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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군자는 어떤 존재이며 분별없는 성냄은 패가망신한다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자기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여 불같이 화를 냈다가도 금방 풀고 웃으며 사과하는 소위 분노 조절 장애자들이 의외로 많다. 감정 조절이 특히 잘 안되는 사람들의 특징적인 행동을 보면 이들은 뇌가 흥분할 때마다 고래고래 악을 쓰며 손과 발까지 동원하여 과격한 행동을 순간적으로 자행한다. 이들은 몸동작이 과격해질 때마다 상대를 위협하거나 다치게 하는 행동이 습관화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들은 대개 지내온 삶의 과정이 순탄하지 않아 인생의 행로가 꼬이다 보니 외골수가 되어 자신과 관계가 있든 없든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이들은 조금만 건드려도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여 주변을 불안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엉뚱한 사람 앞에서도 분노를 표출한다.
이렇듯 감정조절이 안되는 사람들은 일상생활 자체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며 불안이라는 감정이 마음속에 깔려있는 것 같다.
평소에 화가 많은 사람, 또 까칠한 사람들을 자세히 들어다보면 의외로 겁쟁이들이 많다. 겁에 질려 등을 잔뜩 웅크린 동물처럼 특정한 상황이 불편하고 불안해서 본인의 영역을 지키고자 큰소리를 내는 것이다.
공자의 어록인 논어를 보면 공자가 제시한 군자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화를 조절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의 학이(學而)편 첫 단락에 나오는 문장이다.
군자(君子), 그는 누구인가!
군자는 유교에서 성품이 어질고 학식이 높은 지성인으로 리더의 자질를 갖춘 자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 춘추시대 때에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을 부르는 말로도 쓰였으며 또한 아내가 남편을 일컫는 말로 쓰기도 한다.
물론 유교의 가장 이상적 인간상은 궁극적으로 성인(聖人)이다. 그러나 성인은 유교에서 완벽한 이상적 인격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왕이 된다. 이런 성인의 경지는 완벽하고 지고(至高)해서 현실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인간상과는 동떨어져 있다. 공자 이전의 시대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는 군자라는 인격은 이와 좀 다르다. 성인에 비해 볼 때 군자는 인간에 접근해 있고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인간상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끊임없이 갈고 닦으면 군자라는 인격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공자 보다는 다소 후대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하는 맹자나 악하다고 주장하는 순자 모두 인간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는 하였지만 이들 역시 성인의 경지는 이상론에 불과할 뿐이며 현실적 차원에서는 보통 사람의 군자 됨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공자는 성인을 최고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꼽고 있지만 실상 논어에서 성인의 용례는 몇 차례 나오지 않는다. 성인이란 단어가 언급된 경우는 4회 정도에 불과한 반면, 군자란 개념은 총 100번 이상 등장한다. 논어에서 군자의 인격은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성인에 비해 한 단계 낮은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군자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이지만 성인을 지향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익 밖에 챙길 줄 모르는 소인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유교는 성인(聖人)을 비롯해 현인(賢人), 인인(仁人) 등 여러 가지 이상적 인격을 제시하였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현실적은 것은 군자라는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성된 인격을 갖고 있는데 비해, 군자는 스스로 노력하고 만들어가는 인격이다. 군자는 처음에는 성인에 비해 낮은 데서 출발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성인과 만나게 된다. 유교는 성인이란 절대적 인격을 통해 유교의 이상을 정립했고, 현실적인 면에서는 군자라는 인간상을 제시했다. 이후 군자의 인격은 유교 인간상의 전형이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인격을 아울러서 성인군자(聖人君子)라고 했다.
공자가 사숙(私塾)을 열어 제자들에게 가르친 학문도 바로 군자학이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끊임없이 군자가 될 것을 독려하였다. 논어의 내용도 군자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이다. 위에서 다소 언급되었지만 사실 군자라는 말은 공자 이전에는 정치하는 귀족 계급 일반을 지칭하는 지위 또는 신분을 나타냈었다. 즉 원래 군자는 젊은 귀인 귀공자, 양가(良家)의 자제 등의 의미였다가 귀인, 신사, 중후한 남자라는 의미가 되었다.
또한 군자는 사(士)의 당초 개념과 같이 본래 무인(武人)이며 수레를 몰고 활을 쏘는 사어(射御)의 무예를 기본으로 했다. 고대 주나라 시대의 군자교육이 육예(六藝)라 하여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여섯 과목을 기초로 삼았던 것도 그것이 본래 무사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는 덕치주의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을 우수한 무인으로 만들기보다는 덕으로 교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지도자로 양성하려 했다. 이렇듯 원래 군자는 무인의 개념이 강했으나 공자는 덕을 갖춘 문약하지 않고 용맹한 문인의 모습의 군자를 양성하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공자는 군자의 의미도 계급을 지칭하는 신분적 위계가 아닌 남을 교화할 수 있는 덕을 갖춘 지도자의 의미로 바꾸어 배움을 닦는 모든 이가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 본 군자는 이와같이 현실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이상을 추구하고 천명(天命)을 알고자 하는 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추어진 천명을 자각하고 이를 발견하여 도덕의 수행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여 천인합일의 경지를 추구하는 자이다. 결국 군자는 끊임없는 내적 수양을 통해 인격 완성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인격 완성을 이루기 위한 수기(修己)의 방법으로 송대에 완성된 신유학으로써의 성리학에서는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제시하고 있다. 거경은 내면의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며, 궁리는 외부 세계의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군자는 이런 학문적 방법을 통해 수양을 하며 길러진 덕을 통해 남을 다스리는 데 자신을 확장시켜 나간다. 곧 군자는 학문을 닦고 인격을 완성시켜 나가며 지도력을 갖추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공자는 이러한 군자의 첫 번째 자질(논어의 첫 단락의 문장이므로 이렇게 봄)로 화를 조절할 줄 아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자신을 통제할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가!
현대에 와서도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논어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대기업의 CEO들 중에서는 논어를 즐겨 애독하는 이들이 많아 논어를 통해 경영의 근본과 이치를 배웠다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한 논어의 첫 시작에 군자에 대해서 왜 “인부지이불온이면 불역군자호”라는 문장으로 시작했을까?
군자라는 최고의 인격을 갖추는 첫 번째 조건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라는 말로 운을 띄운 사정에 대해서는 공자의 생애를 이해하면 이러한 의문에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공자의 삶 자체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알아주어도 온갖 시기와 모략으로 고통받았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내지 않으며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군자다, 라고 노년의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듯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내지 않는다 함은 곧 나의 능력 인격 학문 등의 내면의 세계를 남이 몰라본다 할지라도 화를 내지않는 태도인 것이다. 즉 학문과 인격 등은 나의 내면을 기르는 것이기에 자기 스스로 충분히 통제 가능하지만 남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나의 영역 밖의 것이기에 내가 통제할 수 없으므로 그렇다. 그러기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하여 슬퍼하거나 아쉬워 화를 내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오히려 통제할 수 있는 내 마음에 집중할 일이다.
세상사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정말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부를 잃지 않고 인정을 받든 말든 꿋꿋이 나아가기란 쉽지 않다. 시련과 고통으로 절차탁마한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음을 현대를 사는 우리는 공자의 삶을 통하여 되새겨봤으면 한다.
불가(佛家)에서도 嗔是心中火 能燒功德林(진시심중화 능소공덕림 : 성냄은 마음속의 불이니 능히 모든 공덕을 불살라 버린다) 했으며 성경에서도 “성내는 사람과 사귀지 말며 격노하는 사람과 동행치 말라 네가 그들의 길을 배워 네 스스로 올가미를 써서는 안 된다.(잠언 22, 24~25)”하여 성냄을 크게 경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火)의 조절 즉 감정조절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함을 말하는가? 우선 감정(感情)이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에서 느끼는 기분으로 슬픔, 기쁨, 싫음, 좋음 따위의 심리 상태이다.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이러한 여러 가지 감정을 정서(情緖)라고 한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무조건 감정을 억제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 그 감정 자체에 압도되거나 휩쓸리지 않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감정 조절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감정 조절이 안되는 상태를 통상적인 병명으로는 조울증(躁鬱症)이라 하는데 이는 기분장애의 일종으로써, 정식 의학적 명칭은 양극성정동장애(兩極性情動障礙)이다. 보통 양극성장애라고 줄여서 부른다.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감정을 얼마나 느끼며 또 이런 감정이 자신과 주변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를 인식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감정이 지금 당장의 눈앞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즉 감정이 격할 때(특히 화가 날 때) 이러한 감정이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온 어떤 경험과 현재의 상황, 그리고 자신의 현재 기분의 상태까지 합해져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격한 감정이 일어나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불가(佛家)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심리학에서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곧바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중요하게 거론되는 단어가 바로 “알아차림”인 것이다. 알아차림이란 안다라는 단어의 의미와 차린다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안다라는 의미는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한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낀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차린다라는 의미는 “기운이나 정신 따위를 가다듬어 되찾는다. 정신을 차리다.”이다. 그래서 “알아차린다”라는 의미는 “알고 정신을 차려 깨닫는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을 조금 풀어서 보면 우리의 감각, 즉 오감인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을 통해서 사실, 존재, 상황을 알고 정신 차려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라 보고 놀란 놈 솥뚜껑 보고 놀란다. 자라가 아니고 솥뚜껑인 것을 알아차렸다. 사무실에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다들 나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조금 후 누군가가 나에게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즉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점에 한 사람이 재밌는 농담을 하여 모두가 웃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상황을 잘못 해석한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깨어 있는 정신 상태에서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 상황 등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림을 통하여 감정을 잘 조절할 일이다.
오죽했으면 공자같은 대 성인도 군자가 견지해야할 첫 번째 조건으로 성냄을 경계 했겠는가! 명심할 일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화를 잘 내지 않으며 또한 화를 조절할 줄도 안다.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패가망신(敗家亡身)할 뿐이며 주변 사람들까지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