원(CHUA HOA KHANH)으로 향했습니다.
베트남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의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오토바이가 많은 구간에서는 차량도 오토바이 속도에 맞춰 평균 40km 속도로 운행했습니다. 덕분에 오토바이와 차가 같은 도로를 달리면서도 서로 조화롭게 다니고 있었습니다.
30분이면 갈 거리였지만 아침 출근 시간이라 도로가 막혀 1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법사 양성 대학원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베트남 스님들이 법륜스님을 환영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법문을 하기 전에 법사양성대학 원장 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법문을 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의 베트남 방문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 법사님들을 교육하는 대학원에 오셔서 법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의 베트남 방문이 좋은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각 사원 방문 일정도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랍니다. 베트남과 한국 불교의 관계가 더욱 발전하고 깊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우리 승려들도 서로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웃음) 지난가을에 상가협회 회장 스님이 한국에 방문하셔서 그 길을 열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주로 어떤 내용을 배우나요?”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교리, 강의 기술,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웁니다. 베트남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 이곳에 진학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석사나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곳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각자 소속했던 강원이나 불교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재검토하고, 오해하거나 수정해야 할 부분을 지적해 주기도 하며, 강의 시 말투나 표정 같은 교습법도 가르칩니다. 1991년에 개교해 현재 3년제로 운영 중이며, 13학번까지 1,200여 명의 법사님이 졸업했습니다.”
“한 학년에 몇 명이나 되나요?”
“고급반과 중급반으로 나뉘며, 각 반에 200여 명입니다.”
“이곳에 오는 이들은 모두 승려인가요?”
“네, 각 절에서 오고 있습니다.”
“베트남 젊은이들이 불교에 관심이 많은가요?”
“네, 10년 전보다 2, 3배 젊은 불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올해 불자들 대상으로 진행할 여름학교에는 약 7천여 명이 등록했습니다. 젊은이들의 관심이 많고, 베트남 중앙 승가회에서도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커리큘럼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원장 스님과 대화를 나누며 베트남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법회 시간이 되어 종, 향, 꽃을 든 비구 스님들이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법회 장소로 향했습니다.
법회 장소에 도착하니 비구, 비구니 스님 약 120여 명이 강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의식을 한 후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원래 저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제가 다니는 학교 옆에 절이 하나 있었고 그곳에서 저의 은사 스님을 만나면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제가 살던 경주는 많은 불교 유적이 있기 때문에, 저는 중학생 시절부터 불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절에 들어가서 살면서는 실망스러운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절에서 배우는 불교가 합리적이고 실천적이지 못하고 굉장히 관념적이고 불합리한 요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불교가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또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이자 선불교이기 때문에 사상적 깊이는 있을지 몰라도 어떤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는 힘은 약했습니다. 절에서 스님들이 주로 하는 일이 사람이 죽었을 때 천도해 주는 일이나 사람들에게 축원해 주는 일, 의식을 진행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과학자가 되려고 했던 저는 이것으로 만족되지 않았고 ‘부처님은 정말 어떤 분이고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일생을 다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다시 공부해 보니 부처님은 정말 삶이 혁명적으로 바뀐 분이었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지위인 왕자로 태어났으면서도 그것을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계급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셨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음에도 비구니들의 출가를 허용하셨습니다. 그분은 막연한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 현실 속에서 높은 인격을 닦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롭게 발심을 해서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 현실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실천하였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법, 무아, 무상이라는 가르침은 어떤 과학보다도 더욱 과학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기후위기 시대에 사람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연기법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600년 전의 가르침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미래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예전과는 다르게 보통 사람도 대부분 교육을 많이 받는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글도 제대로 모르고 아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 식으로 불교를 가르치는 것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사회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제라면 모르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할 법사라면 그들보다 더 많은 지식과 인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법사가 되려면, 첫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여러 학문에 대해서도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중들의 요구에 맞게 법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사는 다섯 가지 분야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주의 역사와 물질의 근원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인공지능이라던지 사물 인터넷이라던지 이런 것들이 더 발전된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생명의 역사와 생명의 원리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셋째, 인류문화의 시작과 인류문화사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넷째, 자기 나라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 인간의 정신작용에 대하여 정신의학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많은 정신적인 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심리적인 불안증이나 우울증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법을 널리 전하려면 대중들과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더라도 베트남어를 모르면 여러분과 대화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부처님 법이 좋아도 그것을 대중들에게 널리 전하려면 대중들이 안고 있는 고민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대중들의 법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내용을 꼭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법사 교육생들이 현장에서 전법을 하고 교화를 하면서 나타난 많은 문제나 고민들을 질문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법사교육생들의 다양한 질문에도 답했지만 반대로 법사교육생들에게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근본불교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무상’이라고 합니다. 대승불교의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이라고 하는데 서로 모순되지 않나요? 설명해 보세요.”
“근본불교에서는 나라고 할만한 실체는 없다고 ’ 무아 ‘라고 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 불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요?”
법사교육생들이 손을 들고 설명을 했습니다.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불교대학원에서 점심 공양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에서 오후 두 시부터 법사단 회의를 하고, 다음 법회 장소인 홍법사(Hoang Phap)로 이동했습니다. 이동 중 스님은 차 안에서 유수 스님과 부탄 일정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번 부탄 답사 일정에는 기술자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과수, 임업, 농업 등을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과 집안일 동선을 편리하게 개선할 수 있는 인테리어 감각이 있는 사람도 필요해요. 우리 거사 중에 다방면으로 잘 아는 분들이 있나요? 전기, 목공, 시설 등을 조금씩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다양한 전문 분야 사람들을 모두 데려가려면 인원이 너무 많아져 고민이에요.”
유수 스님도 스님의 말을 경청하며 의견을 나눴습니다.
부탄 일정을 논의하던 중 홍법사에 도착했습니다. 홍법사는 지난해 5월 베트남 방문 때도 들렀던 곳으로, 1959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10만 명의 재가 신자와 300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대규모 사원입니다. 사이공과 주변 지역 학생 및 아이들을 대상으로 여름 수련회, 학생 수련회 등을 열고 매년 6천에서 7천 명의 많은 청년 불교도를 양성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홍법사(Hoang Phap)에 도착하자 주지 스님인 틱 탐 트룽(Thich Thanh Trong)이 스님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스님.”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던 중 법회 시간이 되어 자리를 옮겼습니다. 종, 촛불, 꽃을 든 스님들을 따라 법회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법회 장소에는 1층과 2층에 재가 신자 1,500여 명이 모였고, 3층 강당에서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법회가 생중계되어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건물을 가득 메웠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지난번에 이곳 홍법사를 방문하여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불교 포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청년들을 위한 포교가 많이 이루어지는 것은 더 고무적이었습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베트남 중앙상가위원회 회장님을 뵙고 한국에 초대를 했고, 그때 중앙상가협회 큰스님들도 함께 한국을 방문하면서 교류를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 보답으로 저도 이곳에 와서 다시 여러분과 만나서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목표로 불교를 공부하고 있나요?
부처님 가르침의 목적은 인간이 괴로움 없이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 즉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근심 걱정이 사라져 버린 해탈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열반과 해탈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열반이라는 말은 요즘 우리가 쓰는 말로 하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탈이라는 말은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앞에 ‘진정한’이라는 말을 붙였을까요? 우리는 행복이라고 하면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곧 기분 나쁨으로 떨어지는 불행이 됩니다. 그 즐거움은 영원하지 않고 나중에 괴로움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렇게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를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다시는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즐거움이 열반이 아니고, 즐거움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러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어디서부터 올까요? 그 뿌리는 욕망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에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됩니다. 그런데 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즐거울 일도 괴로울 일도 사라집니다. 그것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
어떻게 하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욕망을 따라가면 윤회에 빠지게 됩니다. 욕망을 억제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욕망을 따라가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을 억제해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붓다가 발견한 제3의 길, 새로운 길은 욕망이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만 알아차린다’, ‘다만 지켜본다’, ‘사실대로 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을 ‘중도’라고 말합니다. 욕망을 따라가는 것을 쾌락주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을 고행주의,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고 다만 알아차리는 제3의 길이 중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명상이나 염불을 할 때는 집중해서 다만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늘은 먼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께 전해드렸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괴로움이 없는 삶, 자유로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고, 미래에는 더욱더 필요하게 될 가르침입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일을 하러 나갈 때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 올라온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염불을 할 때 잡념이 많은데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일이나 공부를 시작할 때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옵니다
“저는 일을 하러 가거나 공부를 시작하려 할 때 항상 부정적인 마음에 부딪힙니다. 어떻게 하면 일도 공부도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날 때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겠다’ 하고 알람을 맞추어 놓고 시간이 되어서 벨이 울리면, 누워서 벨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이렇게 자꾸 생각은 하는데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는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마음은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일어나기 싫은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어나야 하는데...’ 하는 말을 다섯 번 반복해 보세요. 그건 일어나기 싫다는 뜻이에요. 본질은 일어나기 싫다는 것인데 일어나고 싶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본질을 봐야 해요.
일어나기 싫다는 것이 진짜 마음이라면 그냥 자면 됩니다. 그러면 지각해서 손해를 보게 되겠죠. 이처럼 하고 싶은 대로 욕망을 따르면 손실이 생깁니다. 그러니 일어나기 싫다면 손실을 감수하면 됩니다. 손실을 감수하기 싫다면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일어나기 싫은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겠죠.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냥 일어나면 됩니다. 이것을 선(禪)에서는 ‘그냥 일어난다’ 이렇게 말합니다. 한문으로는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표현합니다.
‘일어나야지’ 하지 말고 그냥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일어나야지’, ‘가야지’, ‘해야지’ 이렇게 늘 결심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결심하지 말고 그냥 하고 그냥 가야 합니다. ‘일어나기 싫다’ 하는 것이 본질이라고 꿰뚫어 알았다면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냥 자서 손해를 보든지, 둘째, 손해를 보기 싫다면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 버린 뒤에는 ‘일어나야지’ 하는 결심이 필요할까요? ‘일어나야지’ 하는 결심은 아직 내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 하는 행위입니다. 결심하거나 각오하지 말고 그냥 해야 합니다. 즉, 질문자가 말한 부정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곧 하기 싫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공부가 하기 싫으면 책을 덮고 나가 놀면 되지만 손해가 생깁니다. 그러니 ‘공부해야지’ 하고 결심하지 말고 그냥 하세요. 각오하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지 수행은 아닙니다. 수행을 할 때는 각오, 결심,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각오하고 결심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공부할 일이 있으면 공부하고, 일할 일이 있으면 일하고, 밥 할 일이 있으면 밥하고, 그냥 해버리세요.
앞으로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나면 어떻게 한다고요? 그냥 합니다. 이렇게 몇 번만 연습하면 금방 됩니다. ‘해야지’ 하고 결심하지 말고 그냥 해라. ‘안 해야지’ 하고 결심하지 말고 그냥 놓아버려라. 이것을 선(禪)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는 한 가지 더 질문을 했습니다.
염불 할 때 잡념이 많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집중하죠?
“제가 염불 수행하고 있습니다. 염불 하면 항상 잡념이 많이 떠올라요. 어떻게 하면 오로지 염불에만 집중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좀 가르쳐 주세요.”
“명상할 때나 염불 할 때는 잡념이 올라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잡념이 없어야 한다는 그 생각도 역시 잡념입니다. 잡념을 그냥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공부할 때 바깥의 차 소리와 새소리를 무시하고 공부하듯이 이런저런 생각을 내버려 두고 염불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명상을 할 때는 호흡을 관찰합니다. 그러면 명상을 안 할 때보다 잡념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처음 명상하려고 앉으면 졸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다리가 아픈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을 두고 ‘다리가 안 아팠으면’, ‘안 졸렸으면’, ‘잡념이 없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자체가 잡념이에요. 다리가 아프고 졸리고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는 가운데서도 오직 호흡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우리는 거기에 이야기를 자꾸 덧붙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멈춰야 해요. 여러분들은 명상을 하지 않고 사색을 하거나, 염불을 하지 않고 잡생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명상할 때는 오직 호흡만 알아차려야 하고, 염불 할 때는 본인 목소리에 집중해서 부처님을 생각하든지 아니면 염불 소리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잡념을 시비하는 자체가 바로 잡념이기 때문에 잡념은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공부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밖에 차 소리가 안 들렸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할 때가 공부에 집중된 상태일까요? 아니면 차 소리가 저절로 안 들려졌을 때가 공부에 집중된 상태일까요? ‘집중해야지’ 하는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망념입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